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노이만은 수학, 컴퓨터공학, 경제학, 물리학, 생물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업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입니다. 6살 때 8자리 (천만) 단위의 암산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으며, 12살때 전문 수학자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고, 17살에는 베를린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19살에 부다페스트 대학 수학과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는 일류 수학자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수학 이론을 최신 물리학에 적용함으로써 이론물리학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그 후엔 자신의 관심을 끄는 분야라면 어느 곳이고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을 가리지 않고 유감없이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28세의 나이에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 교수에 취임하였을 때는 이미 당시 가장 유명한 수학자 중 한사람이었으며,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와 이후의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도 참여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참극에 충격을 받아 원자탄 반대론자로 돌아선 많은 동시대의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원자폭탄의 적극적 찬성자였으며, 수소폭탄 실험을 직접 참관하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그가 암으로 사망한 이유는 수소폭탄 실험에서 받은 방사능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폰 노이만은 현대 경제학 이론을 특징짓는 중요한 이론들 중 하나인 [게임이론]의 창시자 입니다. 게임이론은 두 명의 경제 주체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경쟁할 때 가장 최적의 행동을 찾는 방법에 관한 이론으로, 제로-섬 게임 이라는 용어를 낳았으며, 이후 [내시]의 균형 이론과 함께 더욱 발전하여 기존 아담 스미스의 '개인의 최대 이익이 곧 전체의 최대 이익이다'라는 고전 경제학의 입장을 완전히 뒤엎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게임 이론은 군사 전략에도 이론적으로 응용될 여지가 많아, 그가 2차대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군의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됩니다.
폰 노이만의 가장 큰 업적은 현재와 같은 [CPU], [메모리], [프로그램] 구조를 갖는 범용컴퓨터 구조의확립 입니다. [ENIAC]으로 대표되는 이전까지의 컴퓨터는 새로운 계산을 할때마다 엔지니어들이 달려들어 진공관 회로의 스위치를 처음부터 하나하나 조정하여 새 입력을 처리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폰 노이만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할 당시 발표한 논문 <전자계산기의 이론 설계 서론>에서 CPU, 메모리, 프로그램 구조를 갖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하였고, 7년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뢰로 자신이 주창한 세계최초의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 EDSAC을 제작합니다. 이후에 나온 컴퓨터는 신경망 컴퓨터와 같은 실험적 성격이 강한 것들을 제외하면 모두 폰 노이만의 설계를 기본 구조로 디자인 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인공생명을 이론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입니다. 그는생명체를 자기 자신을 복제하여 번식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보고, 순수하게 정보이론적 입장에서 '자기복제'가 무엇인가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생명체가 스스로의 정보를 내장한 '설계도'(DNA)를 가져야 함을 보이고, 그 '설계도'는 생명체의 정보대로 실제 생명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관리자'(RNA)를 가져야 하며, '관리자'는 '설계도'대로 생명체를 재구성한 후, 생명체 안에 새로운 '설계도'를 복사해 넣음으로써 생명체를 복제하는 구조를 가져야 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노이만의 증명은 노이만이 세부 사항을 완성하지 못하고 암으로 사망함으로서 생물학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노이만 사후 DNA의 발견자 중 한명인 [크릭]이 DNA, RNA, 단백질로 이루어진 유전의 핵심 원리(Central Dogma)를 발견함으로서 노이만의 증명이 옳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노이만의 증명은 나중에 동료 버크스가 1966년에 세부사항을 완성시켜 출판하였으며, 이후 생명체를 자기복제하는 시스템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분자생물학자와 컴퓨터공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인공지능 학문의 기초가 됩니다.
그 외에도 그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중성자 충돌 시뮬레이션을 제작하기도 하고, 원자폭탄 개발에 필수적인 '고폭발성 렌즈'를 개발하기도 했으며, 그의 전공인 수학 분야에서도 작용소환론, 연속기하 등의 고등 수학 개념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는 2차대전 한가운데의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학자였고, 덕분에 맨해튼 프로젝트 외에도 군의 자문역을 많이 맡게 되는데, 그의 연구 주제가 컴퓨터, 게임 이론, 원자폭탄 개발 등 군에 연관된 주제가 많으며, 그 주제가 대단히 다양한 점도 그 때문입니다.
