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아카데미] 한가위가 서글픈 이웃, 이주노동자 국내 이주노동자 환영받지 못해 인권 침해 사례도 끊이질 않아 ‘이웃’으로 생각하는 마음 가져야
발행일2016-09-25 [제3012호, 4면]
일러스트 조영남
긴 한가위 명절의 마지막 날입니다. 모처럼 가족들과 함께 풍성한 가을 결실을 나누며 오붓하게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위를 한가위답게 보낼 수 없었던 이웃들, 한가위 보름달을 더욱 서럽게 바라보았을 이웃들이 있고, 이들 중에서 특별히 고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이주노동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30여 년이 되었고, 이미 100만 이주노동자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지만, 이들은 여전히 국외자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2015년 9~11월에 성인 4000명과 청소년 3640명을 대상으로 벌인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를 이웃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31.8%로 미국(13,7%), 호주(10.6%), 스웨덴(3.5%) 등보다 크게 높았습니다.
또한 임금 체불, 사업장 내 폭행, 열악한 노동환경과 숙소, 외국인인력도입제도인 고용허가제를 악용한 인권 침해 사례가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8월 17일, 고용허가제 시행 12주년을 맞아, 장동만 외국인 이주·노동운동협의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주노동자는 필요할 때 가져다 쓰고 쓸모없어지면 버리는 일회용 종이컵이 아닙니다. 이주노동자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들에게 부여된 인권을, 노동권을 제약할 권리는 없습니다.”
■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루카 10,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여러 고을로 파견하시어 그들을 환대하는 곳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환대한 고을은 구원받았지만, 그들을 배척하는 고을은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한 환대는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운 덕목 중에 하나이며, 예수님을 사랑으로 품에 안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인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5장 참조).
갈수록 우리나라를 찾는 이주노동자들은 늘어나고, 그 중 일부는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지내기도 합니다. 비록 이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가난한 나라 출신인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꺼리는 힘겨운 노동에 자신을 내던지며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소중한 희망을 가꾸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노동력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합법적 신분이냐 그렇지 않으냐는 법적 기준에 의해서, 배타적인 혈연적 가치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는 소중한 이웃입니다.
■ 이주노동자를 손님처럼, 가족처럼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주노동자, 왜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 둥지를 틀었을까요. 이들의 입장에 깊이 공감하기에, 이들이 “스스로 느끼는 절박한 처지를 착취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노동하는 인간, 23항)고 단호하게 선언한 교회는 이들을 손님을 맞아들이듯이 따뜻하게 품으라고 호소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41항 참조). 이에 더하여 다음과 같이 촉구합니다.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할 권리들을 자국인과 동등하게 누리도록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려는 생각이 확산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신중하게 감시하여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98항).
내년에는 더 이상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귀한 손님이요 정겨운 가족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기쁨 가득한 한가위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하본당 주임 및 8지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다. 또, 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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