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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목행동(牧杏洞)은 목수(牧水)와 행정(杏亭)에서 한 자씩 딴 동이름이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충주군(1914년)를 보면 한글로 <목수울>이라 하고 한자로 목수(牧水)라고 썼다. 당시 사람들이 <목수울>이라 부른 것이다. <목수울>은 <목수골>의 뜻이고 <목수마을 자랑비>에는 <충주목(忠州牧)의 북쪽 물가가 된다하여 목수마을이라 불려졌다>고 풀이했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충주군, 1914년>
부락명(部落名)
목수(牧水) 목수울 목행리(牧杏里),
행정(杏亭) 은행졍리 목행리(牧杏里),
미력리(美力里) 미력리 목행리(牧杏里)가 보인다.
행정(杏亭)은 큰 은행나무가 정자(亭子) 역할을 해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다. 유감스럽게도 6.25 난리통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 목행동 성당 일대다. 충주에는 정(亭) 자(字)가 들어가는 마을이름이 많다. 이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미력리(美力里)는 미륵리(彌勒里)를 획수(劃數)가 간단한 글자로 옮긴 것이다. 목행 초등학교와 한라 비발디 아파트 사이 대로변에 <목행동 미륵석불>이 있다.
<목수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자랑비, 인터넷자료>
「 목수마을 자랑비
충주목의 북쪽 물가가 된다 하여 목수마을이라 불려졌다. 마을 주위를 남한강물이 태극으로 휘돌아 감고 있어 예로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물자를 실어 나르는배 등의 통행이 끊이지 아니하는 등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연유로 장군이 헤엄쳐 살아 나왔다는 <장군소>, 남편을 잃은 여인이 원혼이 되어 왜장을 물에 수장했다는 <원수갚은 귀신바위> 등 마을앞 강물 굽이굽이 수많은 전설이 서려있다. 오늘날 국도가 인근을 지나고 목행역과 새한미디어가 마을에 위치해 있는 등 농업과 공업이 혼용된 전형적인 전원형 도시마을이다.
2003년 1월 28일 목수동민 일동 」
주민들의 소박(素朴)한 마음을 담고있는 마을자랑비(마을유래비)의 내용이 맞냐 맞지 않느냐 시비(是非)할 건 없다고 본다. 다만 이 곳 목수마을은 목행역(牧杏驛)과 가까운데 예전에 강건너 용대(龍垈)마을을 잇는 <목수나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목행역은 1956년 4월 11일 영업을 시작하여 1983년까지 충주비료공장의 화물수송을 담당했으나 2010년 11월 1일 폐쇄되어 통과하는 역이 되었다.
많은 충주시민들이 모르고 사는데, 조선시대 충주목(忠州牧)은 단양군, 청풍군, 괴산군, 영춘현, 제천현, 음성현, 연풍현을 관할하는 큰도시였다.
그리고 현 음성군 음성읍과 원남면을 제외한 지역인 소이면, 맹동면, 대소면, 삼성면, 금왕읍, 생극면, 감곡면과 괴산군 감물면, 불정면, 제천시 덕산면도 충주목(忠州牧)에 속하는 지금 충주시 행정구역보다 훨씬 큰 고을이었다.
충주목은 단순히 충주시 동지역(洞地域)을 가리키는 좁은 범위가 아닌데, 목수(牧水)라는 한자 그대로 풀이한 걸 알 수 있다. 목수(牧水)라는 한자를 뒤집으면 수목(水牧)이 되는데 목(牧)을 길목, 골목, 물목의 목(項)으로 읽으면 <물가의 길목, 즉 물목>이 된다. 이 뜻을 한자로 옮겼는데 앞뒤를 뒤집어서 목수(牧水)가 되었다고 본다.
목수(牧水)마을은 물가에 있는 마을은 맞다. 하지만 지금 코스모신소재(예전 새한미디어, 충주비료공장) 자리에 병마장(兵馬場, 경마장(競馬場)이라고도 한다)이나 마장(馬場), 목장(牧場)이 없었다면 목수(牧水)의 목(牧)은 큰의미가 없고 <길목>의 <목>을 한자로 음표기(音表記)한 거로 본다.
호서읍지(湖西邑誌) 충주목편(1871년, 고종8)을 보면 충주목에는 목장이 없다(牧場 無)고 나온다.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낸 조병로(趙秉老)가 편찬한 [충주군읍지(忠州郡邑誌) 1899년] 를 보면 제언(堤堰) 항목에 지금 쇠지울못을 금지동제(金知洞堤)
라 써났다. 쇠지울이 금지동(金知洞)이면 <울>은 <골>이란 뜻이다. 방리(坊里) 항목에 북변면(北邊面) 목수(牧水), 행정(杏亭), 미력(美力)이 나온다. 구한말이전부터 있었던 마을이다.
