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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고대의 로마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황금기, 그 이후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시기(14~138)를 은세기라고 부른다.
황금기 시절에 유명한 문학가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다. 여러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를 찬양한 아이네아스가 유명하다. 로마 제국의 검소한 농경 문화와 현재를 즐기자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호라티우스의 서정시, '연애의 기술'을 창작한 오비디우스의 문학도 유명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시 형식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카이사르 역시 문학쪽으로 유명했다. 대표저서로는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 등이 있으며 이 두 기록은 카이사르가 본인의 행적을 수려한 문장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1차 사료로써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외에 카이사르의 작품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불태워버리며 남지 않았다.
은세기의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세네카가 있다. 세네카는 그리스 비극을 모방하여 몇 편의 비극을 제작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타락을 풍자한 유베날리스, 마르티알리스도 유명하다.
산문 문학으로는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일컬어진 사티리콘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내용이 많이 실전되었다. 사티리콘의 풍자성은 이후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문학으로도 이어진다.
이상미를 구현하려는 그리스와 격정미를 구현하려는 헬레니즘 시절의 조각상과는 다르게 사실미를 구현하려는 성향이 짙다. 황제의 조각상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후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흉상에서 보이듯 인간미, 사실미보단 절대자, 신의 초월적 형상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했으며 이는 기독교의 절정기인 중세시대의 조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로마 시절에 너무 잘 나갔는지, 후손인 이탈리아인들은 세기말 막장 군대로서 새로운 전설들을 쌓고 있다. 오죽하면 로마인들 중 반은 국가 세우러 가다 죽고, 반은 국가 지키다 죽어서 이탈리아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고 로마를 이탈리아인만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대한 오류이긴 하다.
그리고 로마의 모든 신민이 라틴어로 대화한 것은 아니다. 대개의 지역은 토착어를 그대로 활용하였고, 특히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역은 라틴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여기에 로마인들이 공부한 문학의 대부분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어서 적지 않은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당장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 하더라도, <명상록>을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썼을 정도.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의 심장부에 건설한 대형 욕장에 부설된 공공 도서관에는 같은 크기의 방 두 곳에 라틴어 서적과 그리스어 서적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만 봐도 제국에서의 그리스어 위상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만 하더라도 그의 모국어는 당시 중동 지역 토착언어인 아람어였으며, <신약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다수 문헌이 학술 언어인 그리스어로 서술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라틴어가 완전히 학술적으로 찬밥이었던 건 아니고, 서로마 말기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어로 저술 활동을 했으며 그리스어와는 친숙하지 못하였다(『고백록』1,13,20).
로마는 전기에는 잘 나갔으나 이후 국가가 혼란해지면서 종교관이 바뀌었다. 심지어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는 신은 이전 세대의 영웅이나 자연현상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세대가 과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나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3세기의 위기와 같이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른 종교를 제치고 기독교가 커지게 되었다. 전기 그리스도교의 부흥기에는 미트라교, 이시스교 등의 신흥 외래 종교 역시 유행했고, 그리스도교와 이런 신흥 종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기독교는 당대 로마 제국에 있던 수많은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고,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은 근본적으로 정치ㆍ사회적인 변화 등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융성은 백 번 양보해도 원인이 아닌 결과고, 그리스도교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국가가 쇠퇴한다고 종교가 발전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애초에 로마의 쇠퇴도 '서로마 멸망=로마 멸망'으로 바라봤을 때 성립된다. 로마는 중심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1000년을 그리스도교 제국으로서 버텼다. 천도 이후의 로마, 다시 말해서 동로마 제국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론, 성화상 논쟁, 동서 교회 대분열 같은 기초 그리스도교 지식을 강제 학습하게 될 정도로 기독교를 신봉하는 제국이었다.