천재 수학자답게, 그는 괴팍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일면을 드러내는 일화 가 많습니다.
그는 운전을 잘 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통사고 뒤 진술서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 "내가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오른쪽의 가로수들은 시속 6마일의 규칙적인 속도로 나를 스쳐가고 있었다. 갑자기 그 중 하나가 내 길을 막았다."
그는 수와 관련된 그의 능력을 자랑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의 첫 번째 컴퓨터 EDSAC이 완성되어서 시험을 하게되자 누군가가 이런 문제를 냈습니다. "오른쪽에서 4번째 자리수가 7인 가장 작은 2의 지수는 얼마인가?" 컴퓨터와 폰노이만은 동시에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폰 노이만이 먼저 풀어서 승리하였습니다.
하루는 폰노이만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현대 수학은 너무나 광범위하여서 누구도 그 아주 작은 일부분 밖에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폰노이만 선생님은 수학에 대하여 자신이 어느 정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아주 신중하게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하였습니다. "28퍼센트".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 은 헝가리 미국 독일 유태계의 수학자로서 양자물리학 (quantum physics), 함수해석학 (functional analysis), 집합이론 (set theory), 컴퓨터과학, 경제학과 많은 수학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 일생 동안 약 150여 편의 논문을 썼고 60여 편은 순수 수학, 20여 편은 물리학, 60여 편은 응용 수학 관련.
2. 냉전 찬성론자, 소련에 대한 선제 공격 및 핵실험 찬성론자.
3. 무엇이든 한 번만 읽으면 다 외워버렸던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전화번호부를 순식간에 외워버림. 암산 능력 역시 경이적이어서 6살 때 8자리 숫자끼리의 나눗셈을 암산으로만 해냄.
4. 8살 때 calculus를 마스터, 12살 때 전문 수학자들이 읽는 저작을 읽기 시작했고 당시 이미 "비쟌틴 역사", "남북전쟁", "쟌다르크" 등에 관한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보유.
5. 직장을 염려한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 학부에서 화학 전공, 대개 수학을 공부하면서 보냄. 베를린과 부다페스트를 왕래하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으며 수학 공부 병행.
6. 19살 때, 집합론을 창시한 칸토어(Cantor)를 능가하는 서수(ordinal number)의 현대적 정의를 다룬 2번째 수학 논문 발표. 25살 때까지 10편의 중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서른 살 무렵까지 약 서른 여섯 편의 논문 발표.
7. 서른 살에 아인슈타인, 괴델 등이 재직하던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에 6명의 수학 교수 중 한 명으로 참여.
8. 최초로 경제학을 전략과 게임의 관점에서 분석해서, 심리학의 영역에 있던 인간의 경제적 행동을 수학적 분석이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온 책, "The Theory of Games and Economics" 를 Morgenstern 과 공저.
9. 2차 대전 중에는 오펜하이머의 맨하튼 프로젝트에 top mathematician으로 참여해서 원폭 개발에 관여.
10. 디지틀 컴퓨터의 prototype을 만드는 데 활용되는 수학적 이론 창안.