언어(言語)는 소리(音聲)가 우선하고 뜻(意味)이 뒤따른다. 음성(音聲) 이전에 바람과 물소리, 천둥치는 소리인 자연의 소리와 새가 지저귀고 개가 짖고 닭이 우는 동물의 소리가 먼저 있었다.
이 말은 지명(地名)풀이에 있어 한자의 뜻(漢字訓)을 올바로 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자음(漢字音)이 무얼 뜻하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자음이 우리말을 대신하거나 음이 같더라도 혹시 다른 뜻을 가지는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충남 서산(瑞山)은 서해안에 있는데 서산(西山)을 뜻이 좋은 서(瑞)자로 쓴 거로 볼 수 있다. 서(西)와 서(瑞)는 통한다. 충남 서천군(舒川郡)도 마찬가지다. 즉 음(音)이 같은 한자(漢字)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자에서 음(音)이 같은 한자는 뜻이 통(通)한다는 말이 있다.
서(西), 서(瑞), 서(舒). 만(萬)과 만(滿).
우리말 많다의 어원은 <만(萬)하다>의 줄임말 <만ㅎ다>에서 왔을 것이다. 찰 만(滿)자도 많다는 뜻이 있다.
요즘은 화폐가치가 떨어져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세뱃돈과 용돈으로 주면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다. 최소한 오만원 지폐 한 장이라도 줘야 얼굴이 펴진다. 하지만 하나부터 일만까지 다 세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27년 145일이 지나야 일만 일(一萬 日)이 된다. 그만큼 큰 수가 일만(一萬)이고 많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지명(地名)을 표기하는데 있어 이왕이면 뜻이 좋은 한자(漢字)를 골라 쓰는 예(例)가 많다. 그리고 어떤 한자가 혹 우리말 음(音)을 대신(代身)하고 있지 않나 살펴야 한다. 그러한 사례를 다음 기회에 살펴볼 것이다.
충주시 연수동(連守洞)은 연원(連原)과 동수(東守)마루에서 한 자씩 따온 동이름이다. 그런데 동수(東守)가 맞는 한자인가? <동쪽을 지키다>는 말은 수동(守東)이라 써야 한다. 이 말을 뒤집은 걸까? 동수(東守)는 동수(洞藪), 동수(東藪)로 쓸 수 있고 <동네숲>을 동수(東藪)라고 쓸 수 있다. 그리고 획수(劃數)가 적은 수(守)자를 쓸 수 있다. 옥(獄)을 획수가 간단한 옥(玉)으로 쓴 지명이 있다.
동내(洞內), 동네, 동리(東里)는 통하는 말이다. 우리말 동네는 동내(洞內)에서 온 말이다. 동산(東山)은 동네에 있는 작은산을 가리킨다.
충주 출신 <감자꽃> 시인 권태응(權泰應) 선생은 호(號)가 동천(洞泉)이다. 흔히 백운동천(白雲洞天)이니 자하동천(紫霞洞川)하는 동천(洞天)과 헷갈렸는지 [권태응 전집]에 <골짜기에 있는 샘>으로 풀이한 걸 보았다. 그냥 동네샘을 말한다. 초판에서 보았는데 고쳐졌는지 모르겠다.
괴산군 불정면(佛頂面)은 불교(佛敎)에서 유래한 게 분명하다. 음성군과 충주시 경계에 있는 가섭산(迦葉山)도 가섭존자(迦葉尊子)에서 따왔음이 분명하다. 어떤 한자(漢字)가 무슨 뜻인가 궁금하면 그 한자가 어떻게 쓰이나 살펴보면 된다. 불정(佛頂)은 부처님 정수리,육계(肉髻)를 의미하는데, 밀교(密敎)에서 많이 쓴 말이라고 한다.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 불정능엄경(佛頂楞嚴經)이 있다.
불정면 목도리(牧渡里)는 필사본 조선지지자료(1914년)를 살펴보면 목도강(牧渡江)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지형을 살펴보면 괴강(槐江)과 음성천(陰城川)이 만나 달천(達川)으로 합류(合流)하는 지점으로 예전에 나루가 두 군데나 있었다.
목도(牧渡)의 도(渡)는 도진(渡津)의 뜻으로 나루를 의미한다. 이보다 큰 의미로는 포(浦)와 항(港)이 있으나 때로 혼용(混用)하여 쓰였다고 한다. 그럼 목도(牧渡)는 무슨 의미일까? <나루의 목(項)이 되는 곳>을 한자로 옮긴 지명으로 보인다.
이 지명도 목수(牧水)처럼 앞뒤로 뒤바뀌었다. 목(牧)자도 우리말 길목, 골목, 물목의 목(項)을 음표기(音表記)했다고 봐야 한다. 목(牧)은 <칠 목>으로 <가축을 기르다>는 뜻인데, 목도(牧渡)에서는 뜻은 의미가 없고 음(音)을 따온 것이다.
