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이후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요식업계가 타격을 입어 집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거지요. 특히 아내는 일이 훌쩍 늘어버린 셈입니다. 그 전엔 우리 둘 먹을 것만 준비하면 됐었는데, 학교 근처에 얻어 놓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 즉 자기들의 (조금은 부모의 시선 바깥에서 방종할수도 있는)자유까지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말만한 두 아들이 먹을 것을 늘 챙겨야 했으니까요.
다행히 천성이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는, 그 늘어난 일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늘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때로 불평하지 않은 건 아니지요. 그리고 저는 나름 머리를 굴린다고 일 갔다 오면서 뭔가 사오는 일도 늘었고, 쉬는 날엔 좀 이름난 식당에 가서 음식들을 테이크아웃 해 오곤 했습니다. 요즘이야 다시 식당이 제한적으로나마 열었지만, 꽤 오랫동안 이곳의 식당들은 아예 영업을 중단하거나 테이크아웃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내는 때로 깜짝깜짝 놀랄만한 것들을 해 냈습니다. 그리고 집에 언젠가 에어프라이어가 들어오고 나서 그녀의 요리 지평은 조금 더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에어프라이어를 갖고 할 수 있는 음식들은 대부분 육류이고, 저도 이걸 활용하는 걸 좋아하지만, 결국 우리집의 식재료를 준비하는 건 아내의 몫이 더 큰지라.
일 마치고, 운동까지 마치고 나서 집에 들어오니 에어프라이어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유의 소리, 그리고 쇠가 달궈지는 듯한 특유의 냄새. 뭔가 고기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겠더군요.
"씻을거죠?" 그녀가 물어봤을 때 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가 만들어 놓은 케이크 빵 한 쪽을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샤워를 마치고 개운한 몸으로 나오자, 그녀는 접시에 폭찹 한 쪽을 담아 놓았더군요. 좋지요, 폭찹.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이후 식재료의 가격은 엄청 뛰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요리해야 하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육가공 공장들이 돌아가지 않았고, 물류 시스템이 멈췄다는 것이었습니다. 소가 사라지지 않았고, 야채들이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지만 이들을 도축 가공하거나 수확할 사람들도, 그리고 늘 왔던 운송업자들도 움직이지 못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시 지역에선 패닉 바잉이 일어났습니다. 사재기. 그건 참 평소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요. 그러나 공포라는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아무튼 고기, 계란, 야채, 심지어는 이들이 평소에 먹나 싶은 캘로즈 쌀 등에 대한 사재기가 일어나면서 대형 마켓들은 1인당 구매 제한을 걸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제약이 걸리자 사람들은 가족까지 동원해 평소에 안 사던 것들을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사람들이 그렇게 화장실 휴지에 집착하나 하는 것이었고.
그러나 우리 가족도 그런 인간들의 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쇠고기 값은 폭등해서 이 가격엔 차라리 안 먹겠다 싶을 정도였고, 대안으로 눈에 뜨인 것이 돼지고기였습니다. 게다가, 코스트코에서 사는 돼지고기들은 품질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집에 삼겹살이 조금 쌓이다가, 그게 떨어지지 목살이, 어깻살이, 그리고 로스트용 폭찹 부위들이 우리집 냉동고에 들어차기 시작한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우리 가족은 그때 사 놓은 고기들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실감하게 됐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적지 않은 미국인들도 이번에 돼지고기의 재발견을 한 듯, 적어도 유통과정에서는 거의 정상적인 이곳에서 돼지고기의 판매량, 즉 소비가 부쩍 늘었다는 뉴스가 들립니다. 아마 저희 가족처럼, 쇠고기가 너무 비정상적으로 비싸니 돼지고기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돼지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겁니다. 유튜브엔 갑자기 폭찹 레시피를 소개하는 영상들이 급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원래 아이들 아파트 살 때 쓰라고 사 놓았다가 우리가 쓰게 된 에어 프라이어라는 게 있었지요.
고기에 양념을 주로 소금과 후추로, 여기에 마늘과 향초를 얹고, 기름종이를 에어프라이어에 깐 후에 양파를 썰어 잔뜩 올려놓고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것이 아내가 준비해 준 저녁이었고, 여기에 프렌치 디종 머스타드와 발사믹 식초를 섞은 양념을 섞어 찍어먹을 소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고기를 보면 와인을 찾는 건 아마 와인쟁이의 본능일 터.