시대적으로도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로마 황제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이 줄어든 상태라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이민족들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침략자인 게르만족도 종파는 달랐지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정복 사업의 정체, 노예 감소로 인한 노동력 감소, 경작지 황폐화, 은광 생산 감소가 겹쳐서 사회적으로 침체된 상태였는데, 3세기에 들어서 북방 게르만족의 남하가 거세졌고 국경선에 가해지는 압력이 1, 2세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져서, 기존의 군단병을 이용한 선 방어(Limes, 리메스)로 막아 보려다가 물량으로 한 군데 집중해서 우르르 밀고 들어오는 게르만족에게 털리게 되었다.(3세기의 위기)
여기서 로마가 관리해야 하는 국경은 엄청나게 길었고 따라서 한 군단이 커버하는 길이는 어마어마했다. 군단 하나가 6천 명 정도였는데 이것으로 상당히 넓은 국경을 관리해야 하는 셈이었다. 아무리 무적의 로마 군단이라도 한 군단으로 최소한 10만에서 20만 단위로 남하하는 게르만족에 맞설 수 없었고, 황제가 직접 국경으로 와서 군단을 한데 모아 쳐부수는 방식을 쓰게 되었다. 문제는 로마는 전략 예비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을 소집하려면 각 군단 기지에서 빼내야 했다. 그쪽 국경을 텅텅 비워 놓아야 해서 이렇게 빈 곳으로 빈집털이를 들어올 경우 로마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병 전력을 늘려 기동력을 향상시켜서 게르만족이 중심부로 들어오기 전에 요격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기존의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 체계가 뒤바뀌었다. 잘 나갈 때는 기존의 로마식 체제로도 충분했지만, 사방에 적이 늘어나고 업무가 가중화되다 보니까 동방식 관료 체제와 4황제 체제로 바꿔서 정부 통제와 업무 능력을 향상시켰다.
문제는 이렇게 내세운 4황제들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가 넷이라는 건 동일한 계급에 군사 지휘권까지 가진 최고 권력자가 넷이라는 것이고 다른 3명을 제거하면 자기 혼자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다른 황제들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박 터지게 싸운 것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느 정도 진정시키지만, 공동 황제끼리의 대립은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
로마의 동서 분열 시기쯤 되면, 서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가 아닌 라벤나에서 거주했으며 통치도 라벤나에서 했다. 이후 라벤나는 사실상 행정적으로는 서로마의 중심이 되었으며 서로마 멸망 이후 고트족도 라벤나를 수도로 썼다. 물론 원로원은 아직 로마에 있었다.
라벤나가 로마를 대신한 이유는 거의 순전히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라벤나는 라인, 도나우 국경에 훨씬 가까운 데다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어 지중해 동쪽으로 가기도 수월했다.
제국이 된 이후에는 로마의 인구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농지는 전쟁 등으로 버려지거나 했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곡물을 지중해의 뱃길을 통해 수입해야 했다. 이 시기에 로마로 오는 식량의 주요 생산지는 지중해를 통해 식량 공급을 하기에 용이했던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였다. 그렇다고 이탈리아의 농사가 완전히 폐농한 건 아니고, 밀 농사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식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 대신 포도나 올리브 등의 재배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밀 농사를 짓는 농장도 없지 않았고 기본적인 식량이었기 때문에 양으로 따지면 언제나 주류였다.
유럽 문화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로마지만 실제 독서 문화 자체는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로마 시대에는 프린터나 복사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하다 못해 인쇄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필사해야 하였으며 당시에 책이라는 물건 자체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로마 시대에 책은 어디까지나 장식품으로 여겨졌으며, 독서보다는 연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었고, 철학자들의 능력도 독서와 강연을 통해서가 아닌 연설과 대화를 통해 길러졌다. 심지어 일자무식인 장군들이 외부로 원정 나가서 전리품으로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장식품으로 집안에 진열해 놓으면, 종이가 부족한 로마 본토에서는 이 위에 덧칠해서 새로운 책을 만들었을 정도. 그래서 로마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들 다수에는 뒷면에 고대 그리스, 중동권의 글이 쓰여져 있다. 현대에는 기술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막강하였는데, 가장의 권한은 세습되기도 하였다. 가족 내의 가부장권은 사회로 확장되어 파트로네스(보호자)-클리엔테스(피호민) 관계로 확장되었다. 다만 파트로네스는 가부장권에서 확장된 피호민에 대한 권리보다 피호민에 대한 의무가 훨씬 더 무거웠고, 이는 로마 사회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로마 제국은 연간 80,000톤에 달하는 납을 생산하였고, 이것은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 전체와 거의 맞먹는 규모다. 이로 인해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대기오염을 초래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늘날 그린란드의 빙하 코어 샘플에는 2000년 전 로마에서 생산되었던 납 물질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많은 납 생산 덕에 로마는 실생활에도 납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납을 사용한 송수관이다. 그래서 로마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납 중독이라고 보기도 한다.
