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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뿌리
“얘 봉순아, 내 스타킹 찾아와아.”
원피스의 벨트를 조이며 진혜는 상큼하게 목청을 뽑았다. 그리고 벨트 라인에 두 손을 가볍게 올려놓고 발뒤꿈치를 바짝 세웠다. 진혜는 거울 속에서 느리게 좌로 돌고 천천히 우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발끝까지 숨김없이 드러나는 자신의 몸매를 훑어내리며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싱싱하게 샘솟는 만족감을 포옹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나의 보석. 162센티미터에 46.2킬로그램. 엄마의 그지없이 고마운 유산인 늙음을 모르는 유방과 도매금으로 황인종 취급당하기는 억울한 우윳빛 피부. 이것들이 궤도 이탈을 하기에 최적의 여건을 갖춘 남편의 애정에 쇠고랑을 채우고 있지 않은가.
“아줌마, 여기 팬티 스타킹요.”
“으응, 그래. 강 기사 뭘 하니?”
“또 라디오 틀어놓고 있어요.”
“어서 차 준비하래라. 시간 없다.”
진혜는 서너 개의 스타킹 중에서 원피스 색깔과 같은 계통의 쥐색 빛을 골랐다. 원피스를 훌쩍 걷어올리고 앉아 스타킹을 꿰신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골라가며 양쪽 무릎까지 올린 다음 일어서서 허벅지를 거쳐 마지막 단계인 허리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진혜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자신의 하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쪽 곧은 다리와 삼각 팬티에 빈쯤 가려진 군살이라곤 붙지 않은 아랫배. 이 배에 세 아이가 머물렀었다는 사실은 친구들의 시샘만이 아니라 자신도 믿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런 아랫배를 간직하기 위해 바치고 있는 정성의 대가이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같은 노력을 하면서도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어쩔 수 없이 내 향기의 노예, 진혜는 뭉클 솟구치는 원색의 감정에 바르르 어깨를 떨었다. 팬티 스타킹을 신을 때마다 하체를 노출시켜 보는 것은 버릇이었고 그때마다 시디시게 저려오는 행복감이 짧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빨리 미장원으로.”
진혜는 운전사에게 일렀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섰다. 진혜는 몸을 부리며 눈을 내려감았다.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분과 긴장이 엇갈리는 탓이었다. 오늘의 외출은 예사 외출이 아니었다. 낮인데도 남편이 선뜻 동행을 받아들었다. 자신이 먼저 동행을 제의하지 않았더라도 남편은 이미 그럴 심산이었을 것이다. 자식들에 대한 남편의 유별난 관심은 주변에 소문이 나 있었지만 큰아들 동찬이에겐 좀더 정색을 하는 편이었다. 동찬이 때문
에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낮에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한다는 사실에 진혜는 약간 들뜨고 있었다. 남편과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외출을 하곤 했다. 그린데 그 외출은 언제나 밤 시간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개가 그런 식의 외출이 되겠지만 특히 남편에겐 일요일이 없었던 것이다. 연중무휴의 병원 운영이 남편의 방침이었다. 병에도 휴일이나 일요일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상대는 모든 면에서 각 대학병원들이다. 원장인 남편의 이런 방침에 반대하는 의사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빼앗겨버린 일요일을 사는 불만이 적잖았다. 그러나 진혜는 표를 내는 맹꽁이 작전 같은 것은 펴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이 하는 그 어떤 일에나 무관심할 만큼 관대했지만 병원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일요일도 죽여가며 일을 하는 맹렬한 정열 때문에 남편은 마흔셋의 나이에 종합병원장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달력에 그저 빨간색으로 표시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진혜는 마음을 정리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오늘은 남편이 낮에 시간을 낸 것이다. 동찬이가 멋들어지게 해치워야 할 텐데. 박수와 박수의 물결, 번쩍거리는 황금빛 트로피, 번갯불처럼 터지는 플래시, 신문마다 실린 동찬이의 사진과 이름. 가슴은 더욱 콩콩거리며 뛰었다.
“사모님, 염려 마십시오. 틀림없이 1등일 겁니다. 동찬이 실력도 뛰어나고 손도 그만큼 썼으니까 사모님은 잔치 준비나 하십시오.”
선생의 말을 되씹다 말고 진혜는 가벼운 한숨까지 내쉬었다.
“점심 먹어야지.”
