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는 항일격문을 살포하여 광주고보생 동맹휴학의 도화선을 열고 이후 중국 육군으로 항일전투에 참여했던 이경채 선생입니다.
이경채 선생은 1910년 4월 6일 광주 송정리에서 3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광주에는 광주농업학교, 전남도립사범학교, 광주여고보 등의 중등학교와 일본인 광주중학교가 있었는데요. 이 시기에는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간 충돌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학교의 대다수 교사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식민교육,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이 있었는데요. 이경채 선생은 이러한 일본 교사들의 비교육적 처사에 격분한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하던 시기인 1924년 광주고보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8년 선생은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한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광주 송정리역 등에 게시하다 불온 문서 제작 혐의로 일제에 피체되었으나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광주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전개했는데요. 이 움직임은 인근 학교로까지 전개되어 식민지 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31년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임시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933년 상해로 망명하여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강제 휴교된 인성학교를 다시 개교하는데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후 1934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이동해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 간행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지 발행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선생은 다시 상해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직할의 일본연구소에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1936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한 뒤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항일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항일학생운동과 인재양성에 헌신한 선생의 뜻을 기려 11월 13일 목요일 서울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회하는데요. 이와 함께 11월 한 달 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전을 개최하여 이경채 선생의 업적과 독립을 위한 선생의 노력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광주학생의 항일심지에 불을 붙였던 이경채 선생의 뜻을 기리며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