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2018년 9월25일
추석연휴, 아침 일찍 50년전 제 인생이 버려졌던? 그 곳을 찾아갑니다. 어머니
1968년이던가요
마지막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 주던 그 계절 즈음
어머니는 저를 그 곳에 버리듯이?(제 판단) 저를 밀어 넣으셨죠.
어머니 판단으로는 그 곳이 종말에 천국으로 갈 수있는 마지막 '구원의 방주'라고 굳건히 믿으시구요.
그 해
여름이 지나고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어 오던 날
어머니와 가족과 생 이별을 하고
전, 어머니의 뜻대로 이 세상 종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에 들어 갔었죠...ㅜ
영문도 모르는 아직 17살이던 소년은
그' 구원의 방주'?라는 곳의 피아노 공장에서, 형광등 만드는 공장에서
그 무리들이 말하는 그들의 神? 으로부터 가장 축복?을 받는 다는 '건설대'라는
목수일에, 콘크리트하는 막 노동판에서
어린 노동자로 노동을 시작했구요....
그 것이 이 세상 종말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굳게 믿으시는 어머니의 뜻대로 말입니다.
그 곳이 '구원의 방주'? 인 줄도 모르는 저는 그곳을 도망치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썼지만 번번히 실패 했구요...
가슴엔 알 수없는 커다란 절망의 구멍이 뚤렸구요.
바로 몇 해 전까지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가을을 알리면 그 당시에 뚤린 가슴의 구멍으로
시린 가을바람이 나를 서늘하게 하곤 했답니다.
어머니
그런 내 인생의 청소년기와 청춘을 송두리채 빼앗아가 버린 절망과 분노의 그 곳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습니다.
50여년이 지난 오늘...
덕소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실고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50년 전 작은 시골의 간이역에 불과하던 '덕소역전'은 깔끔하고 화사한 전철역으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다 허물어져가던 주변의 시골마을과 허허 벌판은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구요.
50년 전 그 '구원의 방주'? 였던 곳(어머니의 표현)은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구원의 방주'?의 대표적인 역활을 했던 교회(덕소전도관)만이 덩그러이 옛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50여년전에 종탑위에 서 있던 십자가가 지금은 비둘기 상으로 교체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
저 비둘기 상도 나와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죽지않고 영원히 산다던 그들의 하나님?은 70살을 겨우 넘기고 죽었는데
아직도 이 곳이 '구원의 방주'?라고 굳게 믿는
그들이 믿던 그들만의 하나님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나이든 할머니들만 줄지어 교회(천부교회 옛 전도관) 언덕을 내려옵니다.
'덕소'의 가을하늘은 50년전의 가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높고 푸르렀습니다.
이 '구원의 방주'?에 17살 소년이었던 저는 이유도, 원인도 모른 채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라는 이름하에 졸린 눈을 비비며
기숙사 사감 장로의 강제적 호출에 새벽3시부터
쫓기듯 끌려? 나와 원인도 모른채
아니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기 위해 ㅠㅠ
무릎을 꿇고 앉아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2~3시간씩 찬송을 불러야 했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하나님)에게 기도?하는 행위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말이 기도지 뭘? 무슨 기도?를 해야하는 지도 모르는 16살 소년은 난방도 안되는 차가운 교회바닥에
엎어져 부족한 잠을 자며 기도하는 시늉을 해야만 했습니다. ㅠㅠ
2~3시간을 그리 무릎을 꿇고 벌서고? 나면 이 세상 종말에 마지막 구원을 주는 구세주??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또 1시간을 넘게 이해도 할 수없는 내용도 모르는 설교를 떠들어 댓구요.
17살 어린 소년은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피곤함과 지루함 속에 꾸벅꾸벅 졸았구요.
영원히 죽지않고 영생을 한다던 구세주라는 자칭 하나님이라는 자칭 神이라던
그 사람은 일찍? 갓 70살 막 넘기고 당뇨의 합병증으로 죽었답니다.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말입니다.
