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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1장 - 12장까지 새벽기도말씀 2023 .8. 17
제목 만물의 허무에 관한 성찰 본문 1 : 01-11
서 론
성경의 시가 문학 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지혜문학에도 속하는 본서는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심오한 책으로서 초막절의 제3일에 낭독되었습니다. 본서의 본질적인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의미있는 인생을 향유하도록 촉구하는 적극적 교훈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인생이 최고의 행복과 가치를 소유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본장은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하는 본서의 도입부에 해당됩니다.
본 론>
저자는 만물의 허무함의 한 예증으로 대자연의 허무함을 일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고귀한 존재로 인간을 피조하셨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고 허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국 허무와 절망의 벽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배제시킨 자의 삶이 왜 이토록 무의미한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까요?
첫째 : 세속적 수고가 아무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2-4절) 사도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였다’(롬8:20)고 설파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 보면 부패한 세상은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떠난 세속적 수고가 인간의 생사를 해결하거나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없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보다 복스런 생활을 위해 부지런히 선한 일손(수고)을 놀리되 반드시 그 수고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 쾌락이 아무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5-8절) 고대 희랍 철학 사조 중 쾌락주의는 인생의 의미와 이를 쾌락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자는 대부분 쾌락을 통해 만족함을 얻고자 합니다. 또한 그들은 쾌락을 통해 삶의 진지한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희석시키고자 하며 인생의 짐에서 해방되고자 합니다.
솔로몬이 말년에 토로한 고백은 다름 아닌 ‘쾌락의 허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죄의 짐을 풀어 놓고 영혼의 닻을 내려놓기에는 전혀 적합지 않은 곳임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세째 : 세속주의적 인생 전체가 죄의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9-11절)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선한 원칙을 정해 놓고 그것을 추구하며 때로는 많은 이들을 유익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니 그 삶의 결국이 사단에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어둠에 속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더욱이 종말에는 하나님의 대심판 앞에서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영혼도 죽임을 당할 것인 바 이 어찌 그들의 삶이 무의미로 막을 내린다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단 한 세대밖에 살지 못하는 마치 지붕의 풀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인생은 참으로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을 바랄 때 삶의 참된 가치와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전무 후무한 지혜, 부귀, 명예, 권세 등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허무함의 실례들 본문 2 : 18-26
서 론>
본장도 역시 전장 중반 단락에 계속되는 같은 내용으로서 본서의 대주제인 만물의 허무함의 실례들을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본장은 전장의 세 번째 단락에서와 같이 저자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 입증되어지는 실제적인 허무의 예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장에 나타난 허무의 예증들은 한결 더 개인적이면서도 짙은 호소력을 전달해 줍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인생의 쾌락의 허무함(1-11절)과 죽음의 무차별성으로 인한 허무함(12-17절) 그리고 인간 수고의 허무함(18-23절)과 즐거움의 진정한 근원(24-26절) 등으로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저자가 말하고 있는 허무함의 실례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 쾌락의 허무함을 살펴봅시다(1-11절) 저자는 인간 쾌락의 허무함을 언급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삶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요소로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쾌락의 허무함과 무가치함을 세세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은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크고(왕상10:23)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왕상11:3)이라 할 정도로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그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쾌락을 직접 경험했지만 허무감을 절감했습니다. 이는 인간은 본질상
육체적,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사실 세상의 쾌락은 일시적 희락이나 술, 사업,재물,음악,처와 첩 등으로부터 오는 순간적인 기쁨으로 인간의 깊은 심령에 참만족으로 주지 못하고 다만 일시적인 감정적 만족을 줄 뿐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세상적 쾌락이 인간의 몸에 일시적으로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정욕적이고 파괴적인 만족을 부추기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허무함과 무상함만을 증폭시키는 정욕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준행하는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시119:11)
둘째 : 지혜자의 허무함을 살펴봅시다(12-17절) 저자는 지혜자도 역시 우매자와 똑같은 운명을 당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데 보편적인 안목에서 볼 때 지혜로움은 어리석음보다 훨씬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는 천양지차가 있는데 이는 종말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자는 죽어도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생을 영원토록 향유하게 되지만 우매자는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지혜의 근본임을 알고 세상에 대해서는 미련하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 인간 수고의 헛됨을 살펴봅시다(18-23절)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사람은 자신의 수고를 스스로 누리지 못하고 단지 후손에게 넘겨 줄 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즉, 수고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슬픈 현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적 수고에 빠져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참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마11:28)
결 론
그러면 인생의 참된 만족은 어디서 옵니까?(24-26절) 저자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극히 신본주의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을 의뢰하며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최선의 삶을 살고 힘과 능력과 생명을 공급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아멘
제목 하나님의 법칙과 인생의 허무 본문 3 : 01-10
서 론>
본장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일반적인 원리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담고 있는 본장은 크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통치자임을 부각시키는 전반부(1-15절)와 공의가 잘못 시행되는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강조한 후반부(16-2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본장을 통하여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통한 인생의 즐거움을 살펴봅시다.
