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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 : 23. 원망들을 만한 일 24. 형제와 화목하고 25. 급히 사화(私和)하라 26.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마 5 : 23. 원망들을 만한 일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
주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교훈하셨다.
사랑을 실천하고 화목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예배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다.
* 삼상 15: 22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1]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 생각나거든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했다. 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 안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른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
* 막 11: 25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바로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 없이 살피는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 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당한 당사자가 아니라 그에게 있다(Lenski).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 사 1: 10-17 –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한다.
마 5 : 24. 형제와 화목하고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 요일 3: 9-10 –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 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말했다. 선한 삶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한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1]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모든 준비가 갖춰졌을지라도 먼저 선결해야 할 문제가 형제와의 화목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고 있을지라도 형제와의 화목에 거침이 있다면 제물을 제단에 두고 되돌아가서 형제와의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2]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가 아닌 '디아'(*,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이다.
* 마 9: 13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 12: 7 -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 마 23: 25-26 –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
* 막 7: 15-16 –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 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
* 마 25: 40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본 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마 5: 25. 급히 사화(私和)하라 -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엄격하고 철저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자와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엄격하고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죄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한다.
1]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많은 채권자는 이렇게 해결 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이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 눅 12: 57-59 –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다.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치면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 이후에는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2]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다.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맡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3]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관예'(*,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젓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라 할 수 있다.
* 눅 4:20 -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옥'(*,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이라 말한다.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마 5 : 26.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선한 삶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고전 13: 4-5).
에베소서 4: 29, 31-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야고보서 3: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장엄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18: 34에 보면, 본 절과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 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 마 18: 34 -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눅 12: 59 -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마 22: 13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 마 24: 51 -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 마 25: 30, 46 –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2] 한 푼이라도 (*,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 막 12: 42 -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어떤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그와 화목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려야 함을 교훈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엄격하고 철저함을 말씀하셨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 22). 그 순종할 내용 속에는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랑의 명령이 들어 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남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그를 멸시하여 욕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을 하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3] 살인하지 말라 ( 마 5: 21-26 )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여섯 번째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바로 알려주시는 내용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사람을 꼭 죽여야만 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계명을 범한 일이 없는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다. 요즘 사람들도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나는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 자기 의로움을 말한다.
마음의 범죄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인가? 마음의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신앙은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마음이 어떻든 상관이 없다는 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다. 이런 바리새적인 의로는 천국 백성으로서 합당한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의 참뜻과 계명을 주신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다.
(1) 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즉 지금까지 너희가 이렇게 들어왔지만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 "옛 사람"은 성경을 기록한 모세나 선지자를 가리키는 뜻이 아니고 유전을 전해준 사람을 가리킨다.
유전이란 "구두로 건너 받은" 이런 뜻이다.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입으로 전달받은 것이다. 유전에는 해설이나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하라고 적용시켜 만들어진 율법인데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주실 때의 원뜻이 와전되거나 훼손되었다. 그들은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일부는 율법에 기록하고 나머지는 구두로 여호수아에게 전했다. 여호수아는 구두로 모세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로들에게 전했다.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전하고 또 선지자들은 회당에서 가르치는 자들에게 전했다. 이것이 유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다고 하셨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지니라"가 전부다. 그런데 유전에는 그 계명 뒤에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원문에 의하면 세상 법정의 재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 법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그래서 막 7: 7-8에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하셨다. 이렇게 전통(유전)의 교훈이 세상 계명이다 보니 마음의 문제 같은 것은 상관이 없는 율법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6계명에 대한 전통(유전)은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십계명의 의도를 벗어나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국한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2)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
이것은 행위는 물론 마음의 문제까지를 의미한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 공회는 세상 법정이다. 그리고 지옥 불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음의 미움도 살인이며 마음의 미움은 세상 법정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문제가 된다는 교훈이다. 살인이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 15)라 했다. 또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등신", "바보" “천치” 이런 말로 인격을 모멸하고 혐오하는 말이다. 형제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도 인격 살인이다.
어떤 랍비가 집으로 돌아오는 중 어떤 아이가 인사를 하는데 너무 못생겼다. 잔치를 다녀오던 길이라 뱃속의 음식물이 넘어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랍비는 "라가야" 하고서 묻기를 "너 왜 그렇게 못생겼느냐? 너희집 사람들도 다 그렇게 못생겼니?" 이건 인격을 혐오하는 말이다. 그때 그 어린이가 이렇게 대꾸합니다. "글쎄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추하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시고 싶으시면 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가서 왜 저를 이렇게 추하게 만드셨는지 물어봐 주세요." 랍비가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아이에게 크게 혼나고 말았다.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고 무시해도 모독죄로 공회에 잡혀가는데 하나님의 법정에서야 어찌 죄가 안 되겠습니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 미련이란 아이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을 의미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명예훼손죄나 명예살인죄다. 이 역시 사람의 법정은 물론 하나님의 법정에서도 심판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형제를 미워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로마인들을 미워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다. 또 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미워했다.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미워했다. 그들은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비판했다. 심지어 죄와 상관이 없으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살인하지 않았고 계명을 잘 지키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3) 살인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서로 화목하고 돕고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의 부족을 덮어주며 사랑하며 사는 것을 보시고자 하신 것이다. 이것이 6계명의 본래적인 의도다. 그래서 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다. 여기 “그러므로”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서로 화목하며 살라는 것이 근본 취지라는 것이다.
25-26절도 유사한 내용이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는 시험에 들지 않고 평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다. 잠시 잠깐의 실수로 살인하게 될 때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살인자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요즘 같으면 종신형이나 장기수가 될 것이고 당시 같으면 처형이 될 것이다. 육신의 문제만 아니다. 영적인 문제로 막힐때 아주 작은 문제에도 막힌다. 한 푼(여기서 호리라는 말은 자나 저울의 가장 작은 눈금이 호리다.) 즉 눈곱만큼이라도 사사로운 감정이라도 있으면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어떤 문제로 막혔는지 하나님께 서운하게 한 것은 없는지, 사람에게 서운하게 한 것은 없는지 살펴서 풀어야 한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나 서운함을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내 영이 막힌다. 사업이 막히고 어려움을 당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화목제물로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해야 한다. 살인이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다 한 것은 아니다. 행위의 살인뿐 아니라 마음의 미움이나 멸시, 입술의 악함은 물론 진실로 화목하고 사랑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살인하지 말자.
그것은 제6계명의 내용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미워하지 말자.
우리는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고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욕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를 죽이는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서로 화목하자.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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