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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영토(領土)의 로지(鹵地)와 광막지지(廣漠之地)
2024년 10월 17일
○ 우선(于先), 회원(會員) 여러분, 또 손님으로 들리셨다가 이 글을 읽게 든 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곧 “한글 해설서(解說書)”에서 말하는 조선(朝鮮) 영토(領土)【동이(東夷), 구이(九夷)를 포함(包含)한 상고대(上古代)로부터 현(現) 대한민국(大韓民國)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조선(朝鮮)과 한민족(韓民族) 계열(系列) 모두를 총칭(總稱)한다】안(內)에는 “로지(鹵地)”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로지(鹵地)』란, 바닷가가 아닌 내륙(內陸)의 땅에 소금기(鹽分)가 많아 농사(農事)를 지을 수가 없어 토착민(土着民)들은 가축(家畜)을 이끌며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며 살아가는 유목(遊牧), 이목(移牧) 부족(部族)들이 사는 땅을 말한다.』
이런 「로지(鹵地)」는, 산악지대(山岳地帶)에서는 지하(地下)에서 소금(鹵)이 산출(産出)되며, 사막지대(沙漠地帶) 또는 광막지지(廣漠之地)에서는 소금(鹵)이 표층(表層)으로 노출(露出)되어 농사(農事)를 지을 수가 없는 최악(最惡)의 환경(環境)에 이르게 된다.
➊ 이와 같은 “로지(鹵地)”가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인 요녕성(遼寧省) 땅에 있을까? 있었을까?
“한글 해설서(解說書) 조선사(朝鮮史)”에서는, 최대(最大) 강역처(疆域處)가 심양(瀋陽) 서(西)쪽을 흐르는 “요수(遼水)”에 한계(限界)하고 있다.
➋ 이와 같은 영토(領土) 안(內)에 :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로지(鹵地)”와 “광막지지(廣漠之地)”라고 불릴만한 곳이 있느냐?」 하는 질문(質問)이다.
예(例)를 들면 : 「고구려(高駒驪)를 세운 주몽(朱蒙)【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해설(解說)하고 있지만 동일인(同一人)지는 알 수 없다.】은, 소금 광산(鑛山)을 차지하여 건국(建國)의 기초(基礎)를 삼았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설명(說明)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든 구전(口傳)되는 설화(說話)이든 ‘소금(鹽)을 캐내는 광산(鑛山)’이 있었음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그곳이 어딘가? 흔적(痕迹)은? 정황(情況)은? 「없다」라는 것이 정확(正確)한 표현이다. 더더구나 한반도(韓半島) 땅 어디에도 ‘소금(鹽)을 캐는 광산(鑛山)’은 없다.
➌ ‘로지(鹵地)’는 땅에 ‘로분(鹵分)=염분(鹽分)’이 많아 농사(農事)를 지을 수 없어 가축(家畜)들과 함께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며 살아가는 유목(遊牧), 이목(移牧) 족(族)들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西)쪽 땅에 있다. 요녕성(遼寧省)이나 한반도(韓半島) 등지(等地)에서는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장춘몽(一場春夢)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➍ ‘로지(鹵地) 내(內)’의 지하(地下)에서 산출(産出)되는 것이 소위(所謂) “암염(巖鹽)”이며, “소금 광산(鑛山)”이다. 이러한 암염(巖鹽)이 산출(産出)되는 땅은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西)쪽 내륙지방(內陸地方), 서장(西藏)【티베트 : Tibet】, 동구라파(東歐羅巴)의 폴란드[Poland] 등지(等地)가 유명(有名)하다.
「로(鹵) 땅(地)」이 어떤 곳인지를 알면 : 아래의 글을 이해(理解)할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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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록(北京錄)의 저자(著者)인 ‘무관(武官)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는 AD 1,826년 연행기록(燕行記錄)에서 말하기를 : 『北京錄, 山川風俗總錄 : 自渡江, 至北京, 地皆沙。: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부터 북경(北京)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沙)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高麗) 말(末)로부터 고황제(高皇帝)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초기(初期), 중기(中期), 말(末)까지에 이르기까지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기록(記錄)한 것들과 똑같은 내용으로, “AD 1,826년까지도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라는 것을 확인(確認)시켜주고 있다.
‘AD 1,826’ 년(年)【북경록(北京錄)】의 사막(沙漠)의 땅이, 1,910년(年) 경(頃)에는 아름다운 옥토(沃土)가 되었다? 이걸 믿는다면 우리는 인간(人間) 무리가 아닌 먼 외계(外界)에서 온 외계인(外界人)이 분명(分明)하다 할 것이다.
➎ 이곳 “로지(鹵地)”는,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북방지대(北方地帶)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서방지대(西方地帶)와 그 접경지대(接境地帶)를 지칭(指稱)하고 있다. 조선(朝鮮) 영토(領土) 서방지대(西方地帶)에는 로지(鹵地)와 더불어 광막(廣漠)한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었다」라고 필자(筆者)는 늘 주장해 왔다.
➏ 〈여러 조선사(朝鮮史)에서, 사대부(士大夫)들의 문집(文集)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고려사(高麗史)에서, 연행기록(燕行記錄)에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고전(古典) 원전(原典)인 산해경(山海經), 죽서기년(竹書紀年), 회남자(淮南子), 통전(通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등과 소위(所謂) 25사(史)라고 부르는 정사(正史)에서, 각종 시화(詩話)에서… …열거(列擧)하기조차 버거운 많은 원전(原典)의 기록(記錄) 내용(內容)으로 고증(考證)하며,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증명(證明)하기 위한 주장(主張)을 했다.〉
결론적(結論的)인 이야기지만 : “한글 해설서(解說書)”를 제외(除外)한 수많은 고전(古典)의 원전(原典) 기록(記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허구(虛構)의 사실을 만들어 놓지도 않았다. 다만 그 기록(記錄)을 보는 자(者)의 역사인식(歷史認識)에 따라 대륙(大陸)의 땅과 한반도(韓半島) 땅으로 갈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發見)하게 된다.
➐ 특히 AD 1,831年의 수사록(隨槎錄)【한필교(韓弼敎, 1807~1878)】 권4 / 문견잡지(聞見雜識) 편을 보면 : 〈몽고인(蒙古人)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머리털을 깎고 얼굴을 씻지 않는다. 용모가 건장하고 누런 옷에 누런 모자를 쓰며, 우락부락하고 사나운 모습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라고 하였는데 :
【이는 필자(筆者)가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처음 주장(主張)할 때부터 「본시(本是)의 몽고인(蒙古人)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이었다」라고 것을 일관(一貫)【일이관지(一以貫之)】되게 주장(主張)한 중요(重要)한 것 중의 하나로, 연행록(燕行錄)에서, 고전원전(古典原典)에서 이를 엄(嚴)히 검증(檢證), 고찰(考察)하여 고증(考證)한 것이다.】
〈오늘날 “몽골공화국” 대다수(大多數) 국민(國民)들의 ‘형상(形狀)=형상(形相)’이 「코가 높고, 눈이 깊은 색목인(色目人)들인가?〉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대다수(大多數) 국민(國民)은, 우리 한민족(韓民族)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DNA’마저 거의 유사(類似)하다.