첫째 :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노력의 허무를 살펴봅시다(1-10절)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해서 기한을 두셨고 섭리적으로 역사하신다고 역설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한 이유는 신학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재난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절망하지 말고 구속을 소망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섭리적 역사에 의거하여 출생과 죽음, 심음과 거둠, 기쁨과 슬픔, 획득과 상실, 외침과 침묵, 전쟁과 평화의 때를 반복합니다. 이처럼 만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유의 시기가 있으므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사건의 시기나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모든 일들은 가장 세밀한 것까지도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뜻과 목적과 계획이 외적으로 아무리 선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위배될 때에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둘째 : 하나님의 행사의 영원성에 대하여 살펴봅시다(11-15절) 저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신묘막측하게 운영하시는 분이심을 밝힘으로써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뜻과 때를 따라 운행되며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생활하는 자는 반드시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선포합니다. 저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경외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참된 행복은 어떤 삶을 통하여 얻을 수 있을까요?
①현실의 삶에 충실을 다할 때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의 성패여부를 떠나 그 일의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한 그 일의 목적에서 주께 영광을 돌길 때 인간은 건전한 자아를 실현시키며 나아가 참된 행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12절)
②영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11절) 인간이 본래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원성과 절대성을 확립하지 못하면 참행복을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여호와 신앙을 회복해야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의 진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③자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억만장자이며 젊고 직위 높은 사람이라도 자족할 줄 모르면 결코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이고 늙고 병들고 빈한할지라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노인은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째 :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봅시다(16-22절) 저자는 비록 공의를 행하는 법정에 불의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불의는 미래에는 반드시 최후 심판대 앞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또 다같은 죽음이 오지만 하나님은 신앙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이생에서의 축복과 즐거움을 안겨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육신적 정욕을 따라 살지말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결 론>
본장을 통하여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모든 선물들을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는 것, 그리고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정당하게 즐길 수 있는 참된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한탄 본문 4 : 07-16
서 론>
본장은 외형적으로 전장 후반부(3:16-22)의 문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장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관점에서 모순을 지적한 반면 본장에서는 사회적인 부조리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본장의 내용을 영역별로 구분해 보면 학대받는 인간(1-3절)과 경쟁심에 가득찬 인간(4-6절) 그리고 소외된 인간(7-12절)과 일시적인 명성의 허무함(13-16절)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 론>
특히 전도자가 본장에서 인간 사회 속에서 엿보여지는 부조리한 면들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킨 이유는 인생의 허무함이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첫째 : 학대받는 자의 허무함에 대하여 살펴봅시다(1-3절) 저자는 사회 가운데서 일어나는 학대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인생의 허무함을 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데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1절)라는 표현을 통해 학대받는 자의 처참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는 여러 학대의 유형이 있습니다. 즉, 백성에 대한 치리자의 학대, 종에 대한 주인의 학대,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 및 관료자의 학대, 가난한 자에 대한 또 다른 가난한 자의 학대 등입니다.