폰 노이만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유태인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적 수학의 신동이었으며 후에 그의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6살 때 암산으로 8자리 나눗셈을 할 수 있었으며, 8살에는 미적분학을 마치고, 12살에는 대학원 수준의 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7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이어서 취리히 대학에서 화공을 공부하였고, 이이서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1926년 그가 23살 때 취리히 대학에서 화공학 박사학위를, 부다페스트 대학에서는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3년간 그는 주로 수학의 오퍼레이터 이론을 양자론에 적용하는 연구를 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Princeton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2년 고등연구소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가 설립되자 수학분야의 6명 전임교수중 한 사람이 되었다. (6명에는 Einstein도 들어 있었다)
폰 노이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컴퓨터 (Computer) 의 발전에 대한 공헌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로그램-저장 컴퓨터'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폰 노이만은 그의 논문인 "전자계산기의 이론 설계 서론"에서 프로그램 내장 방식을 발표하였으며, 이를 구체화하여 폰 노이만 기계를 고안하고, 그 후에 펜실베니아 대학과 협력하여 ENIAC 을 기초로 해서 프로그램 내장 방식을 채택한 EDVAC 을 완성하였다. 이것의 중요한 두 가지 구성요소는 정보저장과 메모리에 저장된 프로그램에 따라서 메모리에서 서로 다른 '레지스터' 사이의 전달을 조직화하는 조종단위이었다. 그래서 순차적으로 작업이 수행되는 컴퓨터를 흔히 '폰노이만 기계(von Neumann machines)' 라고도 한다. 오늘날 이 개념은 당연한 방법으로 인식되나 1945년 당시에는 획기적인 돌파구였다. 그의 보고서에 기인하여 이 개념은 일반적으로 폰 노이만의 업적으로 평가되나, 몇몇 역사가나 당시 관계자들은 에커트가 폰 노이만보다 한 두 해 앞서 그 개념에 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장프로그램 개념의 원조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떠나, 이 개념으로 인하여 전자식 계수형 컴퓨터계에 보다 많은 활동을 위한 막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 원자탄계획 (Manhattan project) 에도 참여하였는데 J. L. Tuck와 함께 원자탄 계획에 필수적인 '고폭발성 렌즈'를 개발하였다. 또 그는 수학의 다른 방면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게임이론 (Game Theory) 으로서 그가 선구자적 업적을 남긴 분야이다. 이것은 전쟁 전략 뿐 아니라 실제 생활의 전략에도 적용되고 있다. 말년에 그는 원자핵 사용의 선두적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수학회장을 지냈고, 원자력위원회 위원도 지냈다.
...... 그런데 이제 암이 그의 생명을 요구하며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제 정말 올 것이 왔습니까?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요?" 의사의 답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라' 였다. 그 기간 동안 두 가지 일이 그에게 걸려 있었다. 하나는 죽음의 공학인 무기 개발에 관련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추상적인 성격의 것으로 생명 공학에 대한 것이었다.
첫 번째 일은 그가 정부를 위해 해야 할 임무였다. 암 진단을 받기 불과 석 달 전에 폰 노이만은 엄숙한 선서를 하고 원자력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위원의 주된 임무는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에 대해 과학적 견해를 대표하는 일이었다. 그가 이 위원회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었는지는, 미국 탄도 미사일 위원회가 폰 노이만 그룹이라고 불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수학자는 그 가공할 무기의 이용에 대한 옹호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그의 가족들이 공산 치하의 헝가리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이며, 실제로 그는 방어적 측면에서의 핵전이라는 발상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안 후에도 일을 계속했고, 마지막으로 입원했을 때도 그는 냉전을 주도한 두뇌 집단들과의 1 급 비밀 회의에서 컨설팅 역을 맡았다.
그의 두번째 과학적 추구는 그가 원자 폭탄 개발 과정에서 맡았던 역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자연의 운행 원리와 컴퓨터의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미래의 컴퓨터) 유사성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그의 목표는 자연의 생물학과 인공의 생물학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을 창안하는 것이었다 ( 인공생명 (Artificial Life) ). 살아 있는 유기체의 행동을 기계류의 움직임과 등가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은 폰 노이만과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세계는 논리적 원리라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현상의 군더기를 모두 없애고 그 정수만 남긴다면, 그 본질은 그 현상을 일으키는 공리 (자명한 이치) 일 것이다. 폰 노이만은 오토마톤 이론을 자신의 가장 큰 성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을 발간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원고는 완성되지 못했다 - 그리고 생물과 기계가 중첩되는 새로운, 그 이전까지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그 밖의 탐험들도 끝을 맺지 못했다.
1956년 4 월, 폰 노이만은 월터리드 군 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병원에 갖고 온 논문들은 예일 대학에서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컴퓨터와 뇌' 라는 제목의 강연 원고들이었다. 강연의 핵심 주제는 컴퓨터와 인간이 오토마타 (Automata) 의 서로 다른 종류라는 점이었다. 노이만은 그 강연을 통해 컴퓨터와 인간 양자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 서로를 비교할 계획이었다. 원래 그는 5 일간 강연을 하기로 약속했다. 입원한 후에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축약된 형태로라도 강연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은 자신의 병세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었다. 그는 다시는 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인물 소개 3
출처 : 실비아 네이사,《뷰티풀 마인드》(1998), 141~148쪽
오펜하이머보다 덜 유명하고, 아인슈타인보다 덜 초연했지만 내쉬세대에게는 둘도 없는 귀감이 되었던 인물.