(당시엔 자칭 영적 부모라고 사람들은 그 를 '영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1968년도 당시 이 곳 '덕소'의 한 겨울 새벽 한강바람은 귀를 에이는 듯 매섭고 차가웠습니다. 어머니
소위 '제강숙소'라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던 다다미 방에서 덜덜 떨며 새우잠에 눈을 막 붙히려하면
기숙사 사감이라는 장로는 기숙사 전체에 찬송을 크게 틀고 그것도 모자라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각 기숙사 방마다 자고 있는 사람들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강제로 깨워 새벽 교회에 가게 하였습니다. ㅠㅠ
그 곳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곳이었습니다. 라디오 뉴스도, TV도 신문도 철저하게 단절되어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기념으로 선물받았던 유일한 나의 꿈이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깊숙히 숨겨놓고
잠자리 들기전 이불속에서 이어폰으로 몰래몰래 듣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이어폰줄이 가위로 도막도막 잘려져 있었습니다. ㅠㅠ
'제강숙소'라는 남자 기숙사에서 산 중턱에 자리한 교회'전도관'까지 가려면
허허벌판의 한겨울 한강 바람은 눈보라를 몰고와 옷속을 파고들어 살을 에이는 그 자체였습니다.
그 눈보라를 휘몰아 살을 에이던 허허벌판의 길이 지금은 이렇게 변해 있네요, 어머니
교회(덕소신앙촌전도관) 바로 아래에 있는 이 다리는 바로 한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내가 흐르는 다리인데 한강과 산골짜기에서 휘몰아치는 한 겨울 새벽3시경의 찬 바람은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나의 사춘기를
미래를 꿈꾸고
미래의 꿈을 설계해야 하는 17살 소년은
절망과 슬픔과 분노속에서 몸부림을 쳐야만 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神이었던
마지막 종말의 구원의 神이었던 그 사람은 하루가 멀다하고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소리쳐댔습니다.
절망과 분노속에서 새벽부터 밤 늦도록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던 그 '공장지대' 자리는 지금은
번듯하게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엔 수많은 청춘들의 절망과 분노가 묻혀있는 장소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1968년도에 피아노공장, 형광등 공장, 제과공장, 수예공장, 메리야스공장, 양말공장들이 있던 장소입니다. 어머니.
옛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17살 한 소년의 꿈을 송두리채 빼앗아간 장소-
절망과 분노에 몸부림을 쳐야만 했던 그 장소-
수 십번 탈출? 할 때마다 어머니는 기절을 하셨죠?
종말이 눈앞에 다가 왔다고, 그 불덩어리가 쏟아지는 종말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어머니께서는 그 불덩어리가 쏟아지는 종말을 보지 못하시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구요...
꿈을 포기한 채 절망과 분노로 새벽부터 밤 늦도록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절망의 장소입니다. 어머니
이 곳을 탈출하기 위해 무던히도 울었고
무수히 몸부림치며 10대 후반을 보냈던 장소입니다. 어머니.
종말이라는 단어로 10대 한 소년의 꿈을 무참히 빼앗아간
'구원의 방주'?라던 그 장소에 5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번듯하게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어머니
종말을 비웃듯이 말입니다.
어머니께서 꿈꾸시던 구원의 방주도, 하늘이 두루말이처럼 말리고 불덩어리가 쏟아지는
이 세상 종말의 사건도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네요. 어머니.
그 종말로 어머니에게 사기치던 그 '영모님'(당시)이라던 사람은 어머니보다도 훨씬 더 짧게 살고 죽어다던군요.
분노와 절망 속에 보내던 열일곱살의 나날들
해가 넘어가는 매일저녁 이 강가에 나와 눈물을 흘렸습니다.
1968년도만해도 개발되기 전이라 이 한강가에 까지 바로 나올 수가 있었는데
그 땐 물에 빠져 죽어버릴 생각을 왜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명이란것이 끈질기게 질긴 모양입니다.
지금은 개발되어 자전거도로가 생기고 자동차 전용도로가 생기고 강가에 바로 접근하기가 어렵군요, 어머니
한강입니다.
1968년 당시엔 강 건너 미사리도 허허벌판 농지들이었는데 지금은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군요.
미사대교도 보입니다.
당시엔 강건너가 미사리인지도 몰랐습니다.
