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일
본문 : 요삼1:1-8
제목 :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요한은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요한1~3서 등 총 5권의 신약성경을 썼습니다. 그가 쓴 성경을 한 권 한 권 읽다보면 마치 주님의 손을 잡고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 요한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제자 요한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을 진실로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요한3서를 쓸 때 요한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당시 믿기 힘들 만큼 장수했던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참으로 사랑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날 동안 성실하고 신실하게 사역했던 사도 요한의 믿음의 발자취는 주님께는 영광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요한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요한의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요한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성령님 또한 동일하게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요한3서의 크고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요한3서는 요한이 아들처럼 사랑했던 제자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를 추천하기 위해(12절) 쓴 서신입니다. 즉 발신자는 90세가 넘은 고령의 사도 요한이고, 수신자는 요한이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믿음으로 성장시킨 제자 가이오입니다. 가이오는 당시 대부분의 사역자들처럼 한 작은 가정교회의 지도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스승인 요한이 보낸 사람들, 즉 선교사들을 만났을 때 그의 마음은 행복했습니다. 노령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키워냈던 영적인 스승이자 아버지인 요한의 모습은 그에게 큰 본이었고, 도전이었으며, 은혜였습니다. 가이오는 요한이 보낸 사람들을 믿음으로 영접했으며, 마치 자기의 스승 요한에게 하듯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겼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믿음의 모습입니까? 우리 교회가 그 모습을 본받아 섬김의 사역을 이어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사역이 아니겠습니까?
요한이 보낸 사람들은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한 순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 귀한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했던 거리의 설교자들을 주님께서는 참으로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고령의 설교자이며 교회의 어른으로서 사역의 강한 의지를 품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분들을 발견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하던 장소를 이단들이 차지하고 악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꾀어내는 참담한 현실이 안타깝지만 복음을 선포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귀한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해야 할 책임이 이 땅의 모든 교회에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른 신앙의 전도자들을 마주친다면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형제님, 자매님,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 응원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는 옳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선교사적 사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때로는 설교자, 때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어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고 맡기는 믿음이 절실합니다.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예수님을 잊지 맙시다. 우리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은혜가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처럼 사랑하고, 용서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고령의 사도 요한은 그의 사역의 연장을 위해 선교사들을 세워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치열한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의 사역이 끊어지지 않도록 훈련 받았던 그가 늙어서도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모습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엄숙한 비장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또한 이 귀한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땅히 선교사들의 사역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그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도 요한이 파송한 선교사들의 방문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9절에 나오는 디오드레베가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물론 교회사를 보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디오드레베는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목회자이며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그가 속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거부했고, 요한의 절실한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 요한까지 부정함으로써 당시 모든 교회들의 수장이었던 요한과 오늘날의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사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 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거스르며 괴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그리스도께 감사'를 말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우상의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오만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빳빳하게 얼굴을 쳐들고 우상처럼 서서 주님이 아닌 자기가 빛나는 일에만 급급한 그들의 모습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디오드레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많은 순수한 신앙인들의 호감을 사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 요한마저 자신보다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자기 생각만이 진리이자 참된 가르침이라고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왕도는 없습니다. 오직 종의 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삽자가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본문에 앞서 요한 1, 2, 3서가 어떤 특징으로 연결되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1서는 많은 신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대부분 평이한 문체들을 사용했으며 내용 또한 매우 보편적입니다. 신학자들은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요한1서를 함께 읽고 은혜를 나누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2서는 교회에게, 요한3서는 개인에게 쓴 편지입니다. 즉, 1서에서 3서로 갈수록 수신자의 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초점이 '우리'에서 '나'로 집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1서와 2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악한 무리들의 가르침이 교회를 뒤흔들어 놓으려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굳건히 서서 맡은 사명을 다하여 승리하라는 가르침이며, 3서는 그 가르침을 개인으로 좁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른 길에 서서 승리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1서와 2서가 설명서와 같은 이론적 가르침이라면, 3서는 그것을 적용하여 결과를 맺게 하는 실용적 가르침인 것입니다.
1절의 '장로인 나'는 요한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장로에게 항상 솔선수범하면서 길을 계획하고 사람을 교육하며 세울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오랜 시간 믿음으로 살면서 교회의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길렀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던 가이오라는 형제에게 사랑과 축복의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우리는 이 짧은 문장에서 사도요한의 마음을 한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같이 사랑했던 제자 가이오에게 축복합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은 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잘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영혼임을 강렬하면서 부드러운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네 영혼의 잘됨'의 은혜가 우리 영명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그 은혜의 의미를 요한복음 15장 1-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영혼의 잘됨'의 은혜란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잘 경작하고 관리하신 포도원에 심겨진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우리 중심에 모심으로써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 주인,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섬겨야 할 분은 바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나라에 거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영혼을 잘되게 하십니다. 가이오는 예수님을 그의 영혼에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면서 날마다 소통하고 교제하며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결국 2절 말씀은 강제나 억지가 아닌 기꺼이 순종함으로 말할 수 없는 충만한 은혜가 가이오의 사역에 항상 있기를 바라는 스승 요한의 축복이자 격려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범사'는 말 그대로 평범한 모든 일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범사가 잘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뜻합니다. 좁은 길로 가는 것,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일, 아픈 친구의 병상을 들고 예수님께로 찾아오는 일, 인생의 마지막 식사를 준비한 과부가 그것을 주의 종에게 대접하는 일 등 '범사가 잘됨'은 내 뜻과 내 고집이 아닌 예수님을 드러내는 선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몸이 건강하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조용한 헌신과 순종을 통해 그분의 거룩하신 계획을 이루어드릴 때 흘리는 땀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보화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강건하다는 것'은 나에게 주신 건강한 몸을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믿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제자 가이오에게 있기 위해 스승 요한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아들 같은 제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요삼1:5-6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가이오의 사역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그분의 사자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보내시며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사역에 자신이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일이며, 이를 통해 스승인 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신 교회의 아름다운 능력이며,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 놓은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귀한 동역자요, 성도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완성되어 참 교회로 성장하는 영명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