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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아프고 슬프고 힘들었던 한 해를 끝내지도 못하고 넘겨받은채 새해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바라는 것은 희망찬 소란입니다. 어서 마무리짓고 새 길을 나서면 좋겠습니다. 과연 희망이 있는가? 하겠지만 희망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고 해냈습니다. 팍팍한 광야도 가보고 험난한 가시밭길도 가보았습니다. 지난 한 세기를 쉽게 자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자양분으로 오늘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힘이 아니라 가진 것 없는 무수한 백성의 힘으로 이뤄낸 일입니다. 아마도 이제는 우리 국민도 그만큼 성숙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 새해에
때가 되면 떠오르는 해
새삼스러울 것 없어도
새삼스러운 해
어제도 살았던 날
오늘도 사는 날
날은 날인데 다른 날
지난 슬픔 아픔 묻어두고
내 마음 활짝 열어
이 날에 새 해를 담는다.
이미 출발하였습니다. 힘차게 신나게 그리고 행복하게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25년 1월 4일 김종우 목사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역대하 15 : 7)
<1승>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할까요? 아마도 감동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스포츠 영화도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특히 현실의 삶이 무료하다 싶을 때 우리는 흔히 스포츠에 빠집니다. 삶에 활력이 생깁니다. 우리 모두가 2002 월드컵을 잊지 못합니다. 그 때의 흥분과 환희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온 국민이 그 기간 방방 뛰며 살았습니다. 마침 우리나라에서도 경기가 치러지고 있었기에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운동장 바깥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습니다. 16강을 시작으로 8강을 지날 때는 나라 전체가 말 그대로 용광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러한 경험들을 우리는 여러 번 했습니다. 하계, 동계 올림픽에서도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 한참 전에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던 때도 기억합니다. TV 중계도 없이 라디오를 듣기만 하던 때입니다. 금메달 소식에 온 국민이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홍수환 선수의 7전8기 세계챔피언 획득하던 순간은 조금 과장하여 TV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세상에, 다 진 경기라고 포기하려던 때였습니다.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또 쓰러졌다 일어나서는 케오로 상대를 물리치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감동의 순간들을 겪으며 지나왔습니다. 그런 기억이 있기에 현실을 이기고 살아갑니다.
그 감동의 승리가 있기 전에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통의 순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그것이 뒤에 오는 감동을 배가시켜주는 것이지요. 그 아픔과 인내의 시간이 있기에 찾아온 결과에 대하여 기쁨과 보람을 기꺼이 누립니다. 그것은 당연한 보상이고 누려야 할 가치입니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반추하면서 제삼자인 관객들도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스포츠가 제공해주는 기쁨입니다. 선수들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 때로는 온 국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유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쁨도 배가됩니다.
다른 것들도 그렇겠지만 경쟁에서 이긴다면 이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패배한다면 역시 패배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확대하면 전쟁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이기고 싶다면 그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 노력도 없이 그냥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것은 로또 당첨하는 경우보다도 더 비합리적입니다. 전쟁에서는 지휘관이 경기에서는 팀을 책임지고 있는 감독이 그런 점들을 파악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구성원들이 그 이유에 동의하고 따라야 합니다. 함께 해결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면 바라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일단은 참여하는 선수들의 기본 실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전혀 실력도 없는 사람이 경기에 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뛸 수도 없는 사람이 축구나 농구 경기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물론 팀별로 그리고 선수별로 실력에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고 배워서 향상시켜주어야 합니다. 서로 실력이 비등하다면 그 다음 문제는 무엇일까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라면 팀 전체의 화합입니다. 선수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치르는 경기라면 서로가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행여 팀 안에 비협력자가 껴있다면 오히려 방해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없느니만 못하겠지요.