『‘몽골공화국’은, AD 1,924년 구소련(舊蘇聯)과 코민테른의 지원(支援)으로 건국(建國)하였지만, “이곳에 본래(本來)의 몽고인(蒙古人)인 색목인(色目人)은 없다. 더불어 성길사한(成吉思汗)의 회색(灰色) 눈동자를 가진 후손(後孫)들 역시 없다.” 다만 한민족(韓民族)의 후예(後裔)들이 있을 뿐이다』 이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몽고인(蒙古人)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깊으며, 머리털을 깎고 얼굴을 씻지 않는다〉라고 기록(記錄)한 것이 서력(西曆) 1,831년 연행사신(燕行使臣)의 타각군관(打角軍官) 자격(資格)으로 참여(參與)한「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 수사록(隨槎錄)】」의 연행(燕行) 기록(記錄)이다.
기막힌 이야기다. ‘대한민국(大韓民國)과 북한(北韓)’에 살고 있는 ‘한민족(韓民族)=조선족(朝鮮族)’에게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과연(果然) 무엇일까?
나의 것일까? 남의 것일까? 꼭 한번 묻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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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토(朝鮮領土) 내(內), 로지(鹵地)와 광막지지(廣漠之地)
(1) 「鹵地, 地不生物斥 : 로(鹵) 땅은, 그 땅이 만물(萬物)이 자라지 못한다」라고 한 곳이다.
이러한 곳에 「“래산(萊山)이 있고, 이 산(山)을 의지(依支)해 래이(萊夷)들이 살았다」라고 한 곳이다.
「래이(萊夷)는 우이(嵎夷)요, 동이(東夷)이자, 구이(九夷)중의 하나」
「래주(萊州)는, 래이(萊夷)들의 땅이고, 래산(萊山)에 살던 자(者)들이며, 이곳 땅은 소금기【鹵 : 西方鹽地 鹵 자(字)로, ‘地不生物斥’라고 하였다.】가 많아 농사(農事)를 지을 수 없으며, 축목(畜牧)을 업(業)으로 살아가는 곳」이라고 했다.
➊ 「래이(萊夷)」들이 의지(依支)하며 살던 「래산(萊山)」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바닷가에 있을까? 이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헛소리다.
산해경(山海經) 서산경(西山經)을 보면 : 〈西山經華山之首, 曰錢來之山, 其上多松, 中略. 山海經 第二 西山經 : 凡西經之首, 自錢來之山至于騩山, 凡十九山, 二千九百五十七里. 華山冢也. 中略. 山海經 第二 西山經 : 又西三百五十里, 曰萊山, 其木多檀楮, 其鳥多羅羅, 是食人. 中略. 山海經 第二 西山經 : 凡西次二經之首, 自鈐山至于萊山, 凡十七山, 四千一百四十里, 中略. : 서산경(西山經)의 시작(始作)은 화산(華山)으로부터다. 서산경(西山經) 1의 서경지수(西經之首)는 전래산(錢來山 : 화산(華山))으로부터 괴산(騩山)까지 19개 산(山)에 2,957리요, 서산경(西山經) 2의 서차이경지수(西次二經之首)는 영산(鈴山)으로부터 래산(萊山)까지 17개 산에 4,140리다〉라고 하였다.
즉(卽), 「화산(華山)=전래산(錢來山)으로부터 ‘래산(萊山)’까지는 약 7,097리」인 셈이다. 화산(華山)으로부터 약(約) 7,097리(里) 서(西)쪽에 “래산(萊山)”이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장안(長安)으로부터 약(約) 7,100리 떨어진 곳에 “래산(萊山)”이 있다」라는 것이며, 이곳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고창(高昌)·오노목제(烏魯木齊)·언기(焉耆)·구자(龜茲) 등지(等地)』이며, 이곳은 「타클라마칸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북방(北方) 인접지대(隣接地帶)로,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쭉 뻗어있는 곳이다.」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焉耆, 中略. 在白山之南七十里, 去長安七千三百里. 中略. 皆沙磧. 其國近海水, 多魚鹽蒲葦之利 : 언기(焉耆)는 백산(白山)의 남(南)쪽 7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7,300리 떨어져 있다. 모든 땅이 사적지대(沙磧地帶)로, 가까이에는 해수(海水)가 있어, 물고기와 소금과 포위(蒲葦)의 이득이 있다.」라고 하였다.
➨ 이런 곳 즉(卽) 「천산산맥(天山山脈)의 한 봉우리가 래산(萊山)」이 되며, 이 “래산(萊山)에 의지(依支)하며 유목(遊牧), 축목(畜牧)을 하며 살아가던 구이(九夷)” 중의 하나였던 “래이(萊夷)”들의 나라가 “래산국(萊山國)”이었다.
이들 〈“래이(萊夷)”들이 더 살기 좋은 동(東)쪽으로 이주(移住)하면서 그 이름 역시(亦是) “래이(萊夷) ➝ 우이(于夷) ➝ 욱이(郁夷) ➝ 우이(嵎夷)”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라는 것을 자연(自然)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점차(漸次) 동(東)쪽으로 이동(移動)하며 살았다는 그 증거(證據)들이 바로 많은 사서(史書)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內容)들이다.
즉(卽) 「래이(萊夷)」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천산(天山) 접경(接境)에 있었던 “래산(萊山)”에서 축목(畜牧)으로 이어가다가 양곡(陽谷) 곧 해 뜨는 동(東)쪽을 향해 이동(移動)했으며, 언제 정착(定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땅까지 와 정착(定着)하였는데, 그때의 증거(證據)가 바로 “욱이현(郁夷縣)”이다.
「래이(萊夷)」는, 「욱이(郁夷)」로 불리게 되고, 그들이 집단(集團)으로 살던 곳이 곧「욱이현(郁夷縣)이 되었고, 이 현(縣)은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속현(屬縣)으로 있었다」라는 것이 곧 그 증거(證據)다.
또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任命)되었다」라고 한 것인데, 이때의 “우이(嵎夷)”는, 한반도(韓半島)와는 “십 원 한 장”의 관계(關係)도 없는 것이다.
