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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1
교회를 외형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복음적방법은 없다.교회를 성장시키려면 공로사상만 주입시키면 된다.교회내 직급을 레벨 등급화 해서 차별화된 권한을 주고 그 직급을 얻기 위해서 헌금과 봉사의 수준을 적당히 어렵게 함으로써 자기 노력으로 상위 직급을 얻었을때 성취감을 가질수있게 하면 된다.물론 이는 복음의 원리는 아니다.
#신명기 #Deuteronomy 30:15-20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여호와께서는 표면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외형적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순종함으로 생명의 복을 얻을지 불순종함으로 사망의 화를 당할지 선택하게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는 것에는 외형적인 선택과 내면적인 선택의 두 단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그의 신앙이 어떠하건간에 그가 이스라엘의 땅에 살고 있거나 육신의 할례를 받았거나 하였다면 그는 일단 이스라엘 백성으로 간주되어 율법이 정한 규례를 행할 의무와 율법이 정한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내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외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호와의 율법에 참되게 순종하는 백성과 불순종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은 외적인 선택과 내적인 선택 이 두가지를 전부 충족하는 이들만 해당되었다. 오늘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도 동일한 원리로 인정된다. 즉 어떤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면 외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외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로 구분되었다 하더라도 성경과 성령대로 복음 사역을 하는 내적으로 참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 반면에, 형식만 그럴싸 하고 내적으로는 성경과 성령을 따르지 않는 거짓된 교회가 있게 마련이다. 교회의 신자도 외적으로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 교회의 설교를 들으며 그 교회에서 종교활동을 하게 된다면 누구든지 그 교회의 표면적인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교회의 신자들 중에서도 어떤 신자는 성경과 성령께 순종하는 내적으로 참된 성도가 있는 반면에 어떤 신자는 성경과 성령께 불순종하는 내적으로 거짓 된 가라지 신자가 있게 마련이다. 내적으로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외적으로 이스라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듯이, 내적으로 참된 성도는 반드시 외형을 갖춘 유형 교회에 소속되어 있어야만 한다. 유형 교회에 속해있지 않으면서 자기를 참된 성도라고 여기는 것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미혹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에 순종해서 생명과 복을 얻을지 아니면 불순종해서 사망의 화를 당할지 좋을대로 선택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고대로부터 어떤 이단은 사람에게는 그 누구의 간섭이나 강요없이 순전히 자기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가르쳐왔다. 반면에 어떤 이단은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만의 의지로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며 하나님의 선을 선택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는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만 개입된다고 하기도 한다. 전자의 이단에서는 하나님의 의지를 말살해버리고 후자의 이단에서는 사람의 의지를 말살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내에서 율법에 불순종 하는 자들이나 교회 내에서 성경과 성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이나 이는 모두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만의 죄악 된 의지를 따른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율법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인이나 성경과 성령에 순종하는 교회 성도의 경우는 여호와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의 돌과 같은 심령을 살과 같이 부드럽게 하시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들이 새롭게 변화 된 자기 자신의 의지로써 선을 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즉 성도의 순종에는 그 기원이 물론 하나님의 성령이시지만서도 우리의 의지를 꺾으시거나 억압하시거나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스스로 선한 의지를 가지고 행하듯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순종은 전적으로 성령의 의지임과 동시에 성도 자신의 의지의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원리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하신 인간이신 것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성도의 순종과 선행에서 성령의 의지와 성도의 의지는 분리할 수 없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 이스라엘인이나 참 성도들이나 자기 자신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의 순종이 비록 자기들의 선한 의지로 행하는 것이어도 그 선한 의지의 근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령께 있는 것인데, 성령께서 그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은 그들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이스라엘인과 참 성도들의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으로는 이것이 참 이스라엘인과 참 성도의 순종인지 거짓 이스라엘인과 거짓 신자의 위선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람의 좋은 행실만 보고 구원을 확신하다가 그가 별안간 교회와 신앙을 저버리게 되는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에 빠지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성령을 받았어도 심판을 받았고 요아스 왕은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선을 행하였어도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타락하여 여호야다의 아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사도들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리라고는 그 누구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자기 땅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놓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실제로는 성령을 속였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였었다. 