한때 목장(牧場)이 있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근거는 없고 한강을 거슬러 소금배가 올라오던 내륙 포구(浦口)로 인근지역 물산(物産)이 모이는 큰시장이 열렸다 한다. 목장 운운(牧場 云云)은 우시장(牛市場)이 열린 것을 와전(訛傳)해서 말한게 아닐까?
(다만 이곳 불정면(佛頂面)과 감물면(甘勿面)은 조선시대에 충주목(忠州牧)에 속했고 불정면 목도리(牧渡里)는 충주와 괴산과 접경지(接境地)였다. 충주목으로 가는 나루터, 충주목 경계에 있는 나루터에서 목도(牧渡)와 목도강(牧渡江)이 유래했을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 1910년 측량, 1913년 제판.>
목수(牧水), 행정리(杏亭里), 미력리(美力里).
목수 옆에 가타카나로 모쿠스으, 미력리 옆에 가타카나로 민기니이로 써있다. 미력리는 미륵리(彌勒里)를 말하는데 음표기가 어색(語塞)하다.
위 지도를 보면 일제시대에 충주읍내에서 금가면을 거쳐 원주나 앙성방면을 가려면 반송나루를 거쳐야 했다. 지금 목행교(牧杏橋)는 1960년에 준공했는데 6.25때 미군(美軍)이 나무로 된 목척교(木尺橋)를 놓은게 시초(始初)라고 한다.
<목행교 자리에 있었던 목척교(1950년 ~ 1959년)>
저 멀리 다리 건너 집이 있는 곳이 운교(雲橋)다.
<목행교 준공사진, 1960년 3월 9일, 인터넷자료>
<관련 신문기사,목행교 개통식,국립중앙도서관>
4만여 군중이 모였다 한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 1915년 측량, 1916년 제판>
목수(牧水), 행정(杏亭), 미력리(美力里), 목행리(牧杏里)가 보인다. 미력리 옆에 가타카나로 미료쿠리이
로 써있다. 미력리를 제대로 표기했다. 목행리(牧杏里) 외 나머지 목수, 행정, 미력리를 괄호안에 표기한 것은 법정리(法定里)인 목행리(牧杏里)에 속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1914년 일제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실시하였는데 3차지도는 그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일제시대 지도를 보면 목수(牧水)마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걸 볼 수 있다. 1950년대말 충주비료공장(1955년 착공, 1959년 완공)이 들어서면서 목수마을도 줄어든 거로 봐야 한다. 충주비료공장 22만평 부지(敷地)로 수용(收用)된 것이다.
<충주시 목행동 일대 지도>
목행대교는 1996년 준공되었다. 이 지도는 2004년 작성된 것인데 유송나루, 반송나루도 보이나 1980년 중반이후 사라졌다.
목행대교가 둘 보이나 달벼루라 쓴 곳은 목행교이다. 그리고 목행역 안쪽에 서흥(瑞興)마을이 보이는데 6.25난리후 피난민이 정착하였다 한다.
<목행동에서 바라본 금가면 반송마을과 문산, 2018년>
지금은 중부내륙선(2021년 12월 31일 부발 충주구간 개통)이 지나 가면서 경관이 달라졌다.
<목행동 일대의 모습, 2018년>
충북선과 코스모신소재 공장이 보인다.
충북선은 1928년에 증평 ~ 충주구간이, 1956년 충주 ~ 목행구간이, 1959년 목행 ~ 봉양구간이 개통되었다. 충주비료공장은 1958년 설립하여 1959년에 완공되었으며 1983년 생산을 중단하였다. 충주 새한미디어는 1985년 충주비료공장 부지를 인수하여 1987년부터 비디오 테이프를 생산하였으나, 경영부진으로 2011년 코스모신소재로 회사이름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4년 목행동의 모습, 인터넷자료 >
<1971년 금가면 문산에서 바라본 충주비료공장>
취수탑이 보인다.
<1973년 10월 26일 제6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1961년 4월 29일 충주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장면 국무총리 일행>
<충주비료공장 사진, 인터넷자료 >
<예전 영광장례식장 뒷산에서 바라본 목행동 일대, 2026년 4월>
<목행동 공원묘원 모습, 2026년 4월>
목행동 공원묘지라 불렀고 이곳과 인연있는 충주사람이 많다.
<서흥(안골)마을, 사빅코리아 맞은편에서 찍은 사진, 2026년 4월>
한국폴리텍대학으로 가기 못미쳐 서흥(안골)마을 표지석이 서 있다. 안골마을은 전국에 숱하다.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간 마을을 가리킨다.
<목수마을 소류지, 2026년 4월>
서흥마을에 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작은 저수지이다. 조선시대 제언(堤堰)에 해당된다.