➋ 「우공추지(禹貢錐指) 卷 04」에서는 :
【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으로, 요(堯) 임금 때 9년 동안 홍수가 나서 신하 곤(鯀)에게 명하여 다스리도록 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고, 순(舜) 임금에 이르러 곤의 아들 우(禹)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니, 우는 9주를 순시하여 산천을 측량하고 강을 다스려 9주의 경계를 바르게 하여 10년간에 공을 이루었는데, 이 우공편은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地理書)라 할 수 있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한시어사전】
우공(禹貢) : 우(禹)임금 때라면 BC 2,200년(年) 경(頃)에 저술(著述)된 지리서(地理書)라는 이야기로, “4,200여(餘)” 년(年) 전(前)의 지리서(地理書)다.
〈萊夷作牧. 釋文:萊音來. 牧, 徐音目, 一音茂. : 래이(萊夷)는 축목(畜牧)한다. 석문(釋文)에 : 래(萊) 음(音)은 래(來)이고, 목(牧)은, 서(徐)의 음은 목(目)인데 한 음은 무(茂)이다〉
〈顏氏曰:萊夷, 萊山之夷也. : 안씨[顔氏:顏師古]가 이르기를 :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의 이(夷)라고 하였다〉
〈吳氏曰:作, 謂耕作;牧, 謂放牧, 夷人以耕牧為業也. : 오씨(吳氏)는 : 작(作)은, 경작(耕作)이고 : 목(牧)은, 방목(放牧)이다. 이인(夷人)들은 경목(耕牧)이 일(業)이라고 하였다〉
〈孔傳雲:萊夷, 地名, 可以放牧. 今按:萊夷之地, 三麵瀕海, 皆為斥鹵, 五穀不生, 中間又有萊, 膠, 勞, 成, 羽, 金與, 之罘, 文登, 不其, 距艾等山及貕養澤. : 공전(孔傳)에서는 : ‘래이(萊夷)는, 지명(地名)’인데, 이는 방목(放牧)이 옳다고 하였다. 래이(萊夷)의 땅은, 삼면(三面)이 바닷가[河]에 임해 있으며, 모든 땅에는 소금기가 있어,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는다. 중간(中間)에 또 래주(萊)·교주(膠)·노주(勞)·성(成)·우(羽)·금여(金與)·지부(之罘)·문등(文登)·불기(不其)·거애(距艾) 등과 산(山)과 해양택(貕養澤)이 있다〉라고 하였다.
➨ ‘호위우공(胡謂禹貢)’에서는 : 《今登州, 萊州之地, 皆禹貢萊州之地, 三面濱海, 皆爲斥鹵, 五穀不生, 中略, 亦稱萊子國. : 등주(登州), 래주(萊州)의 땅은, 모두 우공(禹貢) 래주(萊州)의 땅이다. 삼면(三面)이 바다(海 : 河)에 붙어있는데, 모두 소금【鹵 : 서방(西方) 소금로(鹵)】기가 많은 땅으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한다. 중략(中略). 또한 래자국(萊子國)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대목은 원문(原文) 중의 「척로(斥鹵)」이다. 「로(鹵)」자(字)는 : 『서방(西方) 염지(鹽池) 로(鹵)』 자(字)이다.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래주(萊州), 등주(登州)의 땅이 서방(西方)의 염지(鹽池) 땅인가? 아마도 이러한 서방 염지 로(鹵) 자(字)가 탄생(誕生)될 수천(數千) 년 전(前)의 래주(萊州), 등주(登州)는 바다 속에 잠겨있는 해저(海底)의 땅이었을 것이다.
➥ 「네이버 한자사전」 象形文字 / 「鹵」 : 〈塷(로)와 동자(同字). 암염을 싼 모양을 본뜸. 또는 卤(로)는 西(서)의 주문(籒文)으로 卤(로)를 제외(除外)한 글자가 소금 모양을 나타냄. 따라서 “서(西)쪽에 있는 소금밭”이라는 뜻으로 보아 지사문자(指事文字)로 보기도 함.〉
【지사문자(指事文字) : 한자(漢字) 육서(六書)의 하나. 사물(事物)의 추상적(抽象的)인 개념(槪念)을 본떠서 낱말의 뜻을 나타내는 문자(文字). 「일(一)」은 하나, 「이(二)」는 둘, 「상(上)」은 위, 「하(下)」는 아래를 가리키는 것 따위】
➨➨➨ 위의 여러 설명(說明)에서 보듯이, 「서방(西方) 염지(鹽池) 로(鹵), 래이(萊夷)와 목(牧)」을 함께 해설(解說)하면 :
『서방(西方) 땅의 척박한 염분(鹵)이 많은 땅에서, 畜牧(축목)을 생(生)으로 하고, 래산(萊山)에 의탁(依託)해 살았던 동이(東夷)들을 말하는 것이고, 구이(九夷)중의 하나를 일컫는 말이고, 이들을 가리켜 “래이(萊夷)”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이들 래이(萊夷)는, “래이(萊夷) ➝ 우이(于夷) ➝ 욱이(郁夷) ➝ 우이(嵎夷)”등으로 전음(轉音) 또는 별칭(別稱), 이칭(異稱)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신라(新羅)의 김춘추(金春秋)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任命)된 것을 보면 : ‘서력(西曆) 660년’경에도 “우이(嵎夷)”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지명(地名)과 함께 사용(使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는 ‘청주(靑州)나 서주(徐州)’는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땅이 아니라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즉 『청주(靑州)나 서주(徐州)는, 요서(遼西)의 서(西)쪽 땅에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즉(卽), ‘청주(靑州)나 서주(徐州)’에 ‘래이(萊夷)’가 있었다고 하였는바, 『래이(萊夷)는 곧 우이(嵎夷)』라고 하는데,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에 의지(依支)하여 축목(畜牧)으로 살아가는 유목민(遊牧民)”들을 말하는 것이고【尚書記載, 萊夷居住在青州. 馬融認為, 居住在海濱的萊夷, 稱嵎夷. 顏師古認為他們居住在萊山下, 以畜牧為生.】‘래산(萊山)’은 ‘7,100리(里)’ 서(西)쪽에 있었던 산(山)이란 것을 위의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이를 확인(確因)할 수 있다.
➨ 「등주(登州), 래주(萊州), 청주(靑州), 서주(徐州)」는, 오늘날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을 수 없는 지명(地名)들이다.
더하여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의히면 : 〈堯命義仲居郁夷 : 요(堯)의 명(命)으로 희중(羲仲)이 욱이(郁夷)에서 살았다. 嵎夷, 今文尙書及帝命驗竝作. 禺銕, 在遼西. 銕古夷字也 우이(嵎夷)는 금문상서(今文尙書)와 제명험(帝命驗)에 나란히,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다. 철(鐵)은 옛 이(夷)자(字) 이다〉라고 하였으니,
➨ 『우이(嵎夷)는,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요서(遼西) 땅에 “구이(九夷)중의 하나인 ‘우이(嵎夷)=욱이(郁夷)’가 있었다”』라는 것이다.
