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의비를 읽다
돌이 찢어진 비문을 꽉 물고 있다
입술을 다문 침묵을 쪼아
빗돌의 늑골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
붓을 챙겨 떠나버리고
깨진 돌만 남아서 그때를 증언한다
돌은 침묵을 가장하고 있지만 돌에는
임진의 여름 풀꽃들이
폭풍우에 쓰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스며있다
비문의 진술을 따라가 보면
북채를 쥔 사내 따라 삽을 놓고
기꺼이 졸卒이 된 사람들
탕, 타앙, 터지는 화구火口를 몸으로 막아
무명천에 펄럭이는 의義를 몸뚱이에 감았다
돌의 찢어진 흉곽에서 진물처럼
마지막 비명이 묻어 나온다
지은 죄가 두려워 빽빽한 돌의 진술을
찢어버리고 황급히 꼬리를 감춘
섬나라 살쾡이들
아직도 속내를 해무에 감춘 채
호시탐탐 내륙을 훔쳐보고 있다
조각난 뼈를 맞추고 피부를 꿰맨
비碑의 깨진 이마에 순의殉義가 선명하다
군데군데 뜯겨나간 살점은
돌의 심장으로도 차마 발설할 수 없어
시멘트로 봉해버린 상실의 시간이다
카페 게시글
―······수상 및 등단작
제15회 중봉조헌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 박수봉 시인
문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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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5 14:5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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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지네요. 축하드립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