차에서 내린 진혜는 그때까지 문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운전사에게 천 원 권 한 장을 뽑아 건넨다.
“어머, 원장 선생님 사모님 어서 오세요.”
“어머머머, 이 원피스 또 새로 하셨군、요? 어쩜, 어쩜 요리 딱 어울리실까.”
“증말, 이 심풀한 데쟈아인, 이 고상틱한 칼라, 딱 사모님한테만 어울리는 거야. 을마나 멋져, 글쎄.”
미장원에 들어서자마자 진혜는 주인과 미용사들에게 포위당해 영접을 대신하는 찬사의 소나기를 한바탕 뒤집어쓰고서 야 제자리를 잡았다.
“전신 맛사지 하실 거죠?”
“아냐, 콜드 맛사지만 간단히 해줘. 나 지금 시간 없어.”
“어디 약속 있으신가 부죠?”
“아빨 만나기로 했어.”
“좋으시겠네요. 낮에 파티도 아닐 테고, 누구 결혼식에라도 가시나요?”
“시시하게 결혼식은. 오늘은 아주 가슴 조마조마한 근사한 날이지 뭐야.”
“아아 알았어요. 두 분 결혼 기념일이군요. 그렇죠?”
“그것 참 그럴듯한데? 근데 그게 아니구 말이지, 우리 동찬이가 전국 음악 콩쿨 최종 결선에 나가는 날이야. 그러니 내 맘이 어떻겠어.”
“어머 장하기도 해라. 노랠 불러요?”
“아니 아, 바이올린이라구, 바이올린.”
“어마, 그것 참 어렵다던데. 그래, 몇 년이나 했길래 결선에 올랐어요?”
“자꾸 말 시키지 말어. 맛사지하는데 주름잡히잖아.”
진혜의 짜증에 마사지를 하던 미용사와 손톱을 다듬던 미용사가 찔끔하더니 서로 마주 보고 입을 삐쭉거렀다. 마사지 대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사르르 내려감은 진혜는 연주하는 아들의 그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사지를 마친 진혜는 아직 굳어지지 않은 매니큐어 때문에 열 손가락을 거미 발처럼 벌려서 들어올린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진혜는 화장실에서는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화장을 하는 동안 입을 놀리면 안면 근욱의 무질서한 수축과 괭창으로 화장이 제대로 먹히질 않았고 특히 실주름이 잡힐 엉뚱한 위험 이 도사리고 있었다.
화장을 마친 진혜는 고데를 하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았다. 미스 같다고 하기엔 좀 억지스럽지만 아홉 살을 싹 에누리해서 서른이라 하기엔 손색이 없는 거울에 담긴 자신의 얼굴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몇 년 했느냐고 물었지? 다섯 살 때부터니까 만 7년이야.”
“어머나 그럼 귀신이겠네요? 그 밑에 여자앤 뭘 하지요?”
“유미? 피아노야.”
“그 태권도 뽐내는 막내는요?”
“형 따라서 바이올린.”
“그 돈만도 꽤 많이 들겠네요.”
“그것 만이라면 얼마 되나 뭐.”
“그럼 또다른 것도 가르치세요?”
“셋 다 미술 학원엘 다니잖아. 그리고 아들 둘은 태권도장에 나가지, 유미는 나하고 수영장엘 다니니까 그냥 죽을 지경이지 뭐야.”
“그게 얼마나 행복한 생활예.: 원장 선생님이 잘 버시니까 끄떡없잖아요. 우리 같은 신세론 꿈만 같은 얘기예요,”
진혜는 또 느긋한 포만감을 즐기고 있었다. 정녕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이었다. 남편은 아무래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고리타분한 대학병원 생활을 걷어차 버리고 동창과 후배들을 규합해서 종합병원을 만든 것이다. 외과 전문인 남편의 수술 솜씨는 어느 한복집 아주머니의 소문만큼 믿을 만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노력을 했고 그에 걸맞게 야망도 항시 뜨거운 모래 바닥이었다. 굳이 흠을 잡는다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찢고 째는 의사답게 과음을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흠은 오히려 자신의 아내로서의 값을 올려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틈새였다. 진혜는 이 흠을 꼬집으며 바가지라는 것도 가끔 긁어보는 고소한 맛을 즐겼고, 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이라도 있을까 싶어 가지가지
음식물로 미리 땜질을 해가는 달착지근한 노동 속에서 아내로 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터였다.
