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의 유언
황박지현
칼을 들어
머리를 치려는데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조심해
죽고 사는 게 한 끗 차이야
사방이 덫이고 아차 하면 나락이야
나도 한때는 잘나갔었어
등 푸른 생선 가문에 태어난 데다
윤기 흐르는 매끈한 몸매에
눈빛까지 깊고 그윽하다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지
나 때문에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니까
세상은 넓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믿었어
뭐든 내가 하고픈 대로 다 했었지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지금 칼자루 잡고 있다고 그게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 마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누가 언제 도마 위에 오를지도
이른 아침 도마 위에서
고등어가 내게 남긴
서늘한 유언
---- 황박지현 시집,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에서
천하도 좁다고 그토록 지랄발광을 하던 황제도 그가 죽으면 기껏해야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이란 죽음 이전에 결정되어 있고, 어느 누구도 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죽고 사는 게 한 끗 차이”이고, “사방이 덫이고 아차 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자일 때는 가난한 자를 욕하고, 가난할 때는 부자를 욕한다. 권력을 가졌을 때는 타인들의 존재와 권리를 짓밟고, 권력을 갖지 못하였을 때는 공정한 권력과 만인평등을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자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입신출세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때 그때마다 배신과 변절을 밥 먹듯이 하게 된다. 인류의 역사는 배신과 변절의 역사이며, 이 배신과 변절의 역사 속에 우리 인간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황박지현 시인의 [고등어의 유언]은 “등 푸른 생선 가문”, 소위 지배계급의 회한이 담겨 있는 시이며,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며 ‘함부로 권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금언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갔”고, “나 때문에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등 푸른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가 윤기가 흐르는 매끈한 몸매와 함께, “눈빛까지 깊고 그윽하다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상은 더없이 넓고, 어디든지 다 갈 수가 있고, 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을 다 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고, 그 결과, 도마 위에 놓인 고등어의 신세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지금 칼자루 잡고 있다고 그게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 마/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라는 [고등어의 유언]은 때늦은 후회와 때늦은 만각, 즉, 그의 뼛속까지 파고드는 회한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배신과 변절의 역사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은 좋은 것이고, 눈앞의 이익은 더욱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리를 짓는 동물들의 특성상, 만인들 위에 군림을 하며 명령을 내린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권력의 본보기로서 타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괴롭히는 일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순간을 영원하다고 믿으며, 이 권력자의 망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록, 배신과 변절의 역사 속에 도마 위의 고등어처럼 난도질을 당하게 될지라도 더욱더 즐겁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자기 중심사상이 이기주의의 토대가 되고, 이 이기주의를 통해서 그의 권력욕망이 싹튼다. 권력은 약이면서도 독약이고, 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자는 전인류의 스승인 사상가일 수밖에 없다.
황박지현 시인의 [고등어의 유언]은 등 푸른 생선의 ‘서늘한 유언’이며, 우화로서의 최고급의 지혜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돈과 명예와 권력, 배신과 변절, 사생결단식의 승리와 패배----.
대부분의 권력은 인류의 아편이고, 너무나도 어리석고 크나큰 파멸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황박지현 시집,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