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적이라는 나의 개념은 여기서 ‘최고의 행위’로 되어버린다. 이 행위에 비하면 여타의 인간행동이란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괴테나 셰익스피어도 이러한 거대한 열정과 높이 위에서는 한 순간도 숨쉬지 못하리라. 단테도 짜라투스트라에 비하면 단순한 하나의 신봉자에 불과할 뿐 진리를 창조하는 자가 아니며 세계 지배적 정신이 아니며 하나의 운명이 아니다. 베다의 시인들도 성직자에 불과하며 ‘짜라투스트라’의 구두끈을 풀어줄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디오니소스는 포도재배의 신이자 술(춤)의 신이다.
니체가 정식화시킨 두 유형의 시인이 있는데, 아폴로 유형과 디오니소스 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은 과도함과 지나침을 요구하지 않고, 언제, 어느 때나 아름다운 꿈과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하지만,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은 자아를 망각한 존재의 무근거 상태로서 황홀한 도취의 세계를 살아가고자 한다. 아폴로 유형의 시인들은 서사시인들이고,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들은 서정시인들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하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이 다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소외되고, 대립되고, 억압된 자연이 자기의 잃어버린 탕아蕩兒인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제전祭典을 축하하게 된다. 대지는 자기의 선물들을 보내고 암벽과 황야의 맹수들은 유순히 다가온다. 디오니소스의 수레는 꽃과 꽃다발로 지붕을 엮고 그 멍에를 끼고 표범과 호랑이가 걸어간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바꾸어 보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가득 차 먼지 속에 엎드릴 때, 상상력을 버리지 말고 움츠려 들지 말아보라. 그러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싹터 나올 것이다. 이제 노예는 자유민이다. 이제 곤궁과 자의恣意와 뻔뻔한 작태들이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한 적대적 거리를 모두가 청산해 버린다. 이제 우주조화의 복음 속에서 각자는 자기 이웃과 결합되고 화해하며 융합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마치 마야의 면사포가 갈래갈래 찢어져 신비로운 근원적 일체 앞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인간은 스스로가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임을 표명하고, 걷는 것도 말하는 법도 잊어버린 채 춤추며 허공으로 날아오르려 한다. 그가 마법에 감염된 것이 그의 몸짓에 나타난다. 이제 짐승이 말을 하고 대지는 젖과 꿀을 흘리는 것처럼 인간으로부터도 초자연적인 것의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느끼며, 그가 꿈 속에서 신들이 산책하는 것을 본 것처럼 그도 스스로 감격하여 황홀하게 헤매다닌다.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며, 그는 예술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근원적 일체의 최고의 환희의 만족을 주기 위하여, 전체 자연의 예술적 힘은 도취의 소나기 아래에 자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가장 값진 대리석이 이제 끌에 쪼여 세워지고 디오니소스적 우주예술가의 끌 소리에 맞추어 가장 고귀한 음조가 울려퍼진다. 인간은 엘레우시스 밀의密儀의 외침을 발하는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무릎을 꿇는가? 세계여, 너는 창조주를 예감하는가?”
----니체,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 유형의 시인이 짜라투스트라이고, 짜라투스트라는 인간 중의 인간인 초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아버지(신) 살해자이며, 모든 가치의 창조자이다. 그는 예언자이고, 시인이며, 종교의 창시자이며, 그 존재의 정점에서, 예술품 자체가 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춤추는 자이며, 자유 자재롭게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여 푸른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자라고 할 수가 있다.
디오니소스-짜라투스트라는 진리를 주재하며, 그가 창출해낸 진리에 비하면, 괴테도, 셰익스피어도, 단테도, 베다의 성직자들도 “단순한 하나의 신봉자일뿐” “짜라투스트라의 구두끈을 풀어줄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품 자체가 된 인간, 더 이상의 찬양이나 찬사가 필요없는 존재의 정점에 올라 서있는 인간, 자기 자신과 타인들과 세계가 하나임을 느끼고 있는 인간, 바로 이처럼 황홀한 도취의 세계에서 그 황홀함을 살고 있는 인간이 디오니소스-짜라투스트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경환 {니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