- 윌리엄 파운드스톤(전기작가)의 말
최후의 진정한 박식가라고 할수 있는 폰 노이만은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많은 분야에 자주 과감히 뛰어들어 고도의 추상수학적 사고력으로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냈다.
나이 서른에 이미 순수수학계의 거인이 된 그는 물리학자, 경제학자, 무기 전문가, 컴퓨터 몽상가등으로 입지를 넓혀나갔다. 그가 발표한 180편의 논문 가운데 60편은 순수수학, 20편은 물리학, 60편은 통계학과 게임이론을 포함한 응용수학에 관한 것이었다.
3세대 미국 수학자들의 추앙을 받은 정수론 학자 하디는 근엄하고 탈속적이었다. 반면에 폰 노이만은 세속적이었고 현실참여적이었다. 하디는 정치학을 혐오했고, 응용수학에도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미학이란 미학적 탐구여서, 시나 음악처럼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은 순수수학과 공학사이에, 또는 초연한 사상가와 정치활동가의 역할사이에 무슨 모순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1963년에 나온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말도 있었던 폰 노이만은,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고 핵실험을 옹호한 냉전의 전사였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부유했으며, 비싼옷과 독한 술, 빠른 차, 걸쭉한 농담을 좋아했다.일에 관한한 퉁명스럽고 때로는 매몰찬 일 중독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프린스턴에서는 그가 인간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진짜 외계인이라는 농담이 사그라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는 헝가리인다운 매력과 재치가 빛을 발했다. 프린스턴의 우아한 라이브러리 플레이스에 있는 그의 벽돌집에서 벌어진 파티는 "빈번했고, 유명했고, 길었다."고 폴 핼모스는 말했다. 4개 국어로 유창하게 척척 말을 받아넘기는 그의 언변은 역사와 정치와 증권시장에 대한 화제까지 두루 넘나들었다.
그의 기억력은 놀라웠고, 정신력이 발휘되는 속도 또한 놀라웠다. 전화번호부 세로줄 한 칸을 단숨에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부다페스트 유태인 은행가 가문에서 태어난 폰 노이만이 조숙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여덟살에 미적분을 터득했고, 열두살에는 에밀 보렐의 <함수이론>과 같은 전문 수학가용 책을 읽었다. 그러나 장난감 기계를 만드는 것도 좋아했고, 비잔틴 역사와 미국 남북전쟁사, 잔다르크의 재판등에 대해서는 꼬마 전문가 행세를 하기도 했다.
폰 노이만은 처음에는 베를린 대학에서, 다음에는 함부르크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지냈다. 1931년 프린스턴의 비상근 교수가 되었고, 1933년에는 서른살의 나이에 고등학문연구소에 들어갔다.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관심사가 바뀌었는데, 헬모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까지 그는 물리학을 아는 일급의 순수 수학자였습니다. 그 후 그는 순수수학을 기억하는 응용수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물리학자와 경제학자, 전기공학자들에게 순수수학이 그들의 분야에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해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젊은 순수 수학자들에게는 수학을 실세계의 각 분야에 응용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실감케 해주었다.
20세기 천재 수학자 중에 단연 손 꼽히는 인물로서 위상수학과 대수학을 제외한 모든 수학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게임이론에서 양자역학 형식주의를 닦은 데까지 이른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Dr. Strangelove'의 모델이 폰 노이만이며, 파인만의 '파인만씨 농담하는 겁니까?'라는 책의 동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가장 추상적인 수학 이론을 다뤘으면서도 폰노이만이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가 원폭 개발의 멘하턴 프로젝트에 참가한 인물이라는 점, 둘째는 수학을 벗어나 경제학에서 진화론에 이르는 게임이론을 모르겐스테른과 창시한 점이다.
폰 노이만은 수학을 일종의 예술 작업, 특히 그림 그리기 작업으로 여긴다. 사실 수학과 미적 태도를 연결시키는 점은 많은 수학자들에게 공통된 현상이다. 폰 노이만의 경우 수학적 증명은 난해하면서 추상적이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 전체를 통합시켜주는 단순성이 있어야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 수학은 증명으로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에 적용되지 않는 수학 혹은 수학을 그저 추상적 이론 영역에 안주시키려는 수학자들은 폰노이만에게 별 의미 없다.
