북버지니아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서쪽에 있는 교외다. 대부분이 워싱턴에 출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2005년 미국 인구통계에 의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계가 132만명이며, 워싱턴 수도권에만 11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유학생, 방문자 등을 포함하면, 한국인은 이보다 훨씬 많이 미국에 살고 있을 줄 믿는다.
50년 전 내가 미국에 왔을 때는 미국에 한국 유학생이 400명이나 된다는 신문머리기사를 읽은 것을 기억 한다. 호텔에서 숙박등록을 할 때 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Cho' 라고 말했다. 호텔 직원이 알아듣지 못 하고, 글자를 한자 한자 써 보라고 한다. 나는 천천히 C. H. O.라고 말했다. "아! 미스터 코.." '초'를 '코'라고 발음하며 반문한다. "노! 미스터 초"라고 정정 한다. 호텔 서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글자가 더 있을 텐데..."하며 중얼거렸다. 한국 이름 Cho는 미국인들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50년이 지난 오늘 Cho는 미국에서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뉴욕에서, 전화번호 디렉토리를 들춰 보면, Cho성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Smith씨들 보다 더 많다. 한국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진출한 결과 미국 속의 한국인은 이미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북버지니아에 한인촌-Korean town이 두 군데나 있다. 처음에 생긴 마을은 애난데일(Annandale), 워싱톤 DC의 서남쪽, 수도와 가까운 마을이다. 무척 깨끗하다. 한국인들이 정착한 후에 집 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애난데일 거리에 들어서면 한국 간판을 내건 식당, 한약방, 상점 등이 즐비 하다. 큰 거리, 시선이 와 닿는 곳에 한국 글씨로 큼직하게 써 있는 교회들 간판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한국말을 모르는 미국주민들에겐, 무척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여기 애난데일에서는 영어 한마디 하지 않아도 살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요 근래에 두번째 한인촌이 생겼다. 센터빌(Centerville)라는 마을이다. 서쪽으로 한참 나가야 하는 넓은 지역 이다. 새로 개발되는 주택 단지가 많은 곳이다. 여기는 대형 사우나, 대형 한국 식품점, 식당, 한국 교회들이 즐비 하게 들어서있는 곳이다. 북버지니아는 미국 속의 한국이다. 아침에 한국 신문이 배달 되고, 24시간 한국 TV 방송을 볼 수 있고, 배고프면 한국 식당에 가고, 외로우면 한국교회에 나가고, 운동하고 싶으면 한국인 친구들과 골프장에 나간다. 한국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자연 환경이 좋고, 우리의 안전을 미국이 보호 하고 있다는 것과, 과외도 필요 없고,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자리 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 한국과 다르다.
한국사람들이 모여 사는 미국 지역에는 3가지 특색이 있다. 우선 한국인이 증가 하는 지역에는 그와 비례해서 한국 교회가 늘어 난다. 내 처는 미국 생활이 거의 반세기나 되었는데도 한국 교회에 나가 한국말로 찬송을 하고, 한국 말로 설교를 들어야 은혜를 받는 것 같다고 한다. 다른 이민자들과는 달리 한국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말이 있고, 음식이 다르고,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가치관이 다르다. 미국엔 ‘정’ 이라는 말이 없다. 말이 없기에 그런 감정을 표현 할 수도 없다. 억지로 번역을 한다면 ‘정’은 미국인이 생각 하는 집착(attachment)이다. 감정에 얽매인 집착 말이다. 한국 사람들이 ‘정’으로 사귀고 이 ‘정’으로 대인관계를 할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다. 그러면서도, 몸에 배인 가치관을 벗어 나지 못 한다. 미국 감리교회는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이 없다. 평신도(Lay man)에 의해 교회 활동이 운영된다. 그러나 한국 감리교회에는 직분이 있다. 장로, 권사, 집사 등. 왜 그럴까? 생각 해 보았다.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따라 다닌다. 교회나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장을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한국 이민자들의 정서인 것 같다.
두 번째의 특색은 한국 식당이다. 워싱턴 수도권에 300여 개나 되는 한국 식당들 대부분이 한국인들만 상대 하는 먹거리라는 점이다. 국밥, 해장국, 갈비탕, 대구탕, 된장 찌개. 미국인들에게 무척 생소한 음식이다. 미국에서 낳고 자란 우리 아이들, 손자들도 이런 음식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나, 내 처나 나는 이런 음식을 먹어야만 속이 편안한 것 같다. 여기 타이전스(Tysons) 코너에 W라는 고급 음식점이 있다. 여기 음식은 한국음식을 서구화 해서 많은 미국인들이 오고 있다. 그러나, 해장국, 된장찌개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자주 오지 않는다. 워싱턴 근교에는 여러 민족 고유의 식당들이 많다. 각국의 대사관 주방장이 왔다가 대사가 교체되면 주방장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 가지 않고 이 지역에서 음식점을 차린다는 소문처럼 여러 각국의 고유 음식점이 많다. 타이, 인도, 아프가니스탄, 중동, 파키스탄 등 각 민족의 고유 음식점이 많으나 이 음식점의 손님은 미국인들이 많다. 오로지 한국 음식점들 만이 한국인들만 드나든다.