로마인들도 납의 독성을 알고 있었고, 납 송수관의 경우는 송수관 내에 흐르는 물의 석회질이 코팅 효과를 내 납 중독을 막아주었다. 그런데도 납에 심하게 중독되어 사망한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납을 식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납 용기에 포도주를 담아 가열하면 둘 사이에 반응이 일어난다. 그러면 용기 아래쪽에 연당, 또는 아세트산 납(II)(Pb(CH3COO)2)이 생성되는데, 이 물질에서는 단맛이 나서 로마인들은 그걸 조미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여러 로마 시대 요리책에도 연당이 요리 재료로 자주 언급된다.
납 중독으로 로마가 멸망했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골에 자주 나타나는 납 중독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로마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먹은 납으로 인해 건강에 해를 입었다는 것은 맞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계급이 높을수록 납 노출량도 높아졌다. 그래서 로마 역사상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들은 대부분 스토익 철학에 따라서 검소하게, 즉 소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로마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토할 때까지' 먹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납 중독설은 제국의 동쪽 절반이 서방으로부터 단절된 뒤에도 오래 살아남은 사실로써 부정된다.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11.3. 로마는 퇴폐한 성문화 때문에 멸망했다?
칼리굴라, 스파르타쿠스같은 고대 로마를 소재로 한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묘사는 서구인들이 로마에 대해 갖는 환상(?)을 반영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문헌 상으로 남아 있는 기록 외에도 고고학적 발굴 결과 폼페이 등에 남겨진 에로틱한 유적, 유물을 보고 고대 로마 제국 자체가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로마 제국이 퇴폐적이어서 멸망했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폼페이 최후의 날이 성이 난잡해서 하나님이 형벌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물론 로마의 멸망이 도덕성 타락 때문이라는 식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근대 아니 르네상스 시대부터 반박이 이루어지던 비약적 주장이기도 하다. 중세, 근세 유럽 역시 프리섹스와 사생아, 불륜, 강간 등이 로마 못지 않던 시기였는데 고루한 성직자들이 주장하던 “퇴폐적인 로마” 드립이 상식이 있는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와닿았을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다. 여담으로 현대 고고학적 발굴 결과 로마 귀족들의 퇴폐 문화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는 루쿨루스로 대표되던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 즉 로마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서기 2세기 이전 일이기도 하다. 서기 2세기에는 로마 제국 상류층들 사이에 퍼진 스토아 학파 철학을 바탕으로 절제된 삶을 사는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도 했다. 만약에 로마 제국이 도덕적으로 고리타분해져서 멸망했다고 말대꾸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즉 로마 제국이 음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멸망했다는 주장은 먼저 원하는 결론을 내려놓고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끼워맞춘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현대 기준으로 로마가 성이 난잡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적 억압의 근거로 내세울 때 쓰는 낭설이다.
주류 기독교가 보이는 보수적인 성관념은 당시 로마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일대 아람어권 지역의 시민들의 성관념이 반영된 것이기도 한데 이 지역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봐도 이런 문화적 차이가 언급되는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시아인들은 당시 그리스인이나 이집트인 및 그리스 서쪽이나 북쪽의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나체 노출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유대교가 생겨나기 전인 신아시리아 제국에서도 전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던 문화와도 어느 정도 연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독교 이전 시절 이집트는 벽화를 보면 알테고 그리스와 로마, 켈트 문화권 모두 남성의 경우 나체 노출의 기준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관대한 수준이었고, 중세 초만 해도 습한 유럽 기후와 당시 목조 건축 가옥의 한계 때문에 집 안에서는 남녀노소 다 옷을 벗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는 어느 나라의 역사인가?