또 〈색은(索隱)은 또 말하기를 : 郁夷亦地之別名也 : 욱이(郁夷)는 또한 땅(地)의 별명(別名)이다.〉
➨ 이에 비춰보면 : 『청주(靑州)니 서주(徐州)니 래주(萊州), 등주(登州)니 하는 지명(地名)들은, 본래(本來)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의 천산(天山) 주변(周邊)의 땅으로 서서히 동천(東遷)하여, 1900년대(年代)에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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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것들은 : 위에서 말하는 고전(古典)과 상통(相通)하는 자료(資料)로 직접적(直接的)으로 연관(聯關)되는 후대(後代)의 기록(記錄)들이다. 대표적(代表的)인 몇 구절(句節)을 인용(引用)하는 것이다.
(2) 〈通鑒 : 唐高宗顯慶五年, 命蘇定萬伐百濟, 以新羅王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 是亦以東夷為嵎夷也. : 통감(通鑒) :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백제(百濟)를 치게 하고,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하였다. 본래 우이(嵎夷)는 동이(東夷)다〉라고 한 것이다.
➨『우이(嵎夷)』 : 〈우이(嵎夷)=우이(隅夷)=우이(于夷)=양이(陽夷)=욱이(郁夷)〉는, 『땅의 이름이다(地名), 우이(嵎夷)는, 또한 동방(東方) 구이(九夷)중의 하나인데, 곧 양이(陽夷)이며, 이곳은 해가 뜨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우이(嵎夷)의 땅은, 요서(遼西) 지방에 있다』 우이(嵎夷)는 곧 양곡(暘穀)으로 해가 떠오르면 천하(天下)가 밝아지는데, 양곡(暘穀)은 우이(嵎夷)이다. 우이(嵎夷)는 요서(遼西)에 있고,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하나이며, 이곳에서 해가 떠오르면, 천하(天下)가 밝아진다〉라고 하였는데,
〈천하(天下)가 맑아진다는 말은 곧 이곳에 사는 구이(九夷)가 곧 주인(主人)이었다〉라는 뜻이다.
요서(遼西) : ‘요수(遼水)의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인데, 이곳에 구이(九夷)중의 하나인 ‘우이(嵎夷)’가 있었다고 하였다.
고전(古典) 원문(原文)과 그 고전(古典)을 풀이한 ‘주해(注解)=주해(註解)’등에서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卽), 「요서(遼西) 땅에 양이(陽夷)【우이(嵎夷)=우이(隅夷)=우이(于夷)=욱이(郁夷)】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동이(東夷)요, 구이(九夷)중의 하나다」라고 하였다.
➨ 『동방(東方)』이란 서방(西方)과 대칭(對稱)되는 말로, 동(東)쪽과 서(西)쪽을 가르는 “중심선(中心線)”의 동(東)쪽 땅을 “동방(東方)”이라 하고,
‘기준(基準)’이 되는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을… …
➊ 총령(葱嶺)을 기준(基準) 하든,
➋ 우랄산맥(Ural, 山脈)을 기준(基準) 하든,
➌ 흑해(黑海)나 지중해(地中海)를 기준(基準) 하듯 똑같은 경우(境遇)에 해당(該當)되며, 그곳은 분명히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땅이기 때문이다.
즉(卽) 『동방(東方)』이란 : 서토(西土)와 동토(凍土)를 가르는 곳【중심(中心) 또는 기준점(基準點) 즉(卽) 천하(天下)의 중심지(中心地)】의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이고, 고전(古典)에서는 “총령(葱嶺) 동(東)쪽을 동방(東方)”이라고 하였고, 그곳 동방(東方)에 “중화(中華)”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를 부정(否定)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중화(中華)와 동방(東方)은 같은 의미(意味)이고, 이는 조선(朝鮮)과 똑같은 뜻이다』 이게 바로 사실(史實)【역사(歷史)에 실제(實際)로 있는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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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後漢書 卷 11 . 劉玄劉盆子列傳第 1 :
〈中略. 大司徒鄧禹時在長安, 遣兵擊之於郁夷, 反為所敗, 禹乃出之雲陽. 九月, 赤眉復入長安, 止桂宮. 注 : 郁夷 : 郁夷, 縣, 屬右扶風也. : 후한서(後漢書)11 유현유분자열전1 : 대사도(大司徒) 등우(鄧禹)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병사를 보내 욱이(郁夷)를 쳤으나, 반대로 패하였는바, 등우(鄧禹)는 이에 운양을 나왔다. 9월, 적미(赤眉)가 다시 장안(長安)에 들어와, 계궁(桂宮)에 머물렀다. 주(注) : 욱이(郁夷) : 욱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右扶風)에 속했다.〉라고 하였다.
「注 : 郁 夷 : 郁 夷, 縣, 屬 右 扶 風 也. : 주(注) : 욱이(郁夷) : 욱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右扶風)에 속했다」라고 하였으니, 「욱이(郁夷)는 상서(尙書)에서 우이(嵎夷)[郁 夷, 尙 書 作 嵎 夷]」라고 하였다.
「욱이(郁夷)는 곧 우이(嵎夷)」라는 뜻이다.
◆ 〈욱이(郁夷)는 우이(嵎夷)며, 우이(于夷)이며, 구이(九夷)의 하나라고 했으며, 구이(九夷)는 동이(東夷)이고, 동이(東夷)는 곧 한(韓)이요, 삼한(三韓)이며, 삼한(三韓)을 모두 하나로 하니 고려(高麗)가 되었고, 뒤를 이어 조선(朝鮮)이 된 것이다〉
「동이(東夷) ➝구이(九夷) ➝한(韓) ➝고려(高麗) ➝조선(朝鮮)」이 된 것이다. 구이(九夷)의 하나인 “우이(嵎夷)=양이(陽夷)”【래이(萊夷)=우이(于夷)=욱이(郁夷)=우이(嵎夷)】는 : 「서(西)쪽의 천산(天山) 갈래의 “래산(萊山)”으로부터 유래(由來)하며, 이들이 동진(東進)하여 장안(長安) 서(西)쪽 땅인 우부풍(右扶風)에 정착(定着)할 때는 “욱이(郁夷)”로 불려졌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안(長安)」은 누구의 도회지(都會地)였겠는가? 당연(當然)히 구이(九夷)들이 건설(建設)한 고을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이(九夷)가 한반도(韓半島)에서 유래(由來)한다는 말은 어떻게 믿으라는 이야긴가? 이건 미친놈들의 미친 헛소리다.
