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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수도회] 무지와 완고함의 다리를 건너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신명 4,1.5-9
† 복음 마태 5,17-19
★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아왔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예언자를 이스라엘에 보내시더라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고발해야 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신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제는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고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화답송 후렴).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왔고 오늘도 변함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까지 인간의 무딘 마음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날마다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도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그런 일들을 하신다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과연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무디고 완고하게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믿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한 가지 실마리가 나타나는 듯합니다.
“너희의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경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어떤 힘의 도움을 받아 마귀를
쫓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귀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힘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목소리에 동시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고 있을 때 하느님의 목소리는 들릴 수
없습니다. 이집트 탈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동안 무수한 경쟁자들이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딘 마음을 일깨워, 오늘 내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무지와 완고함의 다리를 건너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루카 11,14-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 11,23)
무지와 완고함의 다리를 건너
인생을 깨어 중심을 잡고 더불어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둔함과 완고함, 뒤틀림과 치우침에 걸려넘어져 주님의 집 밖을 서성대는
날이 얼마나 많은지.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예레 7,23)
하고 명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고”(7,24),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7,26)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이나 율법에 박식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알아 그분이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이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정의와 성실을 보여주는 삶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완고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 곧 성령의 힘으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루카 11,14). 벙어리
마귀는 하느님의 말씀이 결여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 곧,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셨다. 이 치유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그런데 군중 가운데 한무리는 예수님의 힘을
베엘제불(사탄)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고, 다른 무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다(11,15-16).
어느 쪽이든 억지 논리를 펴면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인 무지요, 그분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완고함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겨 버렸다(예레 7,28). 이는 말씀을 하느님의
의지의 표현이자 행동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완고함이 초래한
자기단죄였다. 말씀을 듣고 실제 삶 안에서 해석하며 따르지 않는 완고함은
결국 하느님과의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 나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사탄을
섬기는 것이리라. 말씀과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다면 내가 곧 ‘벙어리 마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진정 평범한 일상사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힘을 믿는가?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 “영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온 존재를 다해 예수님과 복음 말씀에
집중해보는 것은 어떤가. 그는 “어디에서나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들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노 115)
그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발자취를 따른 것이었다.”
(1첼라노 84).
주님! 당신만으로 만족하게 하시고, 당신 외에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게 하소서!(성 프란치스코, 비인준규칙 23,9) 주님,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의 영으로 당신을 알아보고, 모든 것 안에서 늘 당신의
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써, 제 안의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해방을
맛보게 해주소서! 당신의 자애와 정의와 연대를 더 잘 살아내지 못하는
벙어리 마귀들린 이 사회를 굽어살피소서! 무지와 완고함의 다리를 건너
주님을 심장 한복판에 모시고 참 행복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우리가 먼저 주님께 다가서야 합니다.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얼마 전까지 제 휴대전화에는 약 4,000명 정도의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었습니다(지금은 많이 정리를 해서 1,000여명 정도의 번호가 입력되어
있습니다). ‘인맥이 대단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스스로도 ‘나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숫자가 별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중에
수시로 전화하면서 안부를 여쭙는 사람은 몇 안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게으른 관계로 그냥 입력만 해 놓고 있는 전화번호였던 것이지요.
제 카페의 회원은 현재 13,000명이 넘습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네가 운영하는 카페가 가톨릭 부분에서는 제일 크다면서? 인기가
대단한데?”
저 역시 그런 착각을 가졌던 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저에
대해 뜨거운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음을 이제는 알 고 있습니다. 저에
대한 호감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자료를 찾아서 검색하다가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고 적극적으로 카페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몇 되지 않거든요. 카페
회원 전체가 제 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에서 ‘751법칙’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한 달에 친밀한
인맥 10명, 휴먼 네트워크 50명을 만들고 싶다면, 한 달 동안 평균 700명
정도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친밀한 인맥,
휴먼 네트워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그만큼 친밀한 관계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제게 다가오는 사람만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제 자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충들을 해결해 주셨지요. 문제는 이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틀에 갇혀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베엘제불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서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그 아드님을
도저히 알아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제는 주님께서 무조건 우리 곁으로 오시기를 원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먼저 주님께 다가서야 합니다. 그래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참 기쁨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다가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주님께서 다가섰던 어렵고 힘든 이들을 향해
우리 역시 다가서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가가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었을까요?