차고에서 오늘 마실 와인을 찾아 봅니다. 예전 같으면 고이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을 와인들도 차고와 옷장 여기저기 박혀 있고 심지어는 어제 캣 타워를 새로 만들어 세우느라 거실 정리를 하다 보니 대여섯병의 와인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내가 말합니다. "이젠 와인도 그냥 이렇게 막 굴리는구나." 어쩌겠습니까. 와인은 원래 그냥 마시는 술이지, 뭐 특별히 계급을 입혀 놓은 건 거품 좋아하는 사람들의 장난이었던 것을.
정석대로라면 이런 돼지고기라면 리즐링을 맞추는 게 딱이지요. 소시지, 혹은 이런 조금 짭조름하게 간한 돼지고기엔 조금은 달달한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이 딱 좋습니다. 그 싸구려라고 핍박(?)받는 화이트 진판델도 돼지고기 요리엔 괜찮게 가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이상하게 레드가 당기더군요. 그렇다면 너무 무겁지 않게, 가벼운 와인으로.
차고엔 두 상자 정도 와인이 거꾸로 꽂혀 있는 박스들이 있고, 이것저것 꺼내보다가 찾은 게 가비아노의 키얀티 클라시코입니다. 가비아노 키얀티는 종종 마셨는데, 키얀티 클라시코는 마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중적인 와인이고, 산지오베세와 멀로 같은 품종이 섞여 있지요. 그리고 클라시코엔 닭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일종의 품질보증서 같은 것이긴 하지요. 향이 좋군요. 맛은 역시 산미가 강하고 드라이합니다. 전형적인 이태리 와인입니다.
아내가 만들어 준 이 폭찹에도 잘 가는 와인입니다. 저녁을 먹으며 아이패드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런 뉴스가 뜨는군요. 이태리 와인의 굴욕이라는. 하도 와인이 팔리지 않는데다 코로나 때문에 수출길까지 막혀 재고 정리를 위해 떨이 세일을 해야 할 형편이 됐는데, 이 와인들로 손 세정제를 만든다는 계획이 나왔다는 거지요. 저는 이 기사를 다 믿진 않습니다. 누가 사시카이아라던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같은 걸로 손 세정제를 만들겠습니까. 아마 이태리 전역에 넘치고 넘치는 동네 와인들을 말하는 거겠지요. 기자가 와인을 잘 몰랐던 듯 합니다.
인간들은 와인에 거품을 불어 넣어 돈을 챙겼고, 그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특히 중국의 신흥 부자들)이 그 거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가격을 더 키워놓고 더 큰 거품을 만들어 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거품이 터지고 나자, 이제 와인들은 손 세정제가 될 운명이라는군요. 어쩌면 그것이 '인간을 더 구하는' 것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거품을 만들어 낼 때까지의 과정은 결국 우리의 삶을 옥죄고, 또 바꾸고 있군요. 인간의 탐욕은 지구를 망쳤고, 그러다가 이렇게 부메랑을 맞게 됐습니다. 인류의 삶의 양식을 파멸로 몰아넣은 건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 병쯤 마셨을까. 이젠 됐다 싶었습니다. 반주로는 딱 좋은 양. 알딸딸하더군요. 아내도 마셔보고는 향은 참 좋은데 산미가 강하고 너무 드라이하다고 합니다. 뭐, 그게 이태리 와인의 특징이긴 하겠지요. 미국 와인의 풍성함에 길들여지면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야 원래도 그렇긴 했지만, 앞으로도 와인은 식당이 아니라 이렇게 집에서 즐기게 되겠지요. 어쩌면 오늘 마신 가비아노의 끼얀티 클라시코도, 지금 재고가 있다면 손 세정제가 되어 사람들을 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 와인을 입 안에 부어 입과 코를 헹구고 소화기를 소독시킨 셈일까요.
아마 오랫동안, 우리는 과거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진 못할 겁니다. 아니, 그렇게 돌아가선 안될 겁니다. 새로운 방식의 삶에 적응하며 지구상의 다른 생명들과 우리의 삶의 터전인 이 별 위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이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와인 한 잔과 폭찹 한 점을 즐기면서도 내 삶을 다시 돌아보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