그런 자들은 요한 사도가 가르친대로 비록 외적으로는 유형 교회에 속해있으나 내적으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 교회에 기생하면서 은밀히 자기 죄를 키우다가 죄가 장성하였을 때 교회에 많은 해악을 끼친 다음에 배교하는 것 뿐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배교자들도 얼마간 성령의 은사와 빛을 맛보고 유익을 누리고 끼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받았던 성령을 하찮게 여겨 저버린다고 하였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모습에 휘둘리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참 이스라엘인과 참 성도의 순종과 선행은 일회성이거나 한시적이 아니라 꾸준히 장성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이는 중간에 아무런 죄악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질적으로 성숙해지고 양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오랜 기간 교회 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행에 아무런 성숙도 성장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참 성도가 아니라 배교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느 순간 변화시키실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수도 있는데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그렇게 변화시키실 수 있으시지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파되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령하고 드라마틱한 사역은 줄어들고 신앙을 위해서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이 자리를 잡게 되어왔듯이, 오늘날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자에게서 아무런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면 그가 드라마틱하게 회심할 가능성도 그만큼 배제되어 희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짓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백성이고 절기와 제사를 드린다는 것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여호와께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스스럼 없이 죄악을 저지르다가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거짓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선택은 절대 불변하고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읊조리며 교회생활에 열심을 낸다는 것을 빌미로 자기들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 받으며 절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거짓된 구원의 확신에 빠져있다. 자기는 목사이니까 장로이니까 성경을 수십번 읽었으니까 교회를 빠지지 않았으니까 등등의 이유로 자기 구원의 확신을 삼다가 마지막 날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알지 못한다 거부를 당하고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울며불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도리어 참 성도의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란, 자기 자신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성경의 약속만을 신뢰하며 행여나 자기가 어느 순간 범죄와 배교함으로 떨어져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매사에 조심하며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것이다.
#20220831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9-16
새 예루살렘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災殃을 담은 일곱 天使 中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新婦 곧 어린 羊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One of the seven angels who had the seven bowls full of the seven last plagues came and said to me, "Come, I will show you the bride, the wife of the Lamb."
Et venit unus de septem angelis habentibus phialas plenas septem plagis novissimis, et locutus est mecum, dicens : Veni, et ostendam tibi sponsam, uxorem Agni.
Καὶ ἦλθεν εἷς ἐκ τῶν ἑπτὰ ἀγγέλων τῶν ἐχόντων τὰς ἑπτὰ φιάλας, τῶν γεμόντων τῶν ἑπτὰ πληγῶν τῶν ἐσχάτων, καὶ ἐλάλησεν μετ’ ἐμοῦ λέγων Δεῦρο, δείξω σοι τὴν νύμφην τὴν γυναῖκα τοῦ ἀρνίου.
요한 사도는 자신에게 어린 양의 신부이자 아내를 보여줄 천사가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천사들 중 어느 천사인지를 명시하지 않고 다만 그 중 하나라고만 밝히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천사에 대해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호기심을 갖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린 양의 아내는 해를 옷입고 달을 발판으로 삼으며 하늘로 들림받은 남자아이를 낳고 용의 핍박을 피해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이동해서 하나님께로부터 1260일 동안 양육을 받은 그 여인일 것이다. 그 여인은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밋밋한 만나와 같은 음식을 먹고 낡아지지는 않으나 멋드러지지 않은 투박하고 거친 옷을 입으며 지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렵고 힘든 양육 기간을 거친 후에는 하늘로 들림받아 어린 양의 신부로 꾸밈을 받는다.
10 聖靈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山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城 예루살렘을 보이니
And he carried me away in the Spirit to a mountain great and high, and showed me the Holy City, Jerusalem, coming down out of heaven from God.