전쟁에서 전술 전략이 중요한 것처럼 경기에서도 작전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병사들로 구성이 되고 최신무기로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작전이 잘못되었다면 그 아까운 병사들과 무기들을 허무하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예들은 세계 전쟁사에서 자주 본 것들입니다. 월등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도 지휘관의 작전이나 전략이 상대방만 못하다면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군사력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기막힌 전술로 수십 배나 되는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보이는 군세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승, 그저 단순한 1승이 아닙니다. 제 인생의 일승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닥치는 일들에 승리를 위한 첫걸음이란 뜻입니다.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고 하지요. 그 한 번이 있어야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연패 속에서 일구어내는 일승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일승이 중요합니다. 그 일승이 다음 경기의 승리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일단 패배의식부터 없애야 합니다.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안 된다고 하는데 되려고 애쓰겠습니까? 노력 자체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부터 바꾸자,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일궈낸 1승은 우승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기에 감동입니다. 영화 ‘1승’(One Win)을 보았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은
청년 실업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마음이 아픈 용어들도 유행했는데 여전히 유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3포세대’라고 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5포세대’라고도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압니까? ‘3포세대’는 3 가지를 포기하고 사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즉 연애포기, 결혼포기, 출산포기입니다. 이제 거기에 보태서 ‘인간관계 포기’ 그리고 ‘내집포기’까지 따라오게 되지요.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취업의 어려움으로 빚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취업을 한다 해도 자녀 양육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나 교육문제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차라리 자식을 낳지 않고 지내는 부부도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취업이 안 되니 사람 만나서 교제하기가 어렵고 자연히 인간관계 맺으며 살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이래저래 참 어려운 세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정을 알고 보면 마음이 아프지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도 크게 개선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희망찬 새해 벽두에 웬 마음 아픈 이야기인가? 오늘 결혼 이야기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보겠습니다. 마 19 :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이런 일이 있다, 없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네도 다루기 매우 불편한 사항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옳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이야기 속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는가 보겠습니다. 4 - 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자, 이혼을 하래요, 말래요?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반박합니다. 7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모세가 어떻게 했다고요?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허락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당신이 하나님의 율법보다 높으냐? 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8 - 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혼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아니고, 왜 허락하셨답니까? 백성이 완악해서 그랬다 하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다 보면 그런 일이 있지요. 중학교 다니는 딸 녀석이 외박하겠다고 조릅니다. 엄마, 오늘밤 영희네 집에서 자고 올 게요. 안 돼. 다 큰 계집애가 어디서 외박이야? 엄마, 친구 집인데 어때요? 안 돼! 한두 번 거절합니다. 그런데 딸 녀석이 포기해요? 30분 후에 다시 와서 조릅니다. 안 돼! 30분 후에 와서 또 조릅니다. 너댓 번 그러고 나면 엄마가 뭐라고 하지요? ‘맘대로 해!’ 봐요, 엄마가 맘대로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자기 맘대로 합니다. 자 엄마가 말한 이 ‘맘대로 해’가 정말 맘대로 하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 그겁니다.
하나님이 왜 이혼을 허락하셨다고요? 본래는 그게 아닌데 백성이 하도 졸라서 할 수 없이 ‘맘대로 해’ 하신 겁니다. 사실 그것도 한 가지 이유 외에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음행을 저질렀을 때 한해서입니다. 음행은 부부 간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과 부부관계를 맺고 있다면 기존의 부부관계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경우에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마지못한 상황을 어떻게 이용합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자기 멋대로 이유를 갖다 붙여서 아내를 져버립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시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껴듭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혼자 살겠습니다. 10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다시 말해서 부부생활이 쉽다, 어렵다?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쉽게 재밌게 살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짝지어주시면서 힘들게 살라고 해요? 아니 결혼식 올리면서 어렵게 살기로 다짐합니까? 부부가 되는 사람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그게 쉽다, 어렵다? 그러니 헤어질 생각을 하는 겁니다. 헤어질 궁리하지 말고 재밌게 살 궁리를 합시다.
이제 매우 중요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다니며 천국 이야기를 한다는 소문은 들은 모양입니다. 자기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도 잘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뿐만 아니라 저기서도 영원히 살고 싶은 소망이 있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내세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보겠습니다. 마 19 :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우선 이 사람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있습니까?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 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한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쉽게 말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 잘 도와주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사기 절도 강도 등 나쁜 짓하지 않고 부모님 잘 공경해드리고 등등,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그런 수준인 줄 아십니다. 그래서 대답하십니다. 1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생명에 들어가려면 뭐하라고요? 계명을 지켜라. 다시 말해서 율법대로 살아라, 그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수준이 그것입니다. 보겠습니다. 신 4 : 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십계명을 다 강해하고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 5 :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리고 모세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떠나기 전에 당부한 것도 그것입니다. 신 32 : 45 - 47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 율법 지키며 사는 것이 허사가 아니랍니다.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니 지키고 살아라, 그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무슨 계명을 지켜야 하냐고 되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 아는 십계명을 말씀해주십니다. 마 19 : 18 - 19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이제 이 사람이 또 뭐라고 합니까? 20절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자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하지요. 참으로 대단한 청년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고 살고 있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서 못 지키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청년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켰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자 문제는 이겁니다. 율법대로 다 살았던 이 젊은이가 왜 영생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율법대로 살면 허사가 아니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지요? 율법대로 살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내가 천국 갈 수 있을까? 의심이 들면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약 1 : 6 - 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젊은이가 참 가엾지요. 율법대로 살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며 흠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데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잘못된 겁니까?
