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살이 모두 팔자소관'이라는 말을 흔히 듣고 한다. 사람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은연중에 사주팔자는 타고 나는 것으로 일체의 모든 일은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이 깔려 있는 듯하다.
우리의 이러한 의식태도를 반영하듯 미아리 고개를 지나다보면 길 양옆으로 철학원,역술가들의 집들이 꽉 들어차 있다.이뿐 아니라 요즘 일간 신문을 펴들면 '사주,관상, 진학, 취직,택일, 궁합봅니다'라고 씌여진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인간의 삶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시나리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한다.
상훈아, 너는 어찌 생각하니?
인생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겠지. 인간의 운명을 결정론적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태도는 자신이처한 어려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팔
자소관으로 돌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태도로 일종의 자기 변명이며 나약한 의지의 표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겠지.
나는 아이들에게만 그렇게 이야기 한다.
자기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려 있다고. 운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의 진행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라고.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그런데 나는, 한 개인의 노력,의지도
그것을 가지고 성취한 결과도 그렇게 운명지어져 있었던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맥빠지겠지.
올빼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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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숙명(宿命)으로 태어나서 운명적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숙명과 운명은 사람들 각자에게 부여 된 하나의 생명 같은 것 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질 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생명처럼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마는
이 모두는 운명이란 어항 속에 스스로 들어가 허우적거리며 힘겹게 살고 잇다.
운명 속에서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오락가락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생명임이 분명하다.“기이한 운명” “피할 수 없는 운명” “네 운명,
내 운명 같을 수 없다.” “어제의 운명 오늘의 운명” “
남자의 운명, 여자의 운명” “어린이의 운명, 어른의 운명”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것이 운명이다.
운명은 잠을 잘 때도 벗어날 수도 없고, 눈을 뜨고 벗어날 수 없다.
우리 국어사전에
숙명(fate; fatality)은 날 때부터 타고 났다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정해진 운명. 정명(定命)이라고 해석 돼 있다.
운명(運命:destiny; fate)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초인간적인 위력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생각되는 신상에 닥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라고 나와 있다. 영어의 단어나 우리의 해석을 봐도 크게 구분되어지를 않는 것 같다.
족상(足相)이나 수상(手相)이나 관상(觀相) 등이 숙명이라고 말하면 틀릴까. 어느 경우에는 족상. 수상. 관상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역학이 부족해서 이의 내력은 잘 모르지만 풍월로 들으면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은 자주 듣고 산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서 숙명과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나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물길처럼 돌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도적 심리가 살며시 떠오르기에 하는 말이다.
이탈리아의 시인 아리오스토(Ariosto, 1474-1533)는
“자기 운명을 피하는 자는 드물다.”
(Rarely man escapes his destiny)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뉘앙스가 있는 말이다.
自 運 命 脫 者 稀 也에서 稀(드물다)자는 가변성 있는 말이다.
잘하면 피할 수 있고(운 좋은 일), 뒤로 넘어져 코 다치는
그런 사람의 경우 같은 뉘앙스 말이다.(운 없는 일).
피하는 경우보다는 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맹귀우목(盲龜遇木) 같은
희귀한 일이란 말이다.
맹귀우목은 열반경에 나오는 말이다.
거북이가 백년마다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희귀하게
그 넓은 바다에서 판자를 만나야 하고 그것도 고개를 들이미는 공이가 빠진 판자라니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 인간의 상상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다. “
드물다.”는 뜻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한다.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도 어렵고,
불법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비유해서 한 말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리오스토>의 말과 상반 된 말을 한 로마의 작가인
<네포스>(Nepos, Cornelius)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더 있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자기 성격에 의해 만들어진다.”
( Every man's fortune is moulded by his character.)
성격은 변화시킬 수 있고 그에 따라서 운명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격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가져올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 변화 하려는
생활을 습관적으로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변화 된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그에 적응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변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불변처럼 여겨졌던 성격도 변화를 가져오는 것과 같이
운명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는 “각자는 자기의 운명을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운명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면서
얼마든지 만들어 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네포스>와 <세르반테스>의 말을 가슴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운명의 절반은 자기 내부에 있고, 그 절반은 밖에 있다.
다만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힘주어 말했다. “용감한 자는
그의 운명을 돌려놓았다.”라고
물론 어느 사람은 자기 운명에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게 어쩌면 욕심 없이 현명하게 사는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여유로움 이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는 자로도 잴 수 없는 욕망이 가득하여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욕심이 운명을 좌우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 욕심이 많으면 죄를 짓고, 죄가 많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말 무심코 지나칠 말이 아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고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운명을 바꾼다는 말이다. 불자들의 무소유는 그냥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비운다는 것은 다시 무엇인가 채울 수 있는 공간과 여유를 갖는다는 뜻이다.
중종 때 여류시인 매창(梅窓)(1513-1550)의 시조 한 수를 보자.
“이화우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이 촌은(村隱) 유희경(柳希慶)을 사랑했는데,
서울로 가서 소식이 없는 사람의 그리움을 생각하면서 수절하다가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향금(香今--이향금 본명) 의 시조다.
(다른 사람의 시도 많이 있지만 편의상 한 수만 예로 들었음)
만남도 운명이고 이별도 운명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인의 감각으로 잠시 생각해보면 그 운명은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물론 조선시대의 여인상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도 있지만 안으로 자꾸 차오르는 감정을 다독이는 인내심도
매창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향금 시인은 영원한 이별과 영원한 재회의 사랑을 다시 할 수 있는
경우라고 본다.
그것은 무엇에 달려 있다고 보겠는가. 이 말은 운명을 바꿀 수도 있고,
체념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류시인 매창과 유희경을 설정해서 T . V 토론에 올리면
과연 어떠한 결론이 나올까 궁금하겠지만 적어도 현대 여성들의 성격이라면 지나치리만큼 적극적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랑은 회한을 풀어내버리는 경우가 되지 안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명의 창조는 마음먹기에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운명의 강에 서 있다.
망설이는 사람도 있고, 주저앉은 사람도 있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고, 무모하게 이 생각 저 생각도 않고 뛰어 드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운명의 강을 건너 가보려는 간절한 표정들 일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자.
오늘도 우리는 운명의 강 앞에 서 있다.
운명의 강을 건너기 위한 지혜를 자기 나름대로 찾고 있다.
체념보다는 집념과 의지가 운명을 바꾸는 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생각을 해 보자.
운명을 바꿔 살기 위해서다. 어제의 운명이
오늘의 운명으로 머물러 있다면 지겨워 단 하루도 살기 힘들 것이다.
운명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다.
강은 만들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다.
또 기이한 모양으로도 유도해서 흐르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이미 주어진 운명에 포기하거나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포기해 버리는 나약한 사람으로 스스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