폰 노이만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는데 훈련이 아니라 타고난 능력이다. 그 능력이 그냥 기억력으로 머문다면 별 의미가 없다. 기억력이 문제 풀기 상황에서 발휘되는 훈련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러면 어려서부터 책도 많이 읽고 토론도 많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전인 교육을 폰노이만은 헝거리 중산층 유태인 가족 분위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
공산주의의 가장 실패적인 모범 사례로서 20년대 쿤(Kun)이 이끄는 공산당 집권을 피해 폰노이만 가족은 거점지를 옮긴다. 폰 노이만의 보수적이고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보통 이 경험에 근거한다고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쿤 집권을 도운 행정부의 다수 관료가 유태인들이었고, 경제 붕괴로 쿤 정권이 몰락하자 유태인들에 대한 반감이 헝거리 전역에서 일어났다. 5000여명이 죽고 10만명의 유태인들이 국외로 도주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쿤 공산주의 집권은 시회주의 노선에 동조적인 헝거리 시민들이 개혁의 희망으로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쿤은 한마디로 정책면에서 그리고 자기 인맥을 정권 요소요소 심음으로써 결국 몰락의 길을 자초했다.
언어 능력은 확실히 기억력에 바탕을 두는 듯하다. 폰 노이만의 언어 능력은 정말 뛰어났다고 한다. 다국어 구사가 그냥 구사가 아닌 모국어처럼 사용한다. 훗날 프린스턴 대학 같은 건물에서 포노이만은 아인슈타인과 연구생활을 했는데, 아인슈타인의 영어가 좀 버벅거리면서 독일어가 섞인 이상한(?) 영어라면 폰 노이만의 영어는 완벽하다. 둘 사이의 관계는 소문과 달리 그리 친하지 않았다. 기질은 서로 다르다. 아인슈타인이 좀 냉소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반면, 폰노이만은 파티형(?) 인간이다. 아인슈타인의 발견 과정은 천천히 끈기있게 진행된다면, 폰 노이만의 발견 과정은 집중적이고 조금은 즉흥적이다. 순식간에 문제를 찾고 집중하여 해결한다. 그리고 바로 다른 문제로 관심사를 옮긴다.
헝거리 부다페스트 출신이지만 쿤 정권을 피해 폰 노이만은 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그리고 독이에서 교육을 받았다. 쮸리히 국립 공과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화학과 수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26살의 나이로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천재성은 이때 벌써 널리 알려졌고, 괴팅겐에서 힐버트의 초청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양자역학 형식주의에 힐버트 공간을 도입한 인물은 힐버트가 아니라 폰노이만이다. 폰노이만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귀속시키려는 러셀과 회이트헤드의 시도를 냉소했고, 역시 수학의 한 이론의 무모순성을 증명체계 속에서 증명하려는 힐버트의 시도에 회의적이었다. 전자의 시도는 다수의 수학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자의 시도는 괴델의 등장으로 불가능함이 밝혀졌다.
폰 노이만은 "걔 별거 아니야"라는 식의 표현을 직설적으로 쓰는 인간형이기에 종종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폰 노이만이 자신보다 뛰어난 수학자를 들라고 하면 힐버트를 꼽는다. 힐버트와의 괴팅겐 교류는 폰 노이만과 그 당시 괴팅겐에서 유학했던 오펜하이머와의 오랜 우정을 싹트게 한 계기였다. 폰노이만이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후 원폭 개발을 위한 맨하턴 계획에 참가하게 된 동기에는 오펜하이머가 숨어있다.
이런 식으로 쓰다보면 얘기가 너무 길어진다. 생략하고 폰 노이만에게 발견되는 역설적(?)인 측면들을 모아봤다.
- 공산주의를 증오한 폰 노이만은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소련에 핵폭탄 투여를 하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했다.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이러한 나이브한 생각을 조금 반성했다고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절친한 친구 그룹의 다수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옹호자들이었다. 폰노이만은 젊은 시절 미국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했던 오펜하이머와 함께 거의 매주에 한번씩 자신의 방에서 버번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그들이 원폭 투하 후 수폭개발 계획에 반대했을 때 메카시즘에 의한 악랄한 청문회가 조직되었다. 이 때 적극적으로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선 인물은 폰노이만이었다.