남의 말을 열심히 듣는 사람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진실한 벗이 되는
법이다.(플라톤)
제가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http:/wwww.bbadaking.com
마음을 열어 주님께로
어제 뉴스를 보다보니, 제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송도신도시 안에 커다란
불이 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2층에서 시작된 불이 20층까지 번질 정도로 큰 화재였던 것 같더군요.
그런데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곳에서 일어난
화재였지만, 저는 불이 났다는 사실을 매스컴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근처에 살았으면서도 왜 몰랐을까요?
어제 하루 종일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책 읽고 강의
준비하면서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거든요. 이렇게 집 밖을 나가지 않았으니
화재가 났던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겠지요.
이 뉴스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근처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내 닫힌 가슴을 활짝 열고 주님께로 나아가야지만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닫힌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도 또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불조심 합시다.
◈ [수도회] 2015.03.1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루카 11,26)
세상 사람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고 경상도냐 전라도냐
남자냐 여자냐 사용자냐 노동자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종교가 뭐냐...
니편내편으로 갈라 어디에 속해야만 마음이 안정되나 봅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사람을 회개자냐 아니냐로만 구분하였었지요?
우리는 하느님편이냐 마귀편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네요. 사도 바오로도 제발 아폴로파니 바오로파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여러분은 누구편입니까?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편이고 복음편일 따름입니다.
새누리당도 아니고 새민련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어중간은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루카11,14-23)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어중간은 .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목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 장군식으로 지내다가 성경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는데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자기비움의 수행(修行) -항구(恒久)한 기도와 노력-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예레7,23-28 루카11,14-23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자기비움의 수행(修行) -항구(恒久)한 기도와 노력-
자기비움의 겸손의 수행에 항구한 기도와 노력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요약하는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많이 읽고 듣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시편95,7ㄹ.8ㄱ).
바로 과거나 미래 어느 날이 아닌 오늘입니다. 믿는 이에겐 오직 영원한
오늘만 있고,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하느님도 함께 계십니다.
이 말씀을 현실화 하는 길은 항구한 기도의 노력의 수행뿐입니다.
죄와 병은 구분이 애매합니다.
문제는 무지와 교만과 허영으로 요약되는 무딘 마음입니다.
무지와 교만은 허영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일상에서 접하는, 흔히 죄로
착각하는 많은 경우 죄가 아니라 치유되어야 할 병입니다.
모든 마음의 병의 뿌리는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에서 교만이요
허영이요, 하나이자 셋인 이들은 세 쌍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가
치유되면 지혜요, 교만이 치유되면 겸손이요, 허영이 치유되면 진실입니다.
이 무지와 교만과 허영에 최고의 명약은 다음 말씀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순시기 수행해야 할 만고불변의 진리 말씀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는,
비우는 일은 바로 자기비움의 항구한 기도와 노력을 뜻합니다.
단번에 치유되는 마음의 병이 아니기에
날마다 죽을 때까지 자기를 버리는 항구한 기도와 노력입니다.
오늘 에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무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히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너희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무지와 교만의 절정입니다.
그대로 마음의 중병에 걸린 오늘의 세대들을 향한 말씀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이와 흡사합니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냈을
때 하느님이 하신 일임을 몰라보고 무지로 인한 다음 반응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곡해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무지는 분노의 대상인 죄라기 보다는 연민의 대상인 마음의 병입니다.
어떻게 하면 무지와 교만과 허영의 마음 깊은 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버리는 자기비움의 항구한 기도와 노력의 수행은 무엇일까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항구한 수행의 노력에 하느님 은총의 응답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깨달음을 준 두 예화를 소개합니다.