“1시 약속인데 벌써 시간이 다 됐네. 자아, 수고들 했어요.”
두둑한 팁을 던지고 진혜는 다급하게 미장원을 나섰다.
차에서 내린 진혜는 7층의 병원 건물을 잠시 올려다봤다. 그 육중한 체구가 산의 무게로 가슴에 밀려들었다. 남편의 뜨겁게 달구어진 정열로 뭉쳐지다시피 한 이 건물이 남편만큼 미더웠다.
운전사가 열어준 현관문을 거침없이 들어서 몇 걸음 걷던 진혜는 문득 스쳐가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확실하진 않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희끄무레한 저녁 후미진 골목을 돌아섰을 때 끼쳐오는 그런 검은 빛깔의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멈춘 진혜는 환자 대기실을 겸한 넓은 현관을 휘 둘러보았다. 정면으로 진찰권 발급·접수구, 왼쪽으로 수납구, 오른쪽으로 투약구, 그리고 중앙과 벽을 따라가며 놓인 등받이가 없는 스폰지 의자에 줄지어 앉은 환자들. 가끔 와본 그대로의 대기실이었다. 그러나 정물적(靜物的) 풍경만 같았지 분명 다른 것이 있었다. 전에는 언제나 병원이 지니는 엄숙한 무게가 어떤 보이지 않는 질서로 정돈된 것 같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기묘한 냉기가 감도는 속에 그것 이 흔들리고 헝클어진 느낌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대기실을 휘 둘러보던 진혜의 눈길이 환자들에게 머물렀다. 그리고 진혜의 눈꼬리가 꺾이며 미간이 구겨졌다.
“사모님, 왜 그러십니까?”
운전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켜서 있어.”
진혜는 낮게 잘라 말하고 환자들 옆으로 다가섰다. 바로 환자들 때문이었다. 근심과 초조와 공포에 점령당해 있어야 할 환자들의 얼굴이 놀람과 비난과 음모로 들떠 있었다. 어항에 든 물고기가 금붕어에서 갑자기 미꾸라지로 둔갑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찌 됐대요?”
“어찌 되긴요. 죽고 말았죠.”
“저걸 어째, 저걸. 세상에 날벼락 맞아 죽을 놈들 같으니라구. 그래 그 산소 뭔가는 누가 뺐답디까?”
“아 누구긴 누구겠어요, 의사지.”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나 그래. 여덟 살짜리 입에서 차마 어찌 그걸 빼 글쎄. 죽을 걸 뻔히 알면서.”
“그러게 돈 없는 목숨이 어디 목숨이랍디까. 짐승이지.”
“돈을 구해왔다면서요.”
“참, 이 아줌마 답답하네.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 그랬다고 했잖아요.”
“얼마나 지났길래요?”
“모르겠어요. 40분이래나 50분이래나 그렇답디다.”
“세상에, 세상에 그 에미 애비가 환장을 안 하고 어찌 살겠어요, 원통해서.”
“그래 반 미쳐 저 난리지요. 난 그만 가봐야겠어요.”
“아주머닌 어디로 가시게요?”
“어디 이놈의 병원에 몸 맡기겠수?”
“나도 함께 가요. 무서워서 더 못 있겠어요.”
두 여자는 황급히 일어서 쫓기듯 현관을 빠져나갔다. 표독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는 쭈1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꼴 떠네. 재수 없게 하필 오늘 이따위 더러운 일이 터졌어 그래.”
머리칼이 뒤엉킬 지경으로 홱 돌아서며 진혜가 내뱉은 말이었다.
진혜는 인사를 하는 간호사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원장실을 향해 다급하게 걷고 있었다. 복도를 돌아섰을 때었다. 여자의 통곡하는 소리와 남자의 껄껄한 외침이 뒤섞여 먼 듯한 느낌으로 들려왔다. 응급실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임을 진혜는 금방 알아차렸다.
“사람 속 썩이네.”
진혜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봐, 두고 봐. 느이 놈들 새낄 고이 키우나 두고 봐. 이 손으로 다 쳐죽이고 말 테니까 누고 봐!”
흡사 짐승의 울음 같은 남자의 울부짖음이었다. 응급실 문 앞에 멈춰섰던 진혜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이놈들아 내 자식, 내 자식 살려내애애! 어서 내 자식 살려내란 말이다아!”