이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 19 :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첫째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해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을 다 지켰다는 이 청년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그러시죠? 그러니 계명을 지켰다고 온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율법을 다 지키며 살던 이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기에 온 것 아니겠습니까? 율법도 하나님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보겠습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 무엇일까요? 율법 곧 구약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자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율법 속에 그려놓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며 누구를 기다려야 합니까?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켜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믿고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바로 그 분이 오시면 어떻게 해야지요? 당연히 그 분에게 가야 합니다. 그 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나를 좇으라.’ 그런데 앞에 조건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좇으라고요? 다시 읽습니다. 마 19 :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내 소유를 다 팔아 남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생긴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청년이 기뻐하며 돌아갔습니까? 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왜 근심하며 돌아갔을까요? 하이고, 어떻게 모은 재물인데 이걸 다 주고 오라고요? 야 - 영생 얻기가 쉽다, 어렵다? 걱정돼요 안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세상 이야기합니까, 하늘 이야기 합니까? 그런데 이 성경이 세상 말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세상 이야기로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늘 이야기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알아듣도록 세상 말로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세상 말로 말씀하시니까 듣는 하나님 백성이 또한 무슨 이야기로 듣고 있습니까? 세상 이야기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이야기 합니까, 하늘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신다고요? 그야 당연히 하늘 이야기를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 이야기로 설교하고 듣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 뜻입니까, 자기 뜻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입니까, 사람의 계명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보화를 버리면 하늘에서 보화가 생긴답니다. 일단 하늘에도 보화가 있나 싶지요. 과연 이 보화가 금은보석 보화일까요?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그 날이 와 황금길에 그의 영광 바라보며’(합동찬송가 97장, 새 찬송가 92장) 하늘에 무슨 길이 있답니까? ‘황금길’입니다. 실제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 21 :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길이 정금으로 되어 있답니다. 대단하지요? 과연 여기서 우리가 보는 그런 금일까요? 하늘에서도 제대로 살려고 한다면 보화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 갈 때에 여기서 좀 챙겨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여태 사람의 계명으로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보화가 아닌 줄 믿습니다. 그렇게 들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청년이 그렇게 들었으니 두렵고 걱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엾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따라다니며 잡아 괴롭혔습니다. 잘 아는 대로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마땅하다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80도 변하지요.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데 목숨을 겁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빌 3 :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재산입니까, 재물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자기가 여태 보석처럼 귀중하게 여겼던 율법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께 올 수 있다, 없다? 율법의 지식을 붙잡고 예수님께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히 10:1절을 보았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참 형상이 아닙니다. 그림자 따라가겠습니까, 실체를 따라가겠습니까? 여태 보물지도를 가지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보물을 차지하지는 않고 아직도 보물지도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말이 됩니까? 보물지도를 뭐하려고 가지고 다녔습니까? 보물을 찾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그리고 이제 보물을 찾았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보물지도를 가지고 좋아하고 있는 사람과 보물을 가지고 좋아하고 있는 사람과 누가 똑똑합니까? 하늘의 보물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보물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보물지도만 갖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불쌍하지요? 예수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재림 때도 마찬가지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약속,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지도입니다. 만약 다시 오셨다면 지도를 가지고 사시렵니까, 보물을 가지고 사시렵니까? 당연히 보물을 가져야지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요?
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화가 세상의 보화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금은보석 보화를 얻으려고 목숨 걸지요? 그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어디에 목숨을 걸었다고요? 사도 바울이 무엇에 목숨을 걸었다고요? 율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실체가 오셨습니다. 진짜 보화가 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싫답니다. 예수 필요 없어요. 우리는 율법만 있으면 됩니다, 하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하도 믿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여러 가지 기적도 행하십니다. 그럼에도 믿어요, 안 믿어요? 죽어도 안 믿습니다.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늘의 말씀이 곧 보화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면 생명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고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 이야기가 아니고 하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면 영생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님 곁을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걱정되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런데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요 6 : 67 - 68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에게 있는 보화가 무엇이라고요? ‘영생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하늘의 말씀을 따라가야 생명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하며 삽니까? 속된 말로 먹고살자고 그럽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죽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먹을 것 차지하려고 이 아우성을 치며 사는 겁니다. 그런데 죽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주시는 영생의 말씀을 먹으면. 희망입니까, 절망입니까? 이보다 저 소망되는 일이 있습니까?
이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어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있었으니 당연지사지요. 이제 눈앞에 그 실체가 오셨습니다. 그러니 여태 네가 보화처럼 가지고 있던 그 율법에 대한 지식을 다 버리고 나를 좇으라, 그 말입니다. 그 율법을 붙잡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엄청 부자였습니다. 그런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쉽다, 어렵다? 마 19 :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세상 부자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다 천국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을 세상 이야기로 잔뜩 가지고 있는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모두 배설물처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을 하늘복음으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나아가 지도만 가지고 신앙할 때는 끝납니다. 그 실체, 찾고있던 보물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보물을 잡으려 하지 않고 지도만 갖겠다고 고집하면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했던 유대인과 똑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실체, 보물을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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