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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百丈) 스님이 법문을 하면 언제나 듣고 있던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법문이 끝나 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그 노인은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백장이 물었다. “그대는 뉘신가?” 노인의 대답은 믿을 수 없지만,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저는 과거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 주석하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학인이 ‘위대한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답했다가 그 과보로 오백생을 여우 몸을 받아 이리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처지를 바꿀 수 있도록 한 말씀 해주소서.” 그러면서 자신에게 던져졌던 물음을 다시 던졌다. “위대한 수행자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백장 스님이 대답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노인은 이 말에 크게 깨쳤고 백장은 노인의 부탁대로 그가 벗은 여우 몸을 찾아 다비해주었다고 한다.
반복된 결과를 규칙화하는
근대철학의 분석적 인과와
연기적 조건을 중요시하는
불교적 인과는 서로 달라
‘백장의 여우’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공안은 믿을 수 없지만 아주 재미있는 얘기여서 잘 알려져 있다. ‘불락인과’와 ‘불매인과’, 한 글자의 차이인데 그 작은 차이로 인해 노인은 오백생을 여우가 되어 떠돌다가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했으니, 정말 ‘털끝만큼의 차이가 천지 차이로 벌어진다’는 옛말 그대로이다. ‘락(落)’과 ‘매(昧)’라는 두 글자가 이토록 천지차이로 벌어진 것은 그 글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에 이어진 ‘인과’ 때문이다. 대체 ‘인과’가 뭐기에 그 노인은 오백년을 여우가 되어 살아야 했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가 무엇이기에 단박에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인과를 말하는 것은 불교만이 아니다. 아니 인과에 누구보다 강한 애착을 가진 것은 서구의 근대과학이고, 그와 나란히 발전한 서구의 근대 철학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인과율’이란 ‘모든 결과는 필연적으로 그 원인을 갖는다’는 법칙이다. 근대과학은 인과율에 대한 강한 믿음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연관된 두 현상 가운데 논리적 내지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것을 독립변수(X), 뒤에 나오는 것을 종속변수(Y)라고 하고, 이 두 변수 간의 관계를 가능하면 수학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Y를 야기하는 요인들 가운데 X가 아닌 요인들로부터 X의 효과를 ‘분리’하여 포착하고 서술하려는 방법을 ‘분석’이라고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얻어지는 X와 Y의 인과적 관계를 ‘분석적 인과성’이라고 명명하자.
가령 찻잔을 들고 있다가 놓으면 ‘필연적으로’ 떨어진다. 이런 것이 ‘인과’다. 뉴턴은 낙하라는 결과의 이유를 ‘중력’이라는 원인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갈릴레오는 그런 원인보다는 낙하하는 거리나 속도를 무엇이 결정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건 찻잔의 질량이 아니라 낙하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허나 낙하하는 찻잔이 갖는 힘이 얼마나 큰지는 찻잔의 질량과 관계가 있다. 낙하거리는 시간을 ‘원인’(독립변수)으로 하지만, 낙하하는 물체가 갖는 힘의 크기는 질량을 원인(독립변수)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양자 간의 관계는 수학적 공식으로 ‘정확하게’ 표시된다. 이는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되는 ‘보편적’ 법칙으로 간주된다. 과학이란 이런 보편적인 인과법칙을 찾는 것이다.
위대한 수행자라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찻잔을 놓으면 그건 낙하할 것이고, 물에 열을 가하면 온도가 100°C가 될 때 끓을 것이다. 위대한 수행자의 가르침이 불교라면, 불교 또한 이런 인과적 필연성을 볼 것을 가르친다 할 것이다. 인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인과를 정확히 알도록 가르칠 일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개념은 이런 분석적 인과성과는 다르다. 불교적 사유의 요체를 이루는 ‘연기’라는 개념이 이 변수간의 인과성 사이에 파고들어가 그것을 비틀어놓기 때문이다. 이를 ‘분석적 인과성’과 대비하여 ‘연기적 인과성’이라고 명명하자.
알다시피 연기적 사유란 연기적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의 본성이나 작용이 달라짐을 보는 것이다. 인과법칙 또한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이때 ‘연기적 조건’이란 과학에서 사용하는 ‘초기조건’이란 말로 바꿔 쓰면, 분석적 인과성과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석적 인과성이 초기조건의 차이란 부차적이라고 보아 그것을 ‘동일한 조건이라면’이라는 말로 추상하여, 그런 조건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보편적인 인과성을 찾고자 한다면, 연기적 인과성은 초기조건의 차이에 따라 인과적 작용이 아주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듣고 얼른 ‘나비효과’란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비효과란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성’을 뜻하는 말인데, 흔히 “북경의 나비 날개짓이 캘리포니아 해안에 폭풍을 만들어낸다”는 말로 요약된다. 아주 작은 조건의 차이가 거대한 결과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현상이 반복될 때 그 반복을 규칙화함으로써 ‘질서’를 포착한다. 그것으로 다음번에 어떻게 반복될지를 예측한다. 그런데 반복할 때마다 ‘조건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아침 날씨였지만, 풍속이 약간 세지거나 풍향이 약간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저녁 날씨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쉽게 경험하는 일이다. 장마가 매년 반복되지만 사실 한 번도 같은 장마는 없을 것이다. 때론 작게 달라질 것이고, 때론 크게 달라질 것이다. 가령 종이를 떨어뜨리길 반복하는데, 바람이 분다면 종이는 매번 아주 다른 곳에 떨어질 것이고, 바람이 없다면 약간 다른 곳에 떨어질 것이다. 연기적 조건 혹은 초기조건의 차이가 클수록 반복되는 현상에서 결과의 차이도 클 것이다. 이 차이가 크면 클수록 예측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Y라는 결과를 결정하는데 독립변수인 X보다 ‘조건’의 차이가 훨씬 더 크게 개입하는 것이다. 나비효과는 초기조건이 애초 독립변수의 인과적 효과를 초과하는(‘무시하는’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냄을 뜻한다. 연기적 조건이 분석적 원인의 효과를 초과하는 극적인 사례인 셈이다.
그때그때의 조건과 상관없이 두 변수 간 관계가 보편성적으로 성립하도록 하기 위해 분석적 인과성은 조건의 차이를 최대한 제거한다. 즉 조건의 동일성을 가정한다. 가령 갈릴레오는 나무토막과 쇠뭉치를 동시에 떨어뜨리면 둘 다 똑같은 시간에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자유낙하의 법칙). 그러나 실제로는 같이 떨어지지 않는다. ‘부력’이라고 부르는 공기의 저항이 낙하의 실제 조건인데, 그 조건의 차이 때문에 가벼운 게 늦게 떨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다루면, 낙하하는 것의 반복을 하나의 법칙으로 다룰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공기(의 저항)가 없다고 가정하곤 자유낙하의 법칙을 서술한다. 이는 낙하의 반복이 동일한 결과에 이르게 하기 위해 초기조건의 차이를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차이의 반복’은 ‘차이 없는 반복’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떨어지는 모든 물체는 그것이 대면하는 초기조건, 즉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떨어진다. 심지어 매질의 저항이 크면 아예 낙하하지 않기도 한다. 가령 매질을 공기가 아니라 물로 바꾸면 쇠뭉치는 떨어져 바닥에 닿겠지만, 나무조각은 물의 저항을 통과하지 못해 바닥에 닿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연기적 인과성에 따르면 자유낙하의 법칙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모든 물체는 그것이 만나는 조건에 따라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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