곧 「“욱이현(郁夷縣)”은 “우부풍(右扶風)”에 속(屬)해 있는 현(縣)」이라 하였으니, 위에서 사가(史家)들이 주해(註解)한 『“동방(東方)”이란 곧 “대륙(大陸)의 땅”』 을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確實)한 것이다.
「우부풍(右扶風)」은, “경사(京師 : 長安)”를 수호(守護)하는 서(西)쪽의 요충지(要衝地) 땅으로, 이곳은 삼보(三輔) 중의 하나다. 서(西)쪽 이민족(異民族)들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에 대비(對備), 정예병(精銳兵)들이 주둔(駐屯)하고 있던 곳이다.
“우부풍(右扶風)”은, 기산(岐山)의 동남(東南)쪽 위수(渭水)의 북(北)쪽에 있으며, 장안(長安)에서 함양(咸陽), 무공(武 功), 우부풍(右扶風), 봉상(鳳翔), 보계(寶鷄) 등을 거쳐 하서회랑(河西回廊) 쪽으로 가게 된다.
➨ 많은 ‘학자’들은 말하기를 : 『동이(東夷) 즉(卽) 구이(九夷)는 동방(東方)에 있다』라는 것이고, 『그곳은 해가 뜨는 양곡(暘谷)=양곡(陽谷)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反對)로 『서방(西方)은 해(太陽)가 지는 곳이다』 라고 한 것이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 : 《右扶風, 故秦內史, 高帝元年屬雍國, 二年更為中地郡. 九年罷, 復為內史. 武帝建元六年分為右內史, 太初元年更名主爵都尉為右扶風. : 우부풍(右扶風)은, 진(秦) 때에 내사(內史)에 속했고, 고제(高帝) 원년(元年)에는 옹국(雍國)에 속했는데, 9년에 이를 파하고, 내사(內史)로 되돌렸고, 무제(武帝) 건원(乾元) 6년에 이곳을 나누어 우내사(右內史)로 하였고, 태초(太初) 원년(元年)에 이를 바꿔 우부풍(右扶風) 도위(都尉)라고 했다. 戶二十一萬六千三百七十七, 口八十三萬六千七十. 縣二十一 : 호수(戶數) 216,377 / 인구(人口) 836,070명에, 속현(屬縣)이 21곳이다. 郁夷, 詩 「周道郁夷」. 有汧水祠. 莽曰郁平 : 시(詩)에서 「주도(周道) 욱이(郁夷)」라고 하는데, 병수사(洴水祠)가 있다. 왕망(王莽)은 욱평(郁平)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우부풍(右扶風) 한 곳의 인구(人口)만 해도 1백만(百萬) 가까운 백성(百姓)들이 살았다면 당시(當時)로 보면 한 나라(王朝)를 이루고 있었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전한서(前漢書) 주석(註釋)에서 말하기를 : 〈師古曰 : 小雅四牡之詩曰, 四牡騑騑, 周道倭遲 : 안사고(顏師古)가 이르기를 : 소아사모(小雅四牡)의 시(詩)에서 이르기를 : “사모비비(四牡騑騑),주도왜지(周道倭遲)”〉라고 하였고,
➨ 『욱이(郁夷)』에 대해서는 : 〈韓詩作郁夷字, 言使臣 乘馬行於此道 :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 『한시(韓詩)에서의 욱이(郁夷)라는 글자는, 사신(使臣)의 말에 의하면, 말을 타고 가는 이 길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욱이(郁夷)란 우이(嵎夷)」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땅의 이름(地名)이며, 곧 「욱이현(郁夷縣)이며, 다른 이름으로 우이현(嵎夷縣)」을 말하는 것이다. 「대륙(大陸)의 장안(長安) 서(西)쪽 우부풍(右扶風)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다.」 곧 요충지(要衝地) 땅이다.
한반도(韓半島)나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는, 중원대륙(中原大陸) 요충지(要衝地)에서 벌어졌던 ‘동이(東夷)들의 역사(歷史)’를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 위와 같이 선현(先賢)들의 기록(記錄)과 설명(說明)으로 볼 때, “동방(東方) 구이(九夷)”란,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넓고 넓은 동서남북(東西南北) 땅에서 살아가던 옛 종족(種族)들을 말하는 것”이며,
➤ 이를 총칭(總稱)하여 「동방(東方)의 땅에서 사는 이족(夷族)」이라고 하여 ‘동이(東夷)’라고 불렀다.”라는 것이 가장 올바른 표현(表現)이다.
‘한국사(韓國史)=조선사(朝鮮史)’의 역사전개무대(歷史展開舞臺)는, 「반도(半島) 땅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明白)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 위의 많은 글 “예(例)”를 인용(引用), 설명(說明)하였는데, 결론(結論)은 “하나로 이어지는데 바로 동방(東方)의 땅에 구이(九夷)들이 살았다”라는 것이다.
누가, 또 누가, 혹자(或者)가 상고(上考)하면, 인용(引用)하면, 이르기를, 말하기를… …하면서 염병(染病)을 떨고, 지지고 볶고, 튀기고, 삶고, 포를 뜨고, 발광(發狂)을 떨지만, 결론(結論)은 하나에 이른다.
➤ 즉(卽), 〈한민족(韓民族)인 조선족(朝鮮族)의 선조(先祖)들인 구이(九夷)들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 요충지(要衝地) 땅까지 넓게 분포(分布)되어 토착(土着)하였다〉라는 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이,
조선족(朝鮮族)이,
동이(東夷), 구이(九夷)들이 한반도(韓半島) 땅에 토착(土着), 수만(數萬) 년(年)을 살아왔다면 :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 화려(華麗) 강산(江山)이… …동서(東西) 땅이 수만리(數萬里) 광활(廣闊)한 강산(江山)으로 변할 수 있느냐?」하는 무지무식(無知無識)한 질문(質問)에 답해야 한다.
또한 “남북(南北) 땅이 수만리(數萬里)의 넓고 넓은 강산(江山)으로 변(變)할 수 있는냐? 하는 것부터 대답(對答)해줘야 한다.
자! 누가 먼저 말해 줄 수 있겠나?
◆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이 바로 ‘한민족(韓民族)=조선족(朝鮮族)’에게 반역(叛逆)을 저지른 반역자(叛逆者)들이요,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다”〉
이놈들을 어떻게 용서(容恕)할 수가 있겠는가? 이놈들이 지금에 와서 보수우파(保守右派) 속에 숨어들어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으로 그렇듯 하게 포장(包藏)해 국민(國民)들의 눈과 귀를 속이려 하고 있다.
➨ 군주(君主)를 배신(背信)하고, 반역(叛逆)을 저지른 자(者), 백성(百姓)들을 배신(背信) 한 놈, 국민(國民)들을 배신 한 자(者) 등, ‘배신자(背信者)’는 ‘배신자(背信者)’일 뿐이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일 뿐이다.