- 폰 노이만은 여자란 남자의 친구가 절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노이만에게 섹스는 쾌락이 중요한 것이고 이를 위해 여성 평가의 척도는 몸매였다. 그의 첫째 부인 마리에테는 폰노이만의 친구이자 물리학자인 쿠퍼와 눈이 맞아 노이만과 이혼했다. 폰 노이만과 마리에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마리안나이다. 그녀는 엄마의 새로운 가정에서 자라다가 훗날 엄마와 아빠의 약속에 의해 폰노이만의 집으로 거쳐를 옮긴다. 폰 노이만은 그 후 30년대에 귀족적인 유부녀 클라라와 관계를 맺게된다. 그는 유럽 학회활동을 위해 돌아다니면서 클라라와 애정행각을 벌였고 결혼하여 미국으로 데려왔다.
- 폰 노이만이 마리에테와 이혼할 때 상황이 어땠을까? 복잡했을까? 전혀 아니다. 그와 마리에테 그리고 쿠퍼 사이에 삼각 관계라는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클라라도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젊은 나이에 머리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직한 노이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히틀러를 피해 도망을 가고 싶었고, 폰노이만의 도움이 필요했다. 폰 노이만도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둘은 결혼 후 이혼을 하지 않았다. 합의 하에 애도 낳지 않았다. 서로 특별한 종이라 여겼기에 역으로 함께 살기가 편했다고 한다. 폰 노이만은 거의 자지 않고 밤에 집중적으로 활동한다. 이 기간에는 부인은 완전 찬밥이다. 그러면서도 매주 사람들을 불러와 파티를 연다. 여성들이여 생각해보시라. 그대의 남편이 이 지경인데 아무리 잘나도 참기 힘들 것이다.
- 보통 기준으로 본다면 폰 노이만은 결점 투성이다. 우선 사치스럽다. 고급시계에 매년 한번씩 차를 갈아치운다. 그는 젊은 파인만에게 과학자란 세상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와 친분을 텃던 사람들은 그의 유머 감각에 놀란다. 그런데도 그의 유머가 디랙 등과 비교해 많이 남아있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의 많은 유머는 섹스와 관련되어 있다.
- 특이한 것은 페르미 부인이 밝혓듯이 많은 사람들은 폰 노이만이야 말로 스캔들 없는 무결점(?)의 사나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했으면서도, 도움이 필요할 때 나타나는 인물은 항상 폰노이만이였다고 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중 헝거리 공산주의 계열의 많은 학자를 미국으로 데려온 인물은 폰 노이만이다. 부다페스트 시절 학교 선생이 어려움에 처하자 거액을 송금하기도 했다.
폰 노이만의 일생은 온통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Dr Strangelove'로 적절히 명명했던 이러한 20세기의 천재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한가지 해결책은 그의 게임 이론에 대한 그 자신의 평가 속에서 나타난다. 폰 노이만에게 게임은 '갈등 혹은 딜레마를 내포한 상황 속의 선택' 그 자체이다. 게임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계산(computation)일 뿐 진짜 게임이 아니다. 선택에서 상황적 갈등이 적은 게임, 계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임 그래서 쉽계 계산에 의해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게임은 흥미롭지 않으며, 그런 게임일 수록 현실 세계의 실제적 측면과 거리가 멀다. 이점에서 볼 때 인간과 대등한 서양장기 컴퓨터의 출현은 무엇을 보여줄까? 서양장기 자체는 바둑보다 게임 자체가 가져야할 복잡성을 결여한 게임이다.
또 현재의 게임이론가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이들은 그저 갈등을 푸는 효과적인 전략 개발에 눈먼 자들이다. 이것은 원래 게임이론의 정신에 위배된다. 게임은 항상 현실적 모든 변수를 포함할 수 없다. 효과적 전략은 단지 특정 조건하에서만 성립한다. 철학자들은 한 술 더뜬다. 이들은 그런 전략을 가지고 무슨 주의 혹은 인간 본성이 어떻다는 등 획일화된 주장을 한다. 진정한 게임이론가와 철학자는 그런 전략이 통하지 않는 실제 조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게임이론가와 철학자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폰 노이만의 일화 1
출처 : 불명
누군가가 폰 노이만에게 물었다.