대담하고 용감하게 당사자는 극구 사양했지만 미담(美談)을 소개합니다.
아랫집 서레몽 수녀님이십니다. 저보다 한국나이로 12세 많으니 79세
이십니다. 그러나 수녀님의 열정은 영원한 젊은이입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항구한 노력이 젊은 수도자들의 모범입니다.
저의 산티아고 순례 시, 그 힘든 와중에도 매일 강론을 썼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작년 10월 경부터 날마다 매일미사 내용을 필사하신다
하십니다.
그날의 입당송부터 시작하여 '말씀의 초대'와 끝의 '오늘의 묵상'을 빼고
영성체후 기도까지 1시간내지 1시간 반에 걸쳐 정성껏 필사하니 그렇게
좋고 은혜로울 수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하고 격려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체가 있는 미사보다,
또 매일미사에 나오는 이 말씀들 보다 더 좋은 마음의 영양제, 치유제는
없습니다. 매일미사 말씀을 필사하는 항구한 노력의 수행자체가 바로
기도입니다.
하여 오후에 방문하여 고백성사를 본 믿음 깊은 조요안나 자매에게도
즉시 주님 부활때까지 사순시기 보속으로 매일미사를 쓰도록 했습니다.
이런 몸과 마음을 다한 항구한 노력은 그대로 기도가 되고,
이런 수행을 통해 하느님 은총의 치유가 시작됩니다.
또 진기한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조요안나 자매와 함께 수도원을 방문한 그의 장부 전요셉 형제입니다.
들으니 형제는 매월 성심자매회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수도원에 와서 미키,
댕기, 막내 세 애완견을 목욕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또한 자비의 수행,
자기비움의 수행입니다. 참 복도 많은 수도원의 세남매 애완견입니다.
따뜻한 물에 비누로 목욕시키고 타올로 닦고 헤어드라이로 말리고 가위로
털을 적당히 잘라주고 이어 먹을 것을 주면 끝나는데 무려 3시간이 걸린다
합니다.
이런 항구한 자비행이, 자기비움의 수행이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마음을 지혜롭고 겸손하고 진실하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끊임없는 기도가 참 좋은 처방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후렴입니다. 이런 주님의 자비에 바탕을 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그렇게 좋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토스 산의 동방수도승들을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이 기도의 수행이
끊임없는 기도에는 제일 좋고 그 효험에 대한 증거 또한 무수합니다.
이 자비송의 기도에 항구할 때 치유되는 마음의 병입니다.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카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 주는
해철 사촌형의 다음 글도 큰 격려가 됐습니다.
"성직자의 생애는 무한한 인내와 자기성찰이지. 아무튼 건강하시게.“
무한한 인내와 항구한 자기성찰의 회개를 통해 치유되는 마음의 병이요
이또한 평생과정입니다. 예수성심자매회 회장인 박수산나 자매의 평범한
카톡글도 잊지 못합니다.
"내일은 아치에스 행사가 있어요. 한복을 입으라고 하네요.
일년, 일년이 너무도 빠른 것 같아요.
신부님!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겠지요.'라는 말의 여운이 깊습니다.
새삼 삶은 순종임을, 하느님께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도대체 수행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가 삶이요 삶이 기도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자비의
항구한 수행이요 이를 통해 점점 자비하시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갑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마음의 병을 치유하시어
우리 모두 지혜롭고 겸손하고 진실한 삶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세상판을 진리편 하늘편으로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세상판을 진리편 하늘편으로
하늘편과 세상편이 있다면 하늘편을 들어야 큰 사람답다 하겠지요.
진리편과 오류편을 알면서도 눈감는 사람이 세상판에 참 많습니다.
세상판 속에 정치판 사회판 시장판 교육(계)판 공무원판 이리도 많네요.
뉴스가 온통 이런 판들을 들춰가며 뭘 그리 많이들 골라내고 있는지.
국민을 흩어 버리지 않고 모아들이고 뭉치도록 하는 판이면 좋겠어요.