Et sustulit me in spiritu in montem magnum et altum, et ostendit mihi civitatem sanctam Jerusalem descendentem de cælo a Deo,
καὶ ἀπήνεγκέν με ἐν Πνεύματι ἐπὶ ὄρος μέγα καὶ ὑψηλόν, καὶ ἔδειξέν μοι τὴν πόλιν τὴν ἁγίαν Ἱερουσαλὴμ καταβαίνουσαν ἐκ τοῦ οὐρανοῦ ἀπὸ τοῦ Θεοῦ,
요한 사도가 성령으로 옮겨졌다고 언급한 것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한 천사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하다는 것과, 어린 양의 신부를 요한 사도에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이라는 것과, 자신이 기록하는 이 예언의 내용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진실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요한 사도가 성령 안에서 올라간 크고 높은 산은 지금 지구 상에 존재하는 어떤 산이 아닐 것이다. 하늘에서 내린 불이 무저갱에서 잠시 놓인 용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을 짓밟으려는 땅의 백성들을 소멸하고 지구를 비롯한 우주 만물이 그 형질까지 불에 풀어져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이전에는 없었다가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모든 성도들과 교회들의 신앙의 열매와 발자취와 업적 등의 집합체가 영광스럽게 변화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비록 교회와 성도가 이 땅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선택된 백성과 자녀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내린 불이 땅의 백성들을 멸할 때 만물의 형질이 불에 풀어질 때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룩한 열매와 업적과 성과들도 함께 성령의 불시험을 받아 부적절한 것들을 살라져버리고 불시험에 견딜만한 것들만 온전히 새 예루살렘의 건축재료가 되는 것이다.
11 하나님의 榮光이 있어 그 城의 빛이 至極히 貴한 寶石 같고 璧玉과 水晶 같이 맑더라
It shone with the glory of God, and its brilliance was like that of a very precious jewel, like a jasper, clear as crystal.
habentem claritatem Dei : et lumen ejus simile lapidi pretioso tamquam lapidi jaspidis, sicut crystallum.
ἔχουσαν τὴν δόξαν τοῦ Θεοῦ· ὁ φωστὴρ αὐτῆς ὅμοιος λίθῳ τιμιωτάτῳ, ὡς λίθῳ ἰάσπιδι κρυσταλλίζοντι·
어린 양의 신부가 처음 땅에 내려올 때는 하늘의 해를 옷입었었으나 새 예루살렘으로 치장될 때는 하늘의 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하나님의 영광을 옷입게 된다. 광야에서 양육받을 때에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값진 보석으로 치장한 음녀에게 항상 멸시를 당하기 일쑤였으나 어린 양의 신부로는 땅의 보석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석빛으로 치장받는다.
12 크고 높은 城郭이 있고 열두 門이 있는데 門에 열두 天使가 있고 그 門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子孫 열두 支派의 이름들이라
It had a great, high wall with twelve gates, and with twelve angels at the gates. On the gates were written the names of the twelve tribes of Israel.
Et habebat murum magnum, et altum, habentem portas duodecim : et in portis angelos duodecim, et nomina inscripta, quæ sunt nomina duodecim tribuum filiorum Israël :
ἔχουσα τεῖχος μέγα καὶ ὑψηλόν, ἔχουσα πυλῶνας δώδεκα, καὶ ἐπὶ τοῖς πυλῶσιν ἀγγέλους δώδεκα, καὶ ὀνόματα ἐπιγεγραμμένα, ἅ ἐστιν τῶν δώδεκα φυλῶν υἱῶν Ἰσραήλ.
성곽의 열두 문 위에 새겨진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은 앞서 하나님의 인을 받은 144천 명을 이루는 지파들일 것이다. 이 지파들에는 단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배제되었는데, 단 지파는 아마도 말발굽을 물어 말탄 자를 넘어뜨리는 수풀의 뱀이 되리라는 모세의 예언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지파였을 것이고, 에브라임 지파는 예수님께 사형판결을 내린 대제사장의 지파였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지파에서 잘려나가게 된 것 같다.
13 東쪽에 세 門, 北쪽에 세 門, 南쪽에 세 門, 西쪽에 세 門이니
There were three gates on the east, three on the north, three on the south and three on the west.
ab oriente portæ tres, et ab aquilone portæ tres, et ab austro portæ tres, et ab occasu portæ tres.
ἀπὸ ἀνατολῆς πυλῶνες τρεῖς, καὶ ἀπὸ βορρᾶ πυλῶνες τρεῖς, καὶ ἀπὸ νότου πυλῶνες τρεῖς, καὶ ἀπὸ δυσμῶν πυλῶνες τρεῖς.
열두 지파가 문으로 지정된 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신령한 혈통과 소속과 가문을 의미한다. 동서남북에 세 문씩 배치된 것은 모세가 명한 바 광야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으로 지파별로 진영을 배치한 것의 완성형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동서남북이 3차원적인 공간에 속한 것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3차원을 초월하는 공간이므로 동일한 방위라고 볼 수는 없다.