여자의 찢어지는 외침이었다. 진혜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덮였다. 건성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린 진혜는 아까보다 좀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예요.”
원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마자 진혜가 쏟아놓은 말이었다.
“으응, 당신 왔구먼. 왜 그래, 무슨 일이 생겼어?”
책을 덮고 일어서며 남편이 웃음을 지었다.
“아니……, 당신 아직 모르고 계시는 모앙이죠?”
“뭘 말야. 어서 이리로 앉기나 해.”
“애 죽은 것 말예,요. 당신은 그것…….”
“허허 난 또 뭐라구. 벌써 두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어서 일루 앉아.”
진혜는 남편에게 손목을 잡혀 소파에 앉았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눈앞이 환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보, 당신 괜찮으시겠어요?”
“뭐, 그 일 때문에?”
“그렇다니까요.”
“이런 열녀 봤나. 그래서 얼굴이 그렇게 질려 있었군? 아무 염려 말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죠?”、
“내 걱정 말고 하늘 무너지나 잘 살펴봐. 우리가 할 책임은 다했어. 근데 당신은 어떻게 알았지?”
“현관에서요. 아휴 인제 살 것 같애.”
진혜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관이라니?”
“현관으로 막 들어서니까 다른 때와 달리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어수선한 것 같기도 하고 술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말예요. 그래 환자들 말을 엿들었잖겠어요.”
“그럼 대기실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단 말야?”
원장이 언성을 높였다.
“네에…….”
“요린 멍텅구리들 같으니라구. 응급실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도대체 어떤 바보 같은 것이 방정맞게 입을 놀려가지고·…‥.”
원장이 신경 질적으로 성냥을 그어댔다.
“아무 염려 없댔잖아요.”
진혜는 금방 질린 표정이 되었다.
“나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서 좋을 게 없잖아.”
“당신만 무사하면 됐어요. 어차피 소문은 퍼지게 마련 아녜요.”
“근데 대기실 사람들 반응은 어때?”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럴 테지. 너무 뻔한 걸 물었지.”
원장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 일로 환자가 줄면 어쩌죠?”
“염려할 것 없어. 환자는 얼마든지 생기게 마련이고,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일이고 잊어먹기 명수들이니까.”
진혜는 거의 기분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께름칙하게 한 가락 남은 것이 있었다.
“그 부모한테는 보상금이랄까 그런 조로 뭘 좀 주나요?”
“돈을? 아니, 병원이 자선냄빈 줄 알아, 당신은?”
“그게 아니구요. 아까 응급실을 지나오다가 들으니까 애 아빤 모양인데, 느이 놈들 새낄 다 쳐죽이고 말겠다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잖아요.”
“그게 겁나서 돈 주고 한번 봐달라고 빌기라도 하란 말인가? 그 친구 워낙 무식해서 법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모양이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째 마음이…….”
“어허 이렇게도. 그 친구 식 이라면 이 세상 의사나 가족은 씨도 안 남아났겠잖아. 자아, 커피나 한잔씩 마시고 싹 잊어버려.”
“커피는요, 시간 없어요.”
“한잔해. 이런 때 마시는 게 별미야.”
비서를 겸하고 있는 간호사가 가지고 온 커피를 마시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분이 가벼워졌다.
“몇 시부터랬지?”
“2시 예요¨ 서둘러야겠어요.”
“난 준비 완료야. 출발하지.”
진혜는 남편과 나란히 걸어 뒷문을 통해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다시 응급실 복도를 지나가지 않은 것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면서 차가 급정거를 했다.
“차 천천히 몰아. 자넨 같은 말을 왜 몇 번씩이나 하게 만드나.”
원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꾸짖었고,
“죄송합니다. 바쁘신 것 같아서…….”
운전사가 어물거렸다.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진혜는 남편 가까이 다가앉았다.
“여보, 동찬이가 1등을 하면 무슨 선물을 하실 거예요?”
“글쎄, 뭘로 하면 좋을까…….”
“바이올린을 바꿔주도록 해요. 아주 좋은 걸 봐놨어요. 좀 비싸긴 하지 만.”
“1등을 해야 말이지.”
“틀림없어요. 당신은 돈 준비나 하세요.”
진혜는 남편 곁으로 더 다가앉으며 팔짱을 끼었다.
〈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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