성경은 이런 모든 학대를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므로 모든 인간들 역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보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 시기와 인간 수고의 허무함에 대하여 살펴봅시다(4-6절) 저자는 다른 사람의 수고와 성공에 대해 시기하는 모습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수고가 이웃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음으로써 평온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측면에서 논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질투는 이기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성공을 미워하고 질시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 제기되고 있는 질투도 인간적인 욕심에서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본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전도자는 이러한 부조리한 인간 삶의 모순과 병폐를 보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되는 성도들은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영광을 얻으므로 잘 되는 사람이 있을 경우 함께 즐거워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째 : 외로운 자의 허무함을 살펴봅시다(7-12절) 저자는 사회적 상처를 두려워한 나머지 극도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사람의 고독과 비참함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의 외로움을 지적하고 상호 연합의 복된 삶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즉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서 하와를 지어 주신 데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주장이나 감정을 내세우지 말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네째 : 세상 인기의 허무함을 살펴봅시다(13-16절) 저자는 명성의 허무함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외면한 인간은 결코 참된 구원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즉, 모든 공적은 시간이 지나면 망각되고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 론>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삶의 영원한 목적지가 아니라 천국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임을 알고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세상의 처세술이나 방법들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목 형식적 신앙과 재물의 허무함 본문 5 : 01-09
본장에서는 그 영역을 각 사람의 개인적 삶으로 바꾸어 형식적 신앙 생활의 헛됨과 재물의 한계성을 들어 인생의 무상함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의식주의적인 예배의 헛됨을 언급하고 있는 전반부(1-7절)와 부의 한계성을 논증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도록 권고하는 후반부(8-2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저자는 본장을 통해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은 결코 행복과 만족을 획득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감사히 여기고 받을 때만이 진정한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 형식적 신앙의 허무함 대하여 살펴봅시다(1-7절) 저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경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한 후에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1절)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매자의 제사의 허무함과 아울러 순종의 중요성을 언급하였습니다. 저자는 본문에서 우매자의 제사의 허무함의 원인으로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1절)을 제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악을 행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니님께 제사드리러 오는 행위를 지극히 경멸하십니다(사1:10-17) 왜냐하면 이러한 이중적 행위는 죄를 형식적 제사라는 허울로 감추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자각해야 합니다.
둘째 : 탐욕한 관료들의 학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8-9절) 저자는 당시에 만연한 탐욕에 찬 관료들의 권력 남용으로 연약한 빈민들을 학대하고 재물을 탈취함을 지적하면서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이 땅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죄악이 존재하며 그 결과 인생을 허무케 하는 비정상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언급처럼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에 대해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더 높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죄악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세째 : 재물의 헛됨에 대하여 살펴봅시다(10-17절) 인간은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할 때 참 생명과 만족, 평안, 승리 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자로서 만유의 참된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재물을 신성시하여 우상으로 섬기는 오류에 함몰되지 말고 오직 물질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주관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네째 :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에 대하여 살펴봅시다(18-20절) 저자는 먼저 이 세상에서의 복된 삶의 정의를 밝히고 이어 그 복된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인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축복을 자연적 소산물이나 자기 노력의 결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며 오직 하나남의 선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과 소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족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 안에만 참 안식이 있습니다(마11:28)
결 론>*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속속들이 경험한 지혜자가 신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하여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권고하는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형식주의나 허무의 굴레속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제목 세상적 풍요와 허무함 본문 6 : 01-12
서 론>*
본장은 사회 속에서 엿보여지는 여러 가지 불의와 부조리한 면들을 들어 해 아래 사는 인생들의 허무함을 다루는 4-6장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역시 사회 속에서 보여지는 해로운 면들을 부각시키므로써 인간의 허무함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필연적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설명하는 전반부(1-6절)와 욕망의 충족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의 무상을 언급하는 후반부(7-1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첫.째 : 인간의 외적 번영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1-6절) 사람은 흔히 외적 상태만을 보고 내부의 본질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장에서 솔로몬은 부와 명예, 많은 자녀와 장수, 그리고 세상이 놀랄 만한 선을 가졌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불행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에게 모든 부요와 존귀를 주시고도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기쁨이 수반되지 않는 번영은 인생을 조금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으며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병폐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무리 근사한 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희락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태어날 때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니다. 死産兒는 즐거움이 없는 부자보다 훨씬 자유로우며 많은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 인간의 욕망은 무한히 확대 재생산 됩니다(7-9절) 인간은 쾌락을 얻기 위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지만 결코 그곳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무제한적 욕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소유하지 못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차라리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리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온갖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린 솔로몬의 체험적 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째 : 세상적 번영은 종종 공허감과 불만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10-12절)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조그마한 소유로 하나님의 결정에 도전하며 대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경외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공허할 뿐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외관적 번성은 오히려 참다운 행복과 만족을 상실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매개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세상 만물이 자체적으로 진정한 희락을 생산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네째 : 하나님과 대면하는 솔로몬의 모습 솔로몬은 욥이나 예레미야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길고 긴 변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수납하였고(욥42:1-6절)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확인하였습니다(렘20:7-9절)