신앙인이라면 세상판을 진리편 하늘편으로 모아들이며 살아야 되겠지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입 냄새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복음: 루카 11,14-23
< 입 냄새 >
훗날 미국의 원수가 된 맥아더가 육군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미국 국방위원들이 시찰을 나왔습니다. 맥아더는 각종
보고를 마치고 자기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방안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고
단지 야전용 쇠 침대 하나만이 놓여있었습니다.
“여기가 제가 생활하는 방입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주일에만
집으로 갑니다.”
맥아더는 내심 자기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목에 힘을
주며 쇠 침대에서 자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시찰이 끝난 후 만찬이 베풀어졌고 금 접시에 멋진 요리들이 담겨
나왔습니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뒤에 금 접시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맥아더는 괘씸하게 생각하고서 범인을 잡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국방위원들을 의심한 맥아더는 서신을 보내어 금
접시의 행방을 캐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다음과 같은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만일 장군님께서 그 날 밤 야전용 쇠 침대에서 주무셨다면 벌써 금 접시를
찾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모포 밑에 접시를 넣어두었거든요.”
거짓말을 하는 자는 진실한 사람들까지도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입이 진실하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입에 진실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요즘 치과에 다닙니다. 전에 신경을 제거했던 치아 밑에 염증이 생겨서
그것들이 스물스물 빠져나와서 그렇답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썩게 되면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이 어떤지는 꼭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냄새가 나면 무언가가 썩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목이
뻣뻣하여 하느님의 계명에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입에서 진리가
사라지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시황제 때 내시였던 조고라는 인물은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진시황제가 죽었을 때 조고는 시황제의 첫째 아들
부소를 죽이고 조금 모자란 차남 호해를 천자로 추대하였습니다. 호해는
조고 덕분으로 천자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루는 조고가 당나귀를 보고 황제에게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것은 당나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신들보고 물어보자고
하였습니다. 대신들 대부분은 그것이 조고의 말대로 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니 황제 또한 말이 맞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짓은 두려움의 냄새입니다. 그것이 권력이든 돈이든 명예든 자존심이든
간에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기에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높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땅에서는 떨어질 걱정이
없지만 높이 올라가면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거짓을 말하는 이 안에는 자신을 더 들어 높이고 낮아지지 않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자신을 가리며 상대의 잘못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가 있음을 드러내는 냄새인 것입니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거짓말을 하는 이는 두려워하는 이고, 두려워하는 이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말하며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믿지 않아
불순명하게 되는 것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이들은 하느님도 거짓말쟁이처럼
여기기에 성경 말씀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고 괜찮을 거라고 믿었지만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영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입에서 먼저 거짓이 사라지면 성경 말씀도 있는 그대로 믿고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입에서
거짓의 냄새를 지우고 진실만을 이야기합시다. 그러면 말씀이 믿겨지게 될
것이고, 믿겨지면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3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진리란 무엇일까요? 참된 이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론 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진리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이며, 절대적’이라고
정의합니다. 인류는 자연에서, 신화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물, 불, 열, 땅, 바람’은 이제 더 이상 인간에게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신화’는 먼 옛날 두려움에 떨던 인간이 의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알 속에서 영웅이 태어나지도 않고, 산 속 깊은 곳에 신적인 존재가
있지도 않습니다. 생명은 유전자의 진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쌓아놓은 ‘바벨탑’이 진리인 것 같았습니다.
수학, 과학, 철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성에 의지했던 인류는 2번의 세계 대전을 경험했고, 지금도 세상은 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진리인 것처럼 추구하는 ‘재물’은 환경의 파괴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방치하게 만듭니다. 재물은 블랙홀처럼
인간의 양심, 나눔, 희생, 헌신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
때문에 이웃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재물은 명예라는 옷을
입으려하고, 재물은 권력을 벗 삼아 견고한 성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마치 그곳이 낙원인 것처럼 생각하며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살고 있습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리하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자연, 신화, 이성’의 옷을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진리’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이천년 전에 사람들은 그런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재물’이라는 베엘제불을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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