이놈들은 언제 또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고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놈들이 지금에 와서 보수우파(保守右派) 속에 숨어들어 보수우파(保守右派)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누가 이런 놈들을 신뢰하겠는가… …
인간사회(人間社會)에서 가장 비열(鄙劣)하고 추악(醜惡)한 놈들이 바로 배신자(背信者)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요, 반역자(叛逆者)들이다. 우리는 과거(過去)의 역사(歷史)에서 교훈(敎訓)을 얻어야 한다.
➤ 〈뼈를 깎는 고통(苦痛)과 가슴이 베어지는 고통(苦痛)을 받더라도 이런 놈들을 지구(地球) 끝까지, 저승 끝까지라도 가서 찾아내어,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민족(民族)의 정기(精氣)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미래세대(未來世代)를 위해서다.〉
○ 위에서 여러 가지 갈래로 설명(說明)했듯이 조선영토(朝鮮領土) 안에는 분명하게도 “로지(鹵地)와 그에 따르는 광막지지(廣漠之地)”가 있었음이 확실(確實)하다. 지세(地勢) 곧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속일 수 없으며,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왜곡(歪曲), 조작(造作)할 수 없다. 금새 탄로(綻露)가 나기 때문이다.
「로지(鹵地)와 광막지지(廣漠之地)」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이게 자연환경(自然環境)이다. 조선(朝鮮)【상고대(上古代)로부터 근대(近代)에 이르기까지의 총칭(總稱)】땅 안(內)에는 「로지(鹵地)와 광막지지(廣漠之地)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라는 것이다.
아래의 ‘왕조실록(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원전기록(原典記錄)에서 이를 재차(再次) 고증(考證)하는 것이다. 많은 기록(記錄)이 있다. 그것을 다 열거(列擧)하기에는 많은 제약(制約)이 따르므로 필자(筆者)가 전회(前回)에 설명(說明)한 것 중에서 몇 대목을 다시 인용(引用)하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 원전(原典)의 조선영토(朝鮮領土) 특색(特色)
(4) 朝鮮王朝實錄, 世祖 6年 경진(庚辰)【1,460, 天順 4年】10月 23日(乙丑) : 「御製諭咸吉道, 都節制使朴烱曰 : 함길도 도절제사 박형(朴炯)에게 유시(諭示)하시기를」
〈旣委卿以大任, 卿本知予心, 待時而用者也. 申政丞平戎之後, 虜必更生心, 此勢之必然也. : 어제(御製)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박형(朴炯)에게 유시(諭示)하시기를 : “이미 경에게 대임(大任)을 맡기었으니, 경은 본디 내 마음을 알아서 때를 기다려 쓰는 자이다. 신정승(申政丞)이 오랑캐를 평정한 뒤에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마음을 낼 것이니, 이것은 필연(必然)한 형세(形勢)이다. 今聞虜有欲侵之志, 予料以我兵力何足慮哉? 但未知卿意如何. 卿若有勇志, 則予有一言, 卿其審聽. : 지금 듣건대, 오랑개가 침노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고 하니, 내가 우리 병력을 헤아리면 어찌 족히 염려할까마는 다만 경의 뜻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경이 만일 용감한 뜻이 있다면 내가 한 마디 하겠으니, 경은 살펴들으라. 可選精兵數百數千, 迭入侵突, 或擊東西, 或軼南北, 使敵莫知所備, 期殲凶類漠北無人, 然後乃已. : 정병(精兵) 수백 수천을 뽑아서, 번갈아 들어가 침공하여, 혹은 동서(東西)를 치고 혹은 남북(南北)을 침노하여, 적(敵)으로 하여금 방비할 바를 알지 못하게 하여, 기어코, 흉한 무리를 섬멸하여 막북(漠北)에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그치라. 其間用兵節目, 予豈遙授? 卿可出氣力任意而行. 大抵善保爲上, 成功次之, 生事最下. : 그 사이에 군사 쓰는 절목(節目)은 내가 어찌 멀리서 지휘하겠는가? 경이 기력(氣力)을 내어 임의대로 행하라. 대저 잘 보전하는 것이 상(上)이 되고 성공하는 것이 다음이며, 일을 내는 것이 최하이다.》라고 하였다.
➊ 위의 글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한 구절(句節)이다.
〈可選精兵數百數千,迭入侵突,或擊東西,或軼南北,使敵莫知所備,期殲凶類漠北無人,然後乃已. : 정병(精兵) 수백 수천을 가려 뽑아, 번갈아 들어가 침공하여, 혹은 동서(東西)를 치고, 혹은 남북(南北)을 범하여, 적(敵)으로 하여금 방비할 바를 알지 못하게 하여, 기어코 흉한 무리를 섬멸하여 막북(漠北)에 사람이 없게 한, 연후에야 그치라〉라고 명(命)하셨다는 이야기다.
➋ 얼마나 잔인(殘忍)하고 무서운 말인가! 조선왕조(朝鮮王朝) 제7대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함길도(咸吉道) 도절제사(都節制使) 박형(朴炯)에게 유시(諭示)하기를 : 「정예기병(精銳騎兵) 수백(數百) 또는 수천(數千)을 선발(選拔)하여, 사막(沙漠)의 북(北)쪽인 막북(漠北) 땅으로 쳐들어가, 동서(東西)를 치고, 남북(南北)을 쳐, 오랑캐들의 정신을 쏙 빼고는, 본대(本隊)가 공격(攻擊), 섬멸(殲滅)하되, 사막(沙漠)의 북쪽 곧 막북(漠北)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한 연후(然後)에야 공격(攻擊)을 그치라」하는 어명(御命)을 내렸다는 뜻이다.
얼마나 무섭고 잔인(殘忍)한 말인가! 「막북(漠北)에 오랑캐가 살아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밟아 없애버린 뒤에야, 돌아오라」하였다는 것이다.
수많은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의 본기(本紀) 속에 이런 잔인(殘忍)하고 무서운 어명(御命)은 없었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막북(漠北)의 땅이 어딘가?」
「설마하니 ‘한반도(韓半島)’ 땅에 “막북(漠北)의 땅이 있다.”」라는 헛소리는 없으려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의 비굴(卑屈)하고 치사(恥事)하고 창피(猖披)를 모르는 자(者)들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으려니… …!