세 번째 특색은 교육열이다. 북버지니아에 한국 이민자들이 모여 드는 큰 이유는 학교가 좋다는데 있다. 학군 때문에 서울 강남지역에 몰려들듯이 북버지니아도 학교 때문에 한국계가 모여든다고 한다. 여기 페어팩스(Fairfax) 카운티의 학교는 미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학군이 좋다는 평이다. 학교가 좋고 나쁜 것은 대부분 그 지역 주민의 소득, 부모의 교육, 대학 진학률로 판가름 할 수 있다. 여기 북버지니아의 가정당 연 소득은 10만 달러, 부모들의 학력은 70% 이상이 대학 졸업, 무려 25% 이상이 대학원 출신이라고 한다. 대학 진학률은 미국 평균 50%에 비해 여기 페어팩스 지역 고등학교 졸업자의 대학진학률은 70%나 된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이 모인 학교는 대학진학률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한다고 한다. 아들딸 교육에 제일 극성을 부리는 사람들이 한국 어머니들 이라고 한다. 이민 온 사람들의 미국 꿈- American Dream은 아이들을 일류 대학에 보낸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경영 하는 자영 사업 중 입시나 SAT(scholarly Aptitude Test) 성적 올리기에 치중하는 학원들 수입이 제일 좋다고 한다. 대부분이 한국계 학생들이라고 한다. 미국 와서도 과외 습관을 버리지 못 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인 것 같다.
북버지니아의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주일이면 우리 부부는 교회에 나간다. 우리와 비슷한 70대 중반의 부부들, 대여섯 쌍이 몰려 다닌다. 아침 예배가 끝나면 이 대여섯 쌍이 우르르 한국 음식점으로 간다. 해장국을 시키고 이야기 꽃을 핀다. 돌아가는 시국 정세들을 나눈다. 우리들의 공통점은 부인들이 이화여고나, 이화여자대학을 나왔다는 것과, 미국에서 오래 살았으며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해장국 집에 들어서자 늘 전주곡처럼 하는 L씨의 말이 있다. 해장국 집에 오는 맛에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푸념을 한다. L씨는 50년대 초에 미국 와서 공부 하고 미 연방정부 국방부 고위 문관으로 40여 년 일하다가 은퇴 했다. 하와이에 살면서 한국을 드나들며, 골프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다가 딸이 사는 여기 북버지니아로 이사 왔다. K라는 부부는 미국에 40여 년 살면서 공학박사로 30여 년 일 하다가 성공한 사람이다. 돈도 많이 벌고, 은퇴 후에도 대궐 같은 집에 살며 교회를 통해 많은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젊었을 때는 미국인들과 함께 미국 사회에서 열심히 일 하다가 은퇴 후엔 한국교회에 나오고, 한국 사람들끼리 몰려 다니며, 골프 치고, 여행 다니고, 해장국 집을 찾는다. 미국에 반세기 이상 살면서도 늙으면 한국사람들끼리 몰려 다니며 한국음식을 먹는 생활로 돌아간다.
요 근래 알게 된 두 한국청년이 있다. 꿈을 갖고 미국에 왔다. 한 학생은 새벽에 워싱턴 DC 식당에 나가 초밥 하는 것을 배우며 식당 일을 하고 오후엔 영어 배우러 학원에 다닌다. 그에게는 꿈이 있고, 미래의 설계도가 있다. 또 다른 한 학생은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주말이면 친척이 하는 슈퍼에 나가 일 한다. 2년제 커뮤니티(Community College)를 나와 4년제 주립대학으로 옮기고 대학원은 일류 사립대학에 다닌다는 미래를 설계하고, 실천 하고 있다. 이 두 20대 청년은 미국에서 멋지게 살 것이라고 믿는다.
이민 1세들은 대부분 자영업을 한다. 세탁소, 식당, 식품, 한약방, 중소기업 등 다른 소수계들 보다 남달리 열심히 일한다. 2세들은 이민사회를 떠나 의사, 변호사, 기업인, 교수 등으로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는 전문직 생활을 한다. 북버지니아 한국인들은 다른 소수계와는 달리 상위권 소득층에 속한다고 한다. 나와 친하게 지나는 50대 후반의 부부가 있다. 한국인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한다. 부인은 연방정부 고급공무원, 남편은 중소기업 사장을 했다. 이 50대 부부가 새로운 삶을 개척 하고 있다. 최근 남편이 이 근처에 있는 유명한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졸업 후 목회자가 되어 봉사하겠다는 각오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 한다. 50대 후반, 남들은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에 새로운 삶을 설계 하고 실천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인 것 같다.
여기 북버지니아에 사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다 잘 산다. 청년들은 꿈을 가지고 야심 차게 살고, 중년들은 제 2, 제 3의 인생 설계를 실천 하고, 노인들은 노인의 테를 벗어나 젊게 즐겁게 산다. 한국을 떠나 그 보이지 않는 기대의 사슬, 명예, 체면 같은 굴레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 개인개인이 원하는 대로 살수 있는 곳이 여기 북버지니아인것 같다. 굴레의 쇠사슬을 벗고 살수 있기에 여기 북버지니아 한국 사람들은 멋지게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008년 12월 26일
조선형
<필자소개> 조선형 박사: 연우포럼 국제자문단 회장
1959년 한국외국어대 영어학과 졸업/63년 미 템플대학교 석사(공업 경영)/65년 미 펜실바니아대학교(UPen) 와튼스쿨 MBA/70년 미 피츠 버그대학교 박사(컴퓨터과학) /67- 73년 피츠버그교육구 전산실장/ 73-79년 펜실바니아 주정부 문교부 국장, 차관 /79-81년 매사추세츠 주립대학교 운영담당 부총장/81-99년 미 Wang Laboratorie 부사장으로 입사, 이후 18년간 일본 및 한국 현지법인 사장 을 역임/71-75년 미 피츠버그대 교수/75-79년 미 펜실바니아대 해리스버그분교 교수 /79-81년 미 벤틀리대 대학원 교수/93-04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 /00년~현재 (주)프리씨이오 Founding Partner/05년~현재 연우포럼 국제자문단 회장/현재 미 버지니아주 비엔나에 거주 /저서: <소프트웨어공학>, <정보기술의 기반구조 구축과 활용>, <정보화 사회의 길목에 서서> 등/ 이메일: seon.ch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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