반면에 솔로몬은 꾸준하고도 조용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형태가 아닌 잠정적이고도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논쟁이나 질문을 피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결 론>*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신묘불측(神妙不測) 하여서 인간의 얄팍한 논리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적인 화려함에 의하여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할 때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제목 하나님의 지혜를 적용하는 생활태도 본문 7 : 01-14
서 론
본장에서부터는 허무한 인생 속에서도 나름대로 보람있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교훈적 형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인생의 허무함을 몸소 경험한 후에 신앙을 회복한 전도자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소유한 인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참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음을 역설하는 전반부(1-14절)와 중용에 대한 성경적 시각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중반부(15-18절)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는 지혜자의 능력과 인간의 부패함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후반부(19-29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첫.째 : 인간의 불행이나 재난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닙니다(1-14)저자는 현재의 슬픔과 고통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 면에 있어서 외형적으로 번영하고 있는 사람의 환희와 기쁨보다 훨씬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부자의 즐거움보다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지속적 영향력이 더욱 중요하고(1절)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이 무익하고 공허한 웃음보다 더욱 큰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2-6절) 예수님께서도 산상 설교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불공평하게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조화로운 섭리를 기다리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둘째 :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간적 평가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15-22절) 인간적 지혜로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섣불리 도덕적 선과 악의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절대화 할 때는 완고한 흑백 논리에 함몰될 우려가 많습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행동 속에 선과 악의 동기가 혼재되어 있고 그 결과도 선악의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자각했습니다(15-18절) 세상의 어떤 사람도 전적으로 순결하거나 혹은 전적으로 불결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절대적 도덕주의를 주장한다면 자기 자신의 역량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하는 율법주의적 태도로 경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의로운 사람은 없으므로(20절)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판단하지 말고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마6:12 ; 엡4:32)
세째 : 외부적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24절)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멸망이나 악인의 형통과 같은 모순된 현실에 직면할 때 성급하고 부당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배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규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한편 솔로몬이 본장에서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묘사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지음받은 존재라는 자각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의 인간이 참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참다운 인생을 영위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12:13)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솔로몬의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신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세상 만물의 허무함을 자각한 후에 염세주의적(厭世主義的) 사상으로 경도(傾倒)되지 않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순간적인 쾌락과 세속적인 위안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매일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제목 하나님의 공의로운 도덕적 통치 본문 8 : 01-06
본장에서 세상의 여러 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공의를 실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세상적 조류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겸허하게 복종하며 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왕에 대한 지혜자의 자세가 드러나는 전반부(1-8절)와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통에 대한 신앙적 이해가 서술되는 중반부(9-15절)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유한성이 비교되고 있는 후반부(16-17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성경은 하나님을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자주 묘사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본문에서 솔로몬 역시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의 왕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언행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 경거 망동하지 말아야 합니다(3절) 왕 앞에 선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그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에게 아뢸 한마디의 말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격조와 예법을 따집니다. 뿐만 아니라 어전에서는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행위를 일체 삼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신자들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언어와 행실에 신중을 기하며 진실해야 합니다. ‘헛 맹세하지 말라’(마5:3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5:11)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선 우리가 언어 행실에 있어서 경거 망동하지 말아야 함을 교훈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 권위를 인정하여야 합니다(4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자요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권한을 가리켜 왕권 또는 주권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은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主)되심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자들과 성경 시인들은 하늘과 땅과 낮고 밤들조차도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한다고 읊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 드려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왕의 왕으로서 내 삶의 주인으로서 대접하고 숭경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나타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과 위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 전적인 복종을 표해야 합니다. 실로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바처럼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는 다만 그분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째 : 명령에 복종하여야 합니다(2절)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주(主)로 천명하시면서 당신의 계명에 절대 복종할 것을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당신의 혈육이요, 제자(마12:50)가 될 것이나 그렇지 않는 자는 종말에 하나님께로부터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23)
요컨대 ‘누가 그리스도의 참제자인가’하는 문제를 판별짓는 기준은 주님의 명령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본문 2절에서도 전도자는 이르기를 왕 곧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지 어느 독재자처럼 무소불위의 모멸찬 권력을 휘두르거나 자신의 이기만을 챙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나아가 그 아들과 더불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러기에 순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 본문 9 : 01-12
저자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증거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부인하게 만드는 요소들에 대해 답변했으며(3:16-4:16)번영이 반드시 선하지는 않고(6:1-6) 불행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7:1-14) 이러한 내용과 동일한 맥락에서 본장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최종적 승리를 확신하며 낙관적으로 살아가도록 당부하는 전반부(1-12절)와 세상 지혜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후반부(13-1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이러한 내용들을 세분하면 인간 세상의 모순, 성도들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지혜에 대한 부당한 자세, 인간 지혜의 한계성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몇 가지 교훈을 살펴봅시다.