➥『막북(漠北)』 : 「큰 사막지대(沙漠地帶)【일반적(一般的)으로 대막(大漠)이라고 하는 곳이다】의 북(北)쪽 땅을 지칭(指稱)한다.」
➥➥ 그곳은 『하서회랑(河西回廊) 북(北)쪽 고비사막【Gobi, 沙漠】북(北)쪽 ➠ 천산산맥(天山山脈) 북(北)쪽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라쿰사막(沙漠)【Karakum, Desert】, 키질쿰사막(沙漠)【Kyzylkum, Desert】의 북(北)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고황제(高皇帝)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주인(主人)이었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記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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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承政院日記, 仁祖 4年 丙寅【1,626年】 4月 12日(甲申) : 「宮家의 江海收稅를 革罷할 것을 청하는 戶曹의 계(啓) : 여러 궁가(宮家)가 강해(江海)에 세금을 거두는 일을 일체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는 호조(戶曹)의 계」
〈李民宬, 以戶曹言啓曰 : 이민성(李民宬)이 호조(戶曹)의 말로 아뢰기를 : 諸宮家江海收稅, 前古所無之事, 而實當今第一弊瘼 : 여러 궁가가 강해(江海)에 세금을 거두는 것은 전고에 없던 일로서 실로 오늘날의 제일가는 폐단입니다. 令該曹査處事, 捧承傳矣。長江流去之水, 大海無邊之處, 及斥鹵廣漠之地, 不當收稅之意, 臺諫論之已詳, 本曹啓之已盡, 更無査處之事, 但當一切革罷, 以祛宿弊, 伏希睿斷。: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사해 처리하게 하라는 승전(承傳)(承傳)을 받들었는데, 물이 잘 범람하는 장강(長江)과 염분이 많은 땅(斥鹵)과 넓고 아득한(廣漠)한 지역(地)은, 세금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대간(臺諫)이 이미 상세히 논하였고 본조(本曹)에서도 이미 다 아뢰어 다시 조사해 처리할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일체 혁파하여 오래된 폐단을 제거해야 하므로 삼가 예단(睿斷)을 바랍니다. 傳曰, 知道。上殿所屬處仍存, 其餘竝革罷。: 전교하기를, “알았다. 상전(上殿)에 소속된 곳은 그대로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라.”하였다〉라고 기록(記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➊ 「해조(該曹)」 : 육조(六曹) 가운데에서 해당(該當)하는 그 조(曹)를 일컫는 말이다.
➋ 「長江流去之水 : 물이 잘 범람하는 장강(長江)」이라는 뜻인데, 「한반도(韓半島) 땅에 “장강(長江)”은 없다. “장강(長江)”은 곧 중원대륙(中原大陸)을 흐르는 강(江) 즉(卽) 장강(長江)을 말하는 것이다.
고전(古典)에서 : 강(江)은 장강(長江)을, 하(河)는 황하(黃河)를 표현(表現)하는 말이다.
【네이버 두산백과 : 장강(長江) : 전체 길이가 6,300km에 달해 중국에서 가장 길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세 번째로 긴 강이다. 중국 서부의 칭하이성[靑海省]에서 남동쪽의 상하이[上海]까지 11개의 성급(省級) 행정구역에 걸쳐 있으며, 유역 면적은 1,800,000km²에 이른다. 일찍이 중국에서 하(河)라는 글자는 황허[黄河]를 가리키고, 강(江)이라는 글자는 창장[長江]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그래서 창장[長江]의 남쪽을 강남(江南)이라고 부르고, 남부의 동해안 지역을 강동(江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창장[長江]의 상류를 진사강[金沙江], 민장[岷江] 강 등이 합류하는 그 아래 지역을 ‘천강(川江)’, 옛 형주(荆州) 지역을 지나는 창장[長江]의 중류(中流) 지역을 ‘형강(荆江)’, 그리고 그 하구(河口) 지역을 양쯔강[揚子江]이라고 불렀다. 중략(中略)】
➌ 「斥鹵廣漠之地 : 소금기(鹽分)가 많은, 넓고 넓은 아득한 땅」이라는 뜻이다.
「한반도(韓半島) 땅에는 “로(鹵)”가 산출(産出)되는 땅은 없다. 또 “로지(鹵地)”가 없으니, 넓고 넓은 아득한 땅(廣漠)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 위 구절(句節)에서 중요(重要)한 것은 ‘로(鹵)’ 자(字)인데, 이는 바다에서 산출(産出)되는 소금(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西方)에서 나는 소금」이란 뜻으로, 「서(西)쪽에 있던 소금밭을 표현(表現)했던 글자다」
곧 ‘서방(西方)=서역(西域)=서부(西部)’ 땅에는 수십만(數十萬) 년 전(前), 수만(數萬) 년 전(前)의 바다가 육지(陸地)가 되고, 지각변동(地殼變動)에 의해 바닷물이 내륙해(內陸海)를 이루게 되고, 서서히 증발(蒸發)했으나, 지하(地下)에는 그대로 남아있어 자연적(自然的)으로 분출(噴出)되기도 하고, 지하(地下)의 물을 끌어 올려 소금을 만들었는데, 바로 “鹵”가 그 소금밭을 표현(表現)한 글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나는 소금이 아니라 「서방(西方)의 육지(陸地)에서 나는 소금밭」을 말하는 것이다”】
◆ 조선왕조(朝鮮王朝) 시절(時節) 벌어졌던 「왜구(倭寇)들의 반란(叛亂)인 임란(壬亂)과 되놈(胡)들이 일으켰던 호란(胡亂)」은, 모두가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반기(叛旗)를 든 내란(內亂)이었음을 확실(確實)하게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구절(句節)이다.
즉(卽),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地)에 있었다」라는 강력(强力)한 증거(證據)요, 빼도 박도 못하는 기록(記錄)이다.
고전(古典)에 의하면 : 「래주(萊州)와 등주(登州)」는 바로 「로지(鹵地)에서 살던 유목(遊牧), 이목(移牧) 종족(種族)들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바로 「서방(西方)의 래산(萊山) 주위(周圍)에서 살아가던 부족(部族)이었다」라는 뜻이다.