14 그 城의 城郭에는 열두 基礎石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羊의 열두 使徒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The wall of the city had twelve foundations, and on them were the names of the twelve apostles of the Lamb.
Et murus civitatis habens fundamenta duodecim, et in ipsis duodecim nomina duodecim apostolorum Agni.
καὶ τὸ τεῖχος τῆς πόλεως ἔχων θεμελίους δώδεκα, καὶ ἐπ’ αὐτῶν δώδεκα ὀνόματα τῶν δώδεκα ἀποστόλων τοῦ Ἀρνίου.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열두 지파의 열두 문 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새겨진 열두 기초석들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사도들이 교회의 기둥과 같이 굳건하게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중에서 가룟 유다는 배신하여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맛디야가 그 자리로 선출되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주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13명인데 열두 기초석과 어떻게 일치를 시켜야 할 지는 잘 모르겠다.
15 내게 말하는 者가 그 城과 그 門들과 城郭을 測量하려고 金 갈대 자를 가졌더라
The angel who talked with me had a measuring rod of gold to measure the city, its gates and its walls.
Et qui loquebatur mecum, habebat mensuram arundineam auream, ut metiretur civitatem, et portas ejus, et murum.
Καὶ ὁ λαλῶν μετ’ ἐμοῦ εἶχεν μέτρον κάλαμον χρυσοῦν, ἵνα μετρήσῃ τὴν πόλιν καὶ τοὺς πυλῶνας αὐτῆς καὶ τὸ τεῖχος αὐτῆς.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새 성전을 보았을 때에도 천사가 측량하는 막대 자를 들고 있어서 성전 내외부를 그 자로 측량했었는데 이제 요한 사도가 환상 중에 본 새 예루살렘에서 그것이 완전하게 성취된다.
16 그 城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城을 測量하니 萬 二千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The city was laid out like a square, as long as it was wide. He measured the city with the rod and found it to be 12,000 stadia in length, and as wide and high as it is long.
Et civitas in quadro posita est, et longitudo ejus tanta est quanta et latitudo : et mensus est civitatem de arundine aurea per stadia duodecim millia : et longitudo, et altitudo, et latitudo ejus æqualia sunt.
καὶ ἡ πόλις τετράγωνος κεῖται, καὶ τὸ μῆκος αὐτῆς ὅσον τὸ πλάτος. καὶ ἐμέτρησεν τὴν πόλιν τῷ καλάμῳ ἐπὶ σταδίων δώδεκα χιλιάδων· τὸ μῆκος καὶ τὸ πλάτος καὶ τὸ ὕψος αὐτῆς ἴσα ἐστίν.
새 예루살렘은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2천 스다디온인 정육면체이다. 각 변의 길이인 12천 스다디온은 12와 10의 세제곱으로 이뤄진 수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완전무결한 섭리와 사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 측량 단위인 스다디온은 요한 사도 당시의 그 단위 길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새 예루살렘에 맞는 신령하게 변화된 측량 단위일 것이다.