첫째 : 하나님의 뜻은 심오하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1-6절) 전도자는 1인칭 단수의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히 오묘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의인과 악인의 아무런 구별없이 동일하게 무덤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신비 중의 신비로 취급합니다.
어찌하여 제사와 선을 행하지 않는 비종교적이요 세속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전도자는 하나님의 독단적 결정을 인간이 모두 알 수 없으므로 판단하기 보다는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인 권위를 소유한다(11-12절) 인간의 행동과 역사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에 의지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며 주관자 이십니다. 인간은 단지 상대적인 의미만을 가집니다.
이러한 사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저자는 죽음의 평등성과 함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5절) 된다고 말합니다. 전도자가 이처럼 운명의 무차별성을 주장하는 저변에는 인간의 한계성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교차적으로 대비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세째 :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7-10절) 전도자는 인생이 상대적 의의만을 가진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염세주의나 허부주의로 경도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는 사람이 하는 가장 좋은 일은 자기의 일과 음식과 인간 관계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특별히 전도자는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대변해 주는 포도주와 떡을 등장시킵니다. 또한 기쁨과 축하의 상징이 되고 있는 흰색 옷과 결혼을 언급합니다. 결국 전도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미해결된 난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들을 마음껏 즐기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전도자는 인생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 시각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생이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허무한 실체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대상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제목 지혜와 우매의 결과에 대한 비교 본문 10 : 01-15
서 론
본장에서는 지혜로운 인생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우매한 자들의 행동과 폐단의 실례들을 언급한 전반부(1-7절)와 우매한 자들이 당하게 되는 피해를 나타낸 중반부(8-15절) 그리고 한 나라 통치자들의 우매함의 폐해를 묘사한 후반부(16-20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본문을 보면 전도자는 세상 사람을 지혜자와 우매자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양자의 차이를 보다 현실적,사실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 마음의 중심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2절) 2절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이 각각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지혜자는 오른쪽, 우매자는 왼쪽에 그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에서 오른편은 능력, 정의, 영광을 상징하며 무엇보다도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 반대로 왼편은 열등한 곳이며 불의한 자가 거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지혜자와 우매자의 차이가 이미 그 심중에 결정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곧 지혜자는 그 마음에 의와 진리의 세계를 좇고 찾으나 우매자는 불의의 세상을 좇는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속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며 그 언어를 행위로 옮깁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심중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컨대 표면적으로 나타난 행위나 그 결과보다는 그 행위를 유발케 하는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로 진정한 지혜자는 그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세상의 다른 어느 것보다도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 말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3절) 우리는 앞에서 인간이 그 마음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지혜자와 우매자의 마음이 상반되므로 그 언어가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습니다. 본문 3절에은 우매자가 어떻게 말로써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시간과 장소를 분별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의 우매한 생각을 언어로 발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온갖 사리에 맞지 않는 말과 거짓된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입술은 패려하며 저주스런 것이라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지혜자는 그 마음속의 생각이 진실하고 신중하듯 그 언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사리에 맞는 말을 골라서 하며 경우에 합당한 언어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실로 지혜자는 그 입에 재갈을 물리고 샘이 두가지 물을 내지 않듯 항상 참되고 경건한 언어를 자기 입에 두고자 노력합니다.
세째 : 행동에 있어서 차이가 납니다(4절) 본문 4절에서 전도자는 ‘공순’ 이야말로 이 두 부류의 사라을 판별짓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우매자는 주권자에게 경솔하게 대항하거나 거역합니다. 그라하여 결국 그는 주권자의 노를 사게 됩니다. 그러나 지헤자는 설령 주권자가 자시에게 노를 일으켜도 경솔히 그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고 자기 직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인내함으로 견딥니다.