➨ 그러나 ‘20세기(世紀) 초(初)에 지명(地名)이 이동(移動)’되어 : 래주(萊州)와 등주(登州)는,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바닷가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위에서 이미 설명(說明)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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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朝鮮王朝實錄, 正祖 43卷, 19年(1,795 乙卯, 乾隆 60年) 8月 18日(丙申) : 「次對。 罷守禦京廳, 陞廣州府爲留守。: 수어경청을 혁파하고 광주부를 승격시켜 유수를 두다.」
〈中略, 國初兵制亦然. 三府爲二司, 二司爲五衛, 衛有五部, 部有四統, 而宰樞十人爲摠管都副, 分釐之, 歲周則遞而已. : 나라(國) 초기의 병제(兵制) 역시 그러하였다. 3부(府)가 2사(司)로 되고 2사가 5위(衛)로 되었는데, 위에는 5부(部)를 두고 부에는 4통(統)을 두었으며 재추(宰樞) 10인이 도총관(都摠管)도 되고 부총관(副摠管)도 되었다가 1년이 되면 체차(遞差)되었을 따름이었다. 如河敬復, 黃衡, 崔潤德, 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 遠出沙漠, 梁瀚海而銘燕然. : 그런데도 가령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沙漠)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연연(燕然)의 돌에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왔다. 功在盟府, 名留簡編者, 何常髣髴於近日五營之爲, 而有是哉? : 그러나 맹부(盟府)에 공이 기록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를 보건대 어찌 근래 5영(營)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렇게 될 수가 있었겠는가. 此所以初元朝參, 問汰冗足食之策也, 首及於五營, 拈出守摠二營之存罷, 而雜議於廷臣者也. : 그래서 바로 즉위(卽位) 초기에 조참(朝參)을 행하면서 쓸데없는 것을 없애고 식량(食糧)을 풍족히 할 계책을 물어보았을 때에 맨 먼저 5영(營)을 언급하면서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2영(營)의 존폐(存廢) 문제를 끄집어내어 조정(朝廷) 신하(臣下)들에게 의논해 보도록 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➊ 「“고전번역원 DB”의 국역본(國譯本)에 따르면 :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
곧 번역(飜譯)을 제대로 하면 : 「遠出沙漠, 梁瀚海而銘燕然. : 멀리 사막(沙漠)에 출전(出戰)하여, 한해(瀚海)를 건너 연연산(燕然山)의 돌에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왔다」라는 구절(句節)이 되는데… …
➨ 「梁 瀚 海 而 銘 燕 然」 : ① 한해(瀚海)를 건너, 연연(燕然)【연연산(燕然山)을 말하는 것이다】의 돌에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왔다」라고 번역(飜譯)한 것은, 한문(漢文) 원문(原文) 그대로 번역(飜譯)한 것이요,
②「한해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中國)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라고 한 것은, “연연산(燕然山)의 돌에 기문을 새기고(銘) 왔다”라는 것을 ➨“중국(中國)으로부터 상(賞)을 받았다”라는 어이없는 말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번역(飜譯)=국역(國譯)’은 결국(結局),
「중국(中國)의 요청(要請)」으로 출정(出征)하여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정복(征服)하고 이어 한해(瀚海)를 건너, 연연산(燕然山)까지 올라 연연산(燕然山)의 돌로 기념비(紀念碑)를 세우고 그 돌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라는 이야기가 되고,
「당시(當時)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국(中國)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 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몇 글자를 임의(任意)로 번역(飜譯)해버리면 「중국(中國) 곧 천자국(天子國)이 제후국(諸侯國)이 되고,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로 변신(變身)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런 일은 조선사(朝鮮史)의 국역본(國譯本)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발견(發見)된다. 곧 제후국(諸侯國)으로 만드는 작업(作業)이다.
➋ 〈河敬復, 黃衡, 崔潤德, 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 遠出沙漠, 梁瀚海而銘燕然. :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沙漠)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연연(燕然)의 돌에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한반도(韓半島), 또는 요녕성(遼寧省) ‘요수(遼水)=요하(遼河)’ 동(東)쪽에 :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져 있고, 이곳에 한해(瀚海)와 연연산(燕然山)이 있다면 : 이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不可能)한 지형지세(地形地勢)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이란 :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열림’을 뜻하는 말이니, 천지(天地)가 창조(創造)되는 것을 뜻한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은, 한 번으로 족(足)한 것으로, 두 번째의 천지개벽(天地開闢)은 지구(地球)가 팽창(膨脹), 끝에는 폭발(爆發)하여 소멸(消滅)해 버리는 것이다.
➥ 당시(當時),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가 출정했던 사막지대(沙漠地帶), 한해(瀚海), 연연산(燕然山)은, 조선(朝鮮) 영토(領土) 안(內)에 있었다』라는 것을 직접적(直接的)으로 증거(證據)하고 있는 기록(記錄)으로 아주 소중(所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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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이나 북한(北韓) 정권(政權)이 펼치는 정책(政策) 중에서 일란성(一卵性) 쌍둥이처럼 똑같게 펴는 것은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해설(解說)”이다. 이거 하나만큼은 남북한(南北韓) 모두 철저(徹底)하게 뭉쳐져 있다.
필자(筆者)가 많은 량(量)의 게재물(揭載物)을 내놓고 설명(說明)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해(理解)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은, 「19세기(世紀)로부터 20세기(世紀) 곧 100년간(年間)의 현대사(現代史)다.」
오늘날 현대사(現代史)를 공부(工夫)하고 연구(硏究)하는 학자(學者)들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不拘)하고,
① ‘미국(美國)과 일본제국(日本帝國)’은, 한반도(韓半島)를 제물(祭物)로 무엇을 흥정(賣買)했을까? 한반도(韓半島)를 일제(日帝)의 영토(領土)로, 아니면 식민지(植民地)로 지배(支配)할 수 있는 권리(權利)를… …? 한반도(韓半島) 백성(百姓)들은 그때 무엇이었을까?
② 일본제국(日本帝國)이 패망(敗亡)하면서 철수(撤收)할 시(時), ‘미국(美國)과 일제(日帝)와 소련(蘇聯)’은 어떤 밀약(密約)과 함께 38도선을 그어 남북(南北)으로 갈라친 것일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자른 것일까? 아니면 ‘한반도(韓半島)는 본시(本是)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주인(主人) 없는 땅이었다’라는 것일까?
③ 광범위(廣範圍)한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의 목표(目標)는 무엇이었으며, 위에서 언급(言及)한 “①+②”와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가 있다. 그 이유(理由)와 연유(緣由), 원인(原因)은 무엇일까?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어디에서 최후(最後)를 맞은 것이며,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어떻게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황제(皇帝)를 칭(稱)한 것인가? 아니면 일제(日帝)와 미국(美國)의 묵인(默認) 아래 만들어진 괴뢰(傀儡) 제후(諸侯)였나?
이해(理解)될 수 있는, 이해(理解)할 수 있는 그 어떤 주장(主張)도 보고 듣질 못했다.
➨ 현대사(現代史)를 연구(硏究)하는 학자(學者)들의 능력(能力) 문제(問題)인가? 아니면 너무도 철저(徹底)하게 숨겨져 있어, 그 진실(眞實)을 캐내는 데에는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것일까?
진실(眞實)을 추구(追求)하는 것은, 조선인(朝鮮人) 또는 한국인(韓國人)의 후예(後裔)라고 자칭(自稱)하는 반도인(半島人)들의 몫이다. 과연(果然) 누가… …언제?
2024년 10월 17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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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원래 [오늘의 게재물은 '심하(深河)와 김응하'와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하나의 구절을 고증하는 과정에서 고증원문을 찾지 못해 다음에 게재하려 준비중이던 주제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 '고증원문을 찾고 있으니 며칠 내에 완성되리라 생각합니다'
회원 여러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