#20200831
#레위기 #Leviticus 19:30-(2)
(2) 야곱의 가족 75명이 요셉이 있는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한 때부터 요셉이 생존한 얼마간은 안식일을 준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집권하고부터 애굽은 고센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에 고된 노역으로 학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이스라엘의 수가 줄어들기는 커녕 점점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자 급기야는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강에 던져 죽이는 만행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런 학대받는 환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안식일을 준수했을리는 만무하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섬기던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시라는 것마저도 잊을 정도로 신앙을 상실한 상태이다. 아울러 애굽에서 4백여 년을 지내면서 애굽의 우상문화를 점점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모습만 본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여느 이방 족속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로 인도하셨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시고 명하신 것은 안식일을 반드시 지키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대한 개념 자체를 몰랐던 백성을 훈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 자신의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40년 간의 광야 생활 동안 안식일을 지키며 훈련받게 된 것이다. 광야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성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들의 장막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성소에 모일 수 있는 때는 공식적으로는 일년에 유월절, 초실절, 수장절 단 세 번 뿐이었고 비공식적으로는 속죄나 화목 등을 위한 제사를 드릴 때 뿐이었다. 그 외의 평상적인 안식일에는 각자의 장막 안에 머물면서 잠잠히 하나님을 묵상해야 했다. 그들이 안식일에 성소에 모이지 않고 자기 장막에 머물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교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이 감각하지는 못해도 여호와께서는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는데 따른 은혜와 복을 주고 계셨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코로나로 인한 비상시국임에도 무조건 대면 현장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적지 않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의 주장이 원천적으로 근거가 없음을 드러낸다.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광야 생활을 했던 백성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잠시 여호와의 안식일을 제대로 준수했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급속도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안식일도 지키지 않게 되었다. 그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저버린 백성들을 주변 이방 족속들에게 넘기셔서 징치하셨고 그제서야 백성들은 여호와께 간구하여 여호와께서 세우신 사사들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 백성들은 선한 사사들의 다스림을 받을 때는 잠시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켰으나 그 외의 기간에는 어김없이 우상숭배로 타락하기를 반복하였다.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가 이렇게 오락가락 갈팡질팡한 것은 사무엘이 사사로 다스리던 때에서야 조금씩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스릴 때에 확고히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이새의 8남매 중 막내로서 제대로 아들 대잡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막내로서 집안의 가축을 돌보는 일을 전담했으며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어린 시절에 안식일을 규례대로 준수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가축을 돌보는 가운데서 시시때때로 여호와를 묵상하고 찬양하였고 여호와께서는 그런 어린 다윗의 일상의 예배와 찬양을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다윗이 어린 나이에 블레셋 최강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능력으로 쳐죽이고 나서 사울에게 발탁되어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그는 장수로서의 공무와 전투와 사울의 수금 연주자 등의 역할들로 인해 제대로 안식일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거의 10여 년 간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쫓겨 도망다니느라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소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기를 소망하였어도 그의 상황과 현실을 그런 호사를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시편에서 여호와의 성소와 성전과 안식일을 사모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던 것이다. 더군다나 다윗은 사울에게서 급하게 도망하느라 안식일에 자기 무리를 데리고 멀리 이동하고 제사장 아히멜렉에게서 갓 물려낸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제공받기도 했으나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범한 것에 문제를 삼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작금의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정부 방침을 거역하여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도리어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때에서야 여호와의 안식일 규례가 정착되어 지켜졌을 것이나 그 기간은 길어야 8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솔로몬은 초반에는 여호와를 섬겼으나 중간에 심각하게 여호와를 떠났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짧았을 것이다. 솔로몬의 배교로 말미암아 그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가 두동강 나버려서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개 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그가 지시한대로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고 레위인이 아닌 아무나 제사장이 됨으로써 전적으로 여호와를 저버리게 된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은 스스로 여호와를 저버렸어도 여호와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회심을 촉구하셨다. 이스라엘 중에 여호와를 섬기는 이가 혼자인 줄 알았던 엘리야나, 아합의 신하로서 여호와의 선지자들 백 명을 숨기고 먹인 오바댜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이나 당시 아합이 다스리던 북 이스라엘에서는 제대로 안식일을 지킬 수도,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띄게 안식일을 지키고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가는 당장에 아합과 이세벨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처럼 당시에 참되게 여호와를 섬기던 성도들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안위를 보살피셨다. 또한 이방 족속으로서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나병을 고침받은 후에 엘리사가 거주한 땅의 흙을 두 바리 정도 나귀에 싣고서는 아람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직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리겠노라고 서원한다. 그러나 나아만은 군대장관이었기 때문에 아람 왕이 자기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나아만의 손을 빌려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신에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데 이를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엘리사에게 간구하고 엘리사는 기꺼이 그에게 여호와의 평안을 빈다. 나아만은 자기 나라에서 홀로 여호와를 섬겨야 하는데 그가 어떻게 여호와의 안식일과 제사 규례를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엘리사는 여호와를 향한 그의 신앙이 참된 것임을 인증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여로보암을 따라간 북 이스라엘 열 지파들은 안식일을 지켰어도 여호와의 안식일이 아니라 단지 바알과 아세라의 안식일을 지켰을 뿐이었다. 그렇게 여호와의 안식일을 더럽힌 북 이스라엘은 결국 여호와께서 보내신 앗수르의 침공으로 B.C. 722년예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인해 사마리아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혈통을 잃어버리고 대대로 무시받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