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린 딸의 어머니의 믿음
마태복음 15:21-28 10, 543, 342, 445
두로 지방에 사는 귀신들린 딸을 가진 한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며,(막7:26) 가나안 여인입니다.(22) 남편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것을 보아 이미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딸 하나만 보고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7:30에 ‘아이가 침상이 누웠다’는 말씀을 보면 스스로 일어 나거나 걷지 못하는 어린 딸인 것 같습니다. 엄마를 보고 방끗 웃으며 기쁘게 해 주어야 할 예쁜 딸이 눈동자가 이상하고 몸을 뒤틀며 이상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흉악한 귀신이 들려 매우 심각했습니다.
귀신이 들린 딸로 인해 어머니로서 삶의 소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이 말씀에서 우리의 가정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사탄으로 인하여 기쁨과 소망을 빼앗기고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신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시는 유대인들의 지경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곧 바로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셔서 우연히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거기서(유대인의 땅 게네사렛,14:34) 나가사 두로와 시돈(이방인의 땅)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라는 말씀과, 29절에 “예수께서 거기서(두로에서) 떠나사 갈릴리(유대인의 땅)”로 돌아가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니”(막7:24)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셔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이 여인만 만나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이 두로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믿고 기다렸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가나안 여인이 메시야로 믿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딸도 고쳐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른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주실 분으로 믿고 간구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시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계속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림으로 자신의 불쌍함을 비통에 찬 소리를 질렀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냉정하셨고 이 여인의 간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은 여인의 인내와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즉각 응답하시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어도 낙심하지 말고 가나안 여인처럼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보다 못해서 예수님에게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청하여 말했습니다.(23) 그 여인은 한두 번 소리 지른 것이 아니라, 귀찮을 정도로 소리 지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귀찮게 하니 빨리 쫓아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가나안 여인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아픈 가슴에 침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로 와서 절하였습니다.(25) 자기의 부르짖음이 무시당하고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에게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소리 질렀지만, 이제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절했습니다. 더욱 적극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긴가민가하는 불확실한 믿음이었다며 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예수님은 분명히 ‘다윗의 자손’이라는 믿음을 확증해 주는 행동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다르며 소리 질렀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긴급한 구조요청을 하였습니다. 무시하고 냉대를 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부르짖으며 도와달라는 간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로소 그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뜻밖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입니다.(26)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야 할 복을 개와 같은 너에게는 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개’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고백하며 부른 자신을 보고 ‘개’라고 하시는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들도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반려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떡을 개들에게 던진다’는 말씀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개가 아니라 버려진 개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가나안 여인 너에게는 복을 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여인에게는 매우 실망적이고 낙심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는 오늘의 우리의 예배요 설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설교 말씀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예배에 이와 같은 말씀을 잘하지 않습니다. 듣기 좋은 말씀만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구원받을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에서 우리의 예배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3:16) 설교는 책망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잘못과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원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주여’라고 부른 것은 ‘당신은 나의 주인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고 말씀하신 바대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양’인 자신을 찾아오신 주인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은, 구속사적으로 ‘당신은 나를 구원해 주실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옳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개와 같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의 조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가나안족속이라는 것을 시인하여 ‘옳소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옳소이다’라고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도들은 자신이 거룩한 의인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옳소이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자신을 보고 ‘개에게는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듣고,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났다면, 그 여인은 귀신들린 딸도 고침을 받을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구원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자신이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말씀을 듣고 ‘옳소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옳소이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십니다.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여인의 겸손과 인내가 조화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없는 가나안 사람임을 아는 여인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존재입니까? 주인의 상에 앉아서 떡을 먹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가나안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 먹는 개와 같이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만이라도 달라는 간구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감동된 예수님께서 더디어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적은 자로 책망하셨고(마14:31),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불신 때문에 심판의 경고하셨습니다.(마11:20-24)
그러나 유대인들이 개라고 말하는 가나안 여인은 큰 믿음이라는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서 축복하신 말씀을 믿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말씀이 선포되자 즉시 귀신들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귀신들렸던 딸이 침상에 누워서 어머니는 보고 방긋 웃으며 좋아하는 것입니다.(막7:30) 사탄 마귀에게 빼앗겼던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 여인과 고침 받은 딸이 그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딸과 함께 예수님을 잘 믿고 구원받고 행복하게 살다가 지금은 낙원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도 삶의 소망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간구합시다. 간절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응답이 없어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시험을 이깁시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탄에게 빼앗긴 행복을 찾읍시다. 큰 믿음으로 실망하지 말고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축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다가 주님의 영접을 받고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립시다.
첫댓글 복음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