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유방 편: 제3회 나라와 백성에 이로운 정책을 펴다
(사진설명: 유방과 측근들의 석상)
또 회남(淮南) 왕 경포(鯨布)가 역모를 일으키자 그 삼족을 멸하고 자신의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 왕으로 봉했다. 그러는 중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상처에서도 피가 흐르고 마음에서도 피가 흘렀다. 3명의 공신을 모두 멸했으니 이렇게 넓은 강산에 전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경포를 멸하고 장안으로 돌아오던 유방은 패현을 지나다가 고향에 조용히 며칠 머물 생각이었는데 지방의 관리들이 유방의 귀향 소식을 알아버려 온 동네가 시끄러워졌다.
유방은 황제의 권위를 내려놓고 패궁(沛宮)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고향 사람들을 초대했다. 고향마을의 사람들과 친지, 벗들이 모여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즐겼다. 유방은 또 120명의 젊은 악사를 불러 주흥을 돋우게 했다. 술이 거나해지자 유방은 공신을 멸한 것으로 인한 우울함을 잠시 잊고 몸소 축(築)의 현을 뜯으며 <대풍가(大風歌)>를 즉흥적으로 지어 불렀다.
큰 바람이 부니 구름이 흩날린다(大風起兮雲飛揚)
천하를 평정하고 금의환향하였도다(威加海內兮歸故鄕)
어떻게 용사를 얻어 이 나라의 사방을 지킬 것인가(安得猛士兮守四方)!
기세가 웅장하고 분위기가 침울한 노랫말은 유방의 말 못할 마음 속 괴로움을 대신했다. 유방은 젊은 악사들에게 <대풍가>를 가르쳐 부르게 하고 자신은 검무를 추면서 슬픔이 북받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검무를 마친 유방이 패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그네는 언제나 고향을 그린다. 짐이 비록 관중에 도읍을 두기는 했지만 붕어 후에 짐의 혼백은 여전히 패현을 그릴 것이다. 하물며 이 곳은 짐의 복지이다. 짐은 패공의 이름으로 진나라의 혹정에 반기를 들었고 궁극적으로 천하를 얻었다. 짐은 패현을 탕목읍(湯沐邑)으로 정해 자자손손 이 곳 사람들의 노역과 세금을 면제하겠다.”
탕목읍은 원래 제후들이 천자를 알현할 때 숙박하고 재계하는 장소로 천자가 제후들에게 내린 봉읍(封邑)이었나 후에는 황실가족이 사사로이 세금을 받는 곳을 말한다. 패현의 사람들은 너무 기뻐서 만세를 세 번 부르며 매일 황제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재미 있는 어제를 추억하며 즐거움에 빠졌다. 하루는 술집 주인이 술에 취해 말했다.
“유계, 너 아직 나에게 빚진 술값을 갚지 않았어!”
그 말에 모두들 크게 웃었고 현령이 급히 말했다.
“관아에서 그 빚을 갚을 테니 더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패현에서 열흘 동안 머문 후 유방은 떠날 준비를 하며 말했다.
“짐이 데리고 온 사람이 너무 많아서 너무 큰 부담이 되었다.”
유방의 고향 사람들이 말했다.
“패현의 노역과 세금을 면하면 풍성(豊城)도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풍성은 짐이 나서 자란 곳이니 짐이 제일 잊지 못하는 곳이다.”
유방이 말했다. 궁극적으로 풍성도 패현처럼 황제의 탕목읍이 되어 황실은 풍성에서도 세금을 받지 않게 되었다.
유방은 고향에서 또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吳) 왕으로 봉했다. 유비는 유방 둘째 형님의 아들로 그 때 겨우 20살이었다. 유비를 오 왕으로 책봉하자 후회한 유방이 유비에게 말했다.
“50년 후에 동남쪽 땅에서 누군가 역모를 일으킨다면 아마도 너일 것이지? 우리는 모두 성이 유씨이니 한 집안이다. 절대 역모를 일으키면 안 된다!”
유방의 말에 유비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
“무슨 말씀요, 절대 안 그럴 것입니다.”
유방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육가(陸賈)가 저서 <신어(新語)>를 올리며 간언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도합 12편으로 된 <신어>는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 승패의 원인을 다 총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경이 짐과 여러 대신들이 듣도록 <신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으시오!”
육가는 큰 소리로 <신어>를 읽기 시작했다. 육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방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사상의 압박, 언론의 압제로 민심을 얻지 못해 마지막에 남도 해치고 자신도 망쳤으나 세상의 도서는 여전히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지 않는가? 백성들로 하여금 책을 읽고 말을 하게 해야 하는 이치는 나도 안다. 하지만 태중대부(太中大夫) 육가가 매일 내 앞에서 시와 책을 읊고 논하니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내 이 천자도 정신이 산란해져서 그를 욕했다.
“짐은 말을 타고 천하를 얻었는데 무슨 시간이 있어서 책을 읽겠소? 짐 앞에서 잘난 체 하지 마시오. 공자 왈을 입에 달고 사는 그 진부한 선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짜증이 나는구려.”
그러자 육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말을 타고 천하는 얻을 수 있지만 말을 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상(商)나라 탕(湯) 왕과 주(周) 나라 무왕(武王)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고 문치(文治)로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문과 무를 겸해야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오(吳) 왕 부차(夫差)는 궁병독무(窮兵黷武)로 멸망에 이르고 진(秦) 왕조는 가혹한 법률을 제정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아 마지막에 나라를 잃었습니다. 가령 진나라가 6국을 병탄한 후 어진 정치를 펴고 성현들을 모방했더라면 폐하께서 천하를 얻으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육가의 말은 듣기는 싫었으나 이치는 있었다. 나는 기분은 안 좋았으나 마음으로 감복해 이렇게 말했다.
“경이 짐을 위해 진이 왜 천하를 잃었으며 짐은 어떻게 천하를 얻었는지, 그리고 고대 나라들의 승패와 득실의 이유는 어떤 것인지 글로 쓰시오.”
육가가 한 편씩 쓰고 한 편씩 나에게 읽어주어 나는 느낀 바가 많았다. 지금 그 여러 편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는데 대신들도 배우게 해야 하겠다…
육가가 <신어>를 다 읽자 유방은 소하에게 명을 내렸다.
“소 승상, 승상이 책임지고 <신어>의 교훈적 경험에 근거해 대한률령(大漢律令)을 새로 정하시오.”
소하는 황제의 어명에 따라 곧 <한율구장(漢律九章)>을 제정했다. 한 나라의 새로운 법률은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키며 나라의 원기를 회복하기 위한 느슨한 정책이 주를 이룬다. 한나라는 이 법률로 문화를 유린하고 언론을 억압하던 진나라의 폭정을 끝냈으며 화락하고 대범한 정치적 국면을 열고 서로 다른 것을 모두 받아 들이는 포용적인 문화적 구도를 형성했다.
그로부터 <한율구장>은 4백 년 남짓이 시행되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한 왕조인 한나라 시대를 열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