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때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지었다. 안동김씨 김삼근(1419~1465)이 1420년경 소산리에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고 그의 아들이 김계권, 손자가 김영수이다. 김영수는 무예가 출중하였고 의금부 도사, 영천군수등을 역임하였고 김번(1479~1544, 평양부서윤)의 아버지이다.
* 김번은 손자대에 김상현이 척화파로 심양에 끌려가 고생을 하였고 그 후손들이 조선후기에 세도정치를 하여 망국을 촉진하였다는 비난을 받게된다. 사람들은 김번의 발복지로 남양주 와부읍에 있는 옥호 저수형의 묘를 거론하고 있고 소산리 음양택은 외면한다. 그러나 김번은 양소당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처가동네인 와부읍으로 이사갔다. 한편 김번의 조부 김계권의 묘는 종택 뒷산넘어 있는데 중등상급의 명혈이다. 양택의 발복으로 김번이 태어나고 종택으로 사용되는 동안 발복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음택의 발복은 최소한 6~7대까지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다. 김번의 묘를 뛰어 넘는다.
2. 학조대사의 소점
* 김계권(1410~~1458)은 5남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학조대사(속명은 영형, 1431~1514)이고 다섯째 아들이 김영수이다. 대사는 세조때 국풍으로 임금의 신뢰를 받았는데 유교사상에 젖은 선비들로부터 요승이라는 비난도 받았으나 훈민정음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등 훈민정음보급에 공이 크다. 학조대사는27세때에김계권의 묘를 소점하였고, 김영수에게 양소당, 김번에게 옥호저수와 장동 가옥을 점지해주었는데 모두 명혈이고 후세에 신안동파라는 명문거족을 결성하고 세도정치를 하는 풍수적 기틀이 되었다. 학조가 소점하지 아니한 후세의 여러 묘 중에는 김달행의 묘 하나만이 명혈이다.
* 김계권 묘는 창평(蒼萍, 푸른개구리 밥)부수형(浮水形)이라고 하나 묘역에 올라가면 장군등단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당당하다. 김계권은 일찍 서울로 올라가 서울에서 죽었다. 원래 역참자리인 것을 학조대사가 세조에게 아뢰어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역골길이란 지번이 붙여졌다.
*안산과 조산(朝山)사격--
* 김계권 묘는 교과서적 명당이므로 누구나 찾을 수 있으나 양소당터는 신안이 아니면 찾기 어렵다. 내 정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상등중급 명당이다. 탄식하고 있자 의산이 옆에서 이 마을에 살면서 지나다니면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위로를 하더라. 마을이 연화부수라고 하니까 양소당은 연실(蓮實,연밥)이 아닐가? 대청벽에는 후손들과 그들이 차지한 벼슬을 가득 써서 도매를 해 놓았더라. 세도정치가 무슨 자랑거리인가 (2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