강가에 나오면 멀리 서울의 하늘의 불빛만 아득하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땐 왜그리 날씨도 추웠던지 한겨울엔 한 강도 꽁공 얼었었지요.
한강에서 그들의 神 '영모님'이라는 사람은 그의 가족들과 행복하게 스케이트를 탓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손뼉을 치며 행복해 했구요...
열일곱의 소년은 울고 있었구요....
50년이 지난 그 '구원의 방주'? 였던 곳은 전혀 새로운 곳으로 변해 있습니다. 어머니
흙먼지 풀풀나던 비포장 도로도 아스팔트 도로로 바뀌었구요.
미래를 꿈꾸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 17살의 사춘기 청소년은 원인도 모른 채 울면서 그 곳에 앉아있었습니다. 어머니...
............
이 길이 50년전엔 허허벌판으로 새벽마다 기숙사 사감에게 호출되어 매일새벽 '새벽기도'란 이름으로 가슴을 후벼드는 눈보라에
귀를 에이는 듯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벌벌 떨며 새벽기도?를 다니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상가도로가 되어있었습니다.
어머니.,
이 길 저 쪽 끝자락 즈음엔 '덕소교'란 작은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가면 왼쪽으로 산 중턱에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진앞 오른 쪽에는 절망과 분노의 '제강숙소'란 이름의 남자들의 기숙사가 있던 곳입니다.
사진 오른쪽 신호등에 가려져있는 '할매순대국'집에서 '얼클라면할매순대국' 한 그릇을 먹고 왔습니다.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50년전의 기억의 퍼즐을 붙혀 나가기 조차 힘들게 모든 것들이 변해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곳은 1968년도 당시 '덕소신앙존 주택지대'였던 장소입니다.
당시'시온고등학교'였던 자리에 지금은 '덕소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왜? 이 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는지?
또 어머니께서 왜? 이 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입니다.
그리고 2년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탈출?을 계획했지만
어머니와 어머니의 神이었던 '靈母님'의 '종말론'에 또 다시 목덜미를 잡혔고
저는 절망과 좌절속에 다시 주저 앉아 울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
영혼마저 털려버려 나 자신의 영혼마저 잃어버린 저는 '뽑혔다'?는 그 무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안고
제3의 신앙촌 인 '기장 신앙촌'이라는 곳에 다시 끌려? 가야만 했습니다.
그 곳이야말로 그 무리들이 소원하던
이 세상에서 죽지않고 살아서 구원?을 얻는 천국 '천년성'?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뽑혀서'? 가는 것을 부러워 하던 곳으로 말입니다.
영혼마져 털려버린 19살의 청춘은 왜? '뽑혀야'? 하는지 조차 모른 채 그 무리들이 부러워하는
그 '천년성'?이라는곳으로 가는 영광스러워 하는 '기장신앙촌'에 '뽑혀서'? 갔습니다.
그 영광스런? 곳 '기장신앙촌'에서 그 무리들이 말하는 가장 축복받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건설대'-
그 무리들의 또 다른 마지막 '구원의 방주'를 건설하기 위한 막 노동 건축현장이었습니다.
건축현장에서 20살의 청춘은 꿈도, 영혼도 털려버리고
막 노동 건축 현장에서 새벽부터 밤 늦도록 목수일을 해야했고 콘크리트 작업을 해야했습니다.
20살의 청춘-
꿈도, 희망도, 미래도, 인생도 , 영혼마져 몽땅 털려버린 나의 청소년기와 20세의 청춘-
어머니-
내 인생의 청소년기와 청춘은 절망과 좌절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지나왔습니다.
어머니-
지금도
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앗아가버린 '구원의 방주'를 생각하면 끊임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잃어버린 제 청춘을 제 스스로 보상받기위해 이를 악물고 기를 쓰고 살아왔습니다. 어머니
너무도 많이 변한 50년의 세월-
너무도 힘들게 지나 온 세월-
돌아오는 전철안에서는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용서?-
또 다시 영혼을 털린 상태?-
50년전의 절망도,
분노도,
슬픔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까요?
그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
2018. 9. 25
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