비록 이탈리아 내부의 도시국가로 출발했지만,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라 서양사 전반에 발이 걸쳐 있으며 과거 '제3의 로마'라 하여 많은 국가들이 계승을 자처했기에 현대에도 "로마는 누구의 역사인가?" 하는 떡밥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국가 및 왕조의 정통성, 민족주의와 얽혀 국제적인 정치 외교적 분쟁은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꾸준한 논란거리였으나, 현대 학계에서는 다르다. 현대 역사학계에서 로마는 서양사 그 자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와 있으며 이는 서양의 일반 대중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는 국민 국가 성립과 근대화 이후 더이상 로마를 계승한 '유럽의 정통성'이라는 게 크게 중요치 않게 됨에 따라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빠지게 되었으며 역사학계에서도 이에 얽매일 필요 없이 자유롭게 학설을 확립할 수 있었던 점이 컸다.
따라서 아래의 내용은 현재는 역사학적인 접근이라기 보다는 소위 역덕후라고 불리는 매니아들 사이에서의 우스갯소리 내지는 관련 국가에서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일부 과격 민족주의세력이 주장하는 내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로마의 후계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자들을 '롬스퍼거'라고 멸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과거와 현대를 걸쳐 주로 언급되어온 로마의 후예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서로마 제국 관련
이탈리아: 고대 로마의 첫번째 수도였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인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의 혈통을 물려받은데다 로마 가톨릭의 본산 역시 이탈리아 내부에 있기 때문에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는 오랜 기간 로마에 속해 있었고, 스페인인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
영국: 로마인들이 영국을 개척하고 많이 이주하였고 이는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에도 유지되었기에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주장
프랑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는데 프랑스라는 국호는 프랑크 왕국에서 유래했고, 나폴레옹도 카롤루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황제로 즉위했으므로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
동로마 제국 관련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는 로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그리스어였고 국교 역시 그리스 정교였으므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터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현재 이스탄불을 지금도 통치하고 있고 오스만 제국이 로마의 후예를 자처한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정교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왔으며,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를 계승했음을 주장하여 국가 문양도 쌍두독수리를 쓰고 있다.
루마니아: 루마니아인은 고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고, '로마인의 땅'을 뜻하는 명칭을 국호로 삼았으므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불가리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고, 바실레우스 칭호의 사용을 동로마로부터 인정받았고, 불가리아 제2제국의 수도인 벨리코 터르노보를 제3의 로마라고 부른 것에서 후예임을 주장
세르비아: 스테판 두샨 재위 기간 동안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한 것을 근거로 로마의 후예임을 주장
신성 로마 제국 관련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역사는 독일의 것이라는 주장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의 황가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진이었다는 이유로 로마의 후예임을 주장
그 외
미국: 근대식 공화정 체제를 구축하고 로마의 보편 제국의 형태에 가장 가까우며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패권 체제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확립한 형태가 로마 제국과 유사하다는 주장. 물론 미국은 로마의 역사적 계승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미국과 로마의 유사성은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서 대다수는 롬스퍼거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조선중화주의 드립을 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할 때는 대체적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비중을 높게 둔다. 물론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나름대로 로마 제국 계승에 필요한 여러 조건은 갖추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 본질을 자신있게 주장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중국사의 북위-북주-수당 제국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슬람 제국이 차지한 옛 로마의 고토를 회복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실패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조차 로마인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혹시 트로이야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오래된 트로이야를 출항해 수많은 바다를 항해하다가 변덕스런
폭풍에 떠밀려 리뷔아의 해안으로 왔습니다. 나는 경건한 아이네아스로
가정의 수호신들인 페나테스 신들을 적군에게서 뺴앗아 함선들에
싣고 가는 중이며 내 명성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나는 내 조국 이탈리아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서 태어난 나의 친족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네이스》 제1권 375-380행, 천병희 역
하지만 지금 그뤼니움의
아폴로께서는 나더러 위대한 이탈리아를 차지하라고 명령하셨고,
그분의 리퀴아 신탁소에서 던져진 제비에도 이탈리아가 적혀 있었소.
그곳이 나의 사랑이고, 나의 조국이오.
《아이네이스》 제4권 344-346행, 천병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