"200 마일 길이의 철로의 양쪽 끝에 각각 위치해 있는 두 대의 기차가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출발합니다. 두 기차가 출발하는 때부터 두 기차가 충돌하는 때까지 파리 한 마리가 시속 75마일의 속도로 두 기차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 합니다. 파리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입니까?"
문제를 들은 폰 노이만은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150 마일입니다."
그러자 폰 노이만에게 문제를 낸 사람은 실망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당신은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군요. 보통 사람들은 이 문제를 들으면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려고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풀게 되면 문제의 트릭에 걸린 것이며 실은 이 문제는 파리가 움직이는 시간이 2시간이라는 것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풀리지요. 당신이 이렇게 빨리 대답을한 것을 보니 당신은 이 문제를 두 번째 방법을 이용하여 풀었군요?"
그러자 폰 노이만이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었는데요."
(문제 낸 사람 기절)
폰 노이만의 일화 2
출처 : 불명
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 초창기에
개발자들은 (아무도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 개발 과정을 검증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누군가가 "폰 노이만에게 물어보자"는 의견을 내어 그를 찾아갔다.
개발자들이 폰 노이만에게 몇 개월간 연구했던 수천 페이지의 문서들과 설계도를 주고서
"몇 주 후에 오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폰 노이만은 "아, 그냥 거기 잠깐만 앉아 있어봐요" 라고 말했더니
두 시간 정도 대충 넘기면서 읽어보고는
바로 종이와 펜을 들고 개발자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은 완벽했다고.
(개발자들 기절)
폰 노이만의 일화 3
출처 : 불명
누군가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y) 소장이었던 오펜하이머에게
John von Neumann (one of the founders of modern computing) was apparently renowned as much for his absent-mindedness as for his brilliance. Once he and his family decided to move. His wife, knowing how forgetful he was, started reminding him a month before the move"Now, remember, when you're coming home from work one month from today, take the A bus, not the B bus, to go to the new house." Each day she reminded him again, in similar fashion. A month went by, and moving day arrived. "Now, remember, when you're coming home from work today, take the A bus, not the B bus, to go to the new house."
Of course, after work von Neumann took the B bus as usual, and it wasn't until he arrived at his old home that he realized his mistake. Unable to remember where the new house was, he was standing in front of the old house when a little girl approached. "Excuse me, little girl," von Neumann said, "Do you happen to know where the von Neumanns have moved to?"
The little girl sighed, took his hand, and said, "Mommy said you would do this. Come on, Daddy, I'll take you home."
저런 두뇌를 포토그래피 메모리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쓰고 지우고 그리고 정리하고 최종적으로 사고능력으로 생산하는 게 가능한 두뇌. 인간 기억력의 광범위성은 영국인가 얼마전에 나온 기사에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생애 전반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까 아주 극소수이지만 돌연변이식으로 뇌의 능력이 유달리 뛰어난 인자들이 있나 봅니다.
첫댓글 아...공부하기 싫어지네..ㅋㅋㅋ
2222ㅋㅋㅋㅋ
이런글들을 볼때마다 인간의 뇌의 한계가 어딘지 궁금해지는군요. 머리 회전이 빠른사람과 느린사람의 차이는 머리가 좋고 나쁘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뇌를 얼마나 '더' 사용 하는가에 따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만화영화보면 꼭 이런분들이 손가락질 받다가 제대로 삐져서 지구를 멸망시킬 최종병기를 만들던데 말이죠.
토니 스타크 인가
그냥 ㄷㄷㄷ이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20세기 최고의 천재들은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 괴델, 폰노인만 정도?
저런 두뇌를 포토그래피 메모리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쓰고 지우고 그리고 정리하고 최종적으로 사고능력으로 생산하는 게 가능한 두뇌. 인간 기억력의 광범위성은 영국인가 얼마전에 나온 기사에는 30대 중반의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생애 전반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하니까 아주 극소수이지만 돌연변이식으로 뇌의 능력이 유달리 뛰어난 인자들이 있나 봅니다.
마지막 글은 실제인가요??
마지막이 대박이네요ㅋㅋㅋㅋ
마지막 글이 제일 재미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5살에 논문 10개....
마지막 글에선 진한 부성애가 느껴지네요.
마지막 ㅋㅋㅋㅋ
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 대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8퍼센트 발언이 가장 후덜덜하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