결국 그의 인내와 순종은 행여 있었을지도 모를 그의 과오를 덮어주며 동시에 주권자의 마음을 녹이게 됩니다. 실로 공순, 곧 순종이야말로 지헤자와 우매자의 가장 큰 차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며 또 어떤 측면에서 믿음과 상통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 론
아무리 학력이 높고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는 영적으로 우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지정의 곧 전인격과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자는 길이야말로 지혜자의 도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목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의 자세 본문 11 : 01-10
본장은 전도서의 결론부의 시작으로서 전도자가 지금까지 논해 온 인생에 대한 견해가 총괄적으로 요약되어 나타납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전반부(1-6절)와 현재를 즐기며 미래를 대비하라고 권고하는 후반부(7-10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본문을 보면 전도자는 우리들에게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 몇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교훈을 얻도록 합시다.
첫째 : 근심과 악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10절) 본문 10절에 보면 전도자는 근심으로 하여금 청년의 마음에서 그리고 악으로 하여금 그 몸에서 각각 떠나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이렇습니다. 즉, 청년들은 부질 없는 근심과 염려로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저급한 쾌락으로 그 몸을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의 법 안에서 누리는 인생의 기쁨을 바람직한 것으로 권장합니다. 이 땅에서의 안일과 유익만을 도모하려는 계획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쇠락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러한 근심 걱정이야말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발전도 가져다 주지 않는 그릇된 것입니다. 이러한 근심과 악을 제하여 버리고 성령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며 즐겨야 합니다(9절) 흔히 인생을 즐긴다 하면 거부감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노동 자체만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간의 건전한 쾌락까지 죄악시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인간이 건전한 기쁨을 위해 피조되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그 기쁨을 향유 창조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살전5:16)
물론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법 안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본문 9절에서 전도자가 거듭 즐거워하며 기뻐하라고 청년들에게 권면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절정기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기 영혼을 피폐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또한 무절제한 방탕이나 지나친 금욕주의로 자신의 육체를 망가뜨려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건전한 기독교적 문화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순간적인 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연연해 할 필요도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올바로 정립하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 것도 자족하는 가운데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째 : 심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9절)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한적으로나마 자유 의지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과 의사 결정에 의해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들의 행위를 낱낱이 들춰내사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악을 뿌린 자는 영벌로, 선을 도모한 자는 그에 합당한 상급으로 보응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 론>
여러분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거의 모든 문화가 사람들의 탈선과 방탕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지를 견고히 하여 신앙적인 안목으로 버릴것과 취할 것을 잘 선택하고 실행하여 칭찬받는 성도가 됩시다 아멘
성도(사람)의 본분 본문 12 : 01-10
서 론
본서의 결론 부분이며 동시에 솔로몬의 인생관이 단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본장에는 하나님의 계획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방식이 함축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죽음이 엄습하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전반부(1-8절)와 전도자 자신의 이력을 언급한 중반부(9-11절) 그리고 본서의 결론을 요약하고 있는 후반부(12-14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와 자녀 역시 그렇다’(군군 신신 부부 자자)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각기 나름대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직무)이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사실 인간이 여느 피조물과 다른 것은 그가 행해야 할 본분을 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첫째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13절) 본문 13절에 보면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사람의 본분 중 첫째되는 것으로 꼽았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고 경배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즉,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유한 인격체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영교(靈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최대의 기쁨과 행복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의 길로 걷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본분 중 으뜸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13절) 본문 13절에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외적 ‘증거’이며 ‘표식’입니다. 순종이 없는 생활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으며 또한 그것은 허탄하고 가식된 것이라 할 만합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은 그분께 대한 진정한 복종심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은 순종을 제사보다 더 낫게 평가하고 있으며(삼상15:22) 신약성경 역시 순종을 참된 성도의 최고 덕목 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딛3:1)
어린아이가 부모의 명령을 청종할 때 그 안전과 행복을 보장받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규례에 절대 복종할 때 평강과 축복을 허락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째 :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14절) 마지막으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이 또 다른 본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심판자로서 종말에 선악간에 밝히 드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행위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4절) 이처럼 전도자가 본서를 심판의 경고로 종결짓는 까닭은 심판자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됨의 본분이며 이것이 곧 행복과 영원한 삶의 열쇠가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결 론
여러분 이 세가지(하나님을 경외하고,순종하고,심판을 기억하며 살는 것)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규례에 순종할 수밖에 없고 또한 종말에 임할 심판을 기억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장로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