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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쾌사, 참으로 유쾌하고 기쁜 일
글쓴이 송혁기 / 등록일 2023-12-05
갖고 싶은 장난감을 손에 쥐기만 해도, 가고 싶던 놀이공원에 발을 들이기만 해도 더없이 즐겁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살아온 연수가 더해지고 걸쳐진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마냥 유쾌하고 기쁘기만 한 일은 점차 드물어진다.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서 유쾌하다, 기쁘다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귀로 들어본 기억도 흐릿하다. 사회, 정치적으로 암담하고 답답한 일들이 많아서, 아니 그보다도 다들 당장의 민생고로 인한 걱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훨씬 더 팍팍했을 조선시대, 참으로 유쾌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일쾌사(一快事)’라고 표현하곤 했다. 박사호는 힘겨운 사행 길에 청심환 하나로 중국인 아이의 마음을 사서 잠시 빠른 말로 바꿔 타고는, 고삐를 당겨 광활한 요동 벌판을 전속력으로 마음껏 달려 본 일을 ‘일쾌사’라고 적었다. 이덕무는 농부가 봄비 내리는 새벽에 왼손으로 쟁기 잡고 오른손으로 고삐를 쥐고서 검은 소의 등을 때리며 산이 무너지듯, 물이 소용돌이치듯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자 검은 소가 발굽을 날리며 부드러운 흙을 구름 덩이처럼, 물고기 비늘처럼 가볍게 착착 갈아 제치는 장면을 두고, 세상에 둘도 없을 일쾌사라고 했다.
욕심 없는 맑은 마음으로 즐기는 일쾌사
정약용이 71세 되던 해에 지은 ‘노인일쾌사’라는 연작시는 요즘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다. 늙어서 대머리가 되니 감고 빗질할 일 없어 일쾌사고, 이가 다 빠지니 평생 괴롭히던 치통이 없어져서 일쾌사며, 눈이 어두워지니 잔글씨 주석에 얽매일 필요 없어 일쾌사고, 귀가 안 들리니 헛된 시비와 평판에 신경 쓸 일 없어 일쾌사라는 등의 내용이다. 노쇠한 신체를 해학으로 받아들이는 시를 읽으며, 꼭 유쾌하고 기쁜 일이 있어야만 유쾌하고 기쁜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조경에게 준 글에서 이규상은 세 가지 일쾌사를 말했다. 조경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 봄날 햇살 드는 창가 아래나 맑은 밤 깊은 서재에 단둘이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시를 주고받는 그 시간이야말로 일쾌사가 아닐 수 없다. 함께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관료로서 공을 세워 역사에 나란히 이름을 남길 수 있다면 당연히 일쾌사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깊은 산골 서로 가까운 곳에 초가를 짓고 살며 꽃피는 아침, 달 뜨는 저녁마다 대지팡이에 짚신 끌고 오가며 술 한 잔의 풍류를 즐기는 것, 그 또한 일쾌사다.
이규상은 맑은 마음으로 욕심을 줄일 때 일쾌사를 얻을 수 있는 법이라며,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겠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박사호의 일쾌사는 시원스러우면서 소박하고, 이덕무의 일쾌사 역시 맑디맑은 마음에 들어오는 풍경이며, 정약용의 일쾌사야말로 욕심을 초탈한 경지에서 만날 수 있는 여유다. 하지만 여기서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려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 데서 그친다면 식상하다. 정말 욕심을 줄이고 그저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여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마냥 유쾌하고 기쁜 일들이 다시 넘치게 될까?
일쾌사를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이규상의 글을 받은 조경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방면에서 공을 세우고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규상 본인은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지냈다. 어릴 적 가까웠던 친구라 해도 처지가 이렇게 달라지면 소원해질 법도 한데 둘의 우정은 이후로도 평생 지속되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규상은 세 가지 일쾌사를 말하고 나서 이런 단서를 달아 두었다. “그렇더라도 우리 둘의 지향과 학업에 나날이 새로운 진전이 없다면 이 일쾌사라는 게 그저 한때의 감정과 기분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를 어찌 군자의 일쾌사라고 하겠는가?” 인생의 길이 달랐음에도 이규상과 조경이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로도 이 다짐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 힘겨운 시대지만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소소한 일들이 있다. 나아가 스트레스와 콤플렉스에 매이지 않고 자신이 세운 지향과 이상을 온전히 견지하며 그로 인한 기쁨을 온전히 즐길 수 있기 위해서,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내면과 지향을 다시 돌아볼 일이다.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쉬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일쾌사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글쓴이 : 송 혁 기(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