<목수마을 강변 쉼터에서 동량면쪽으로 바라본 모습, 2026년 4월>
<동량면 건잣에서 찍은 남한강 철교와 목행동일대 모습, 2026년 4월>
<목수마을에서 바라본 용대마을, 2026년 4월>
<목행동 유래비>
「 우리 목행동은 본래 충주군 북변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충주군 읍내면으로 편입되었고 목수동, 행정리, 미륵리, 기탄리 각일부를 병합하여 목수동과 행정리의 동명을 따서'목행리'라 하였으며 1956년 충주시 승격과 함께 목행동이 되어 현재에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1970년대까지는 충주비료공장이 위치하여 우리나라 공업화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현재는 충주산업단지, 충주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이 위치하여 산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희망이 있는 동으로 후세에게 널리 알리고자 목행동유래비를 세워 기념합니다. 2008년 1월 」
<중부내륙선의 모습, 2026년 4월>
시멘트를 발라 성형(成形)했으나 흉칙한 모습이다.
<오른쪽 부조>
<왼쪽 부조>
남좌여우(男左女右)의 원리에 따라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형상이다. 좌(左)가 우(右)보다 높은 지위(地位)다.
<목행동 미륵석불 모습, 2026년 4월>
목행동 목행초등학교 정문 아래에 있는 돌미륵이다. 원래는 현재 위치보다 언덕쪽으로 있었다고 한다. 목행동에 사는 충주 최씨 집안에서 세웠다고 하고 어느 무속인이 위했는데 6.25때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파손하여 강변에 버렸다고 한다. 이후 좋지 않는 일이 생겨 다시 모셨는데 얼굴 부분이 콘크리트칠이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대를 <미륵이>라고 하는 것은 이 미륵이 있기 때문이다.
<목행동 미륵리 세모골 모습, 2026년 4월>
이 일대는 지금 도로 공사중이다. 여러 중기회사의 차고지로 쓰이고 있는데 앞으로 마을이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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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 1910년 측도, 1913년 제판>
가야1,2,3리 일대가 목도리(牧渡里)가 되었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 1915년 측량, 1916년 제판>
목도리(牧渡里) 주변을 보면 나루가 두 군데 보인다. 음성천과 괴강(槐江)이 달천(達川)으로 합류(合流)하는게 보인다.
2차지도에서 금곡(金谷)이 3차지도에는 즉문리(卽文里)로 써 있다. 지문리(池文里)가 맞는 표기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에는 지문(池文)으로 나온다.
하담리(河潭里)와 지문리(池文里)가 합쳐 하문리(河文里)가 되었다. 3차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마을주민들은 지문리(紙文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2차지도에 나오는 금곡(金谷) 옆에 가타카나로 <코무시루>라 표기했다. 우리말 지명 <금실>, <쇠실>에 해당한다.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金谷)은 <쇠실>이라 불렀다. [충주지질도폭, 1965년]을 보면 대소원면 금곡리뿐 아니라 어래산(御來山)에도 철광산이 있었다.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 목도리 확대부분>
목도리(牧渡里) 중심에 ○ 는 면사무소를, 칼표시는 헌병분대지소를, 면사무소 옆 市 기호는 시장을, 뒤집은 기호는 도수장(屠獸場)을 나타낸다. 목도리와 창리(倉里)를 연결하는 다리는 목교(木橋)이고, 목도리와 이담리(鯉潭里), 이담리와 하문리(河文里)를 잇는 나루가 보인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불정면 목도리에 가야1리, 가야2리, 가야3리, 외석정리, 충주군 율지면 살미동각일부라 써있다.
위 지도를 보면 충주군 율지면 놀미동(老乙味洞)이 맞는 표기이다.
삼각형 ▲은 불정면사무소가 목도리(牧渡里)에 있음을 표시한다.
이 자료를 보면 다른 법정리(法定里, 1914년 전국적으로 행해진 행정구역 개편후 새로 생긴 리동(里洞)을 법정리동(法定里洞)이라 한다.)처럼 이웃한 곳에서 한 자씩 따온게 아니라 목도리(牧渡里)는 새로 만든 걸 알 수 있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
불정면의 여러 리(里)가 보인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
하천명(河川名) 목도강(牧渡江) 목도강 목도리(牧渡里)가 써있다.
이 자료를 보면 목도리(牧渡里)는 목도강(牧渡江)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목도리 일대를 흐르는 강을 목도강(牧渡江)이라 했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 >
부락명(部落名) 가야리(佳也里) 개실 목도리(牧渡里)라 써있다. 개실은 <강변, 갯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가야(佳也)로 음표기(音表記)했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
부락명으로 내석정 안돌우물, 외석정 밧돌우물라 썼있다. 외석정리(外石井里)가 목도리(牧渡里)에 속하게 된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
불정면의 마을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
불정면의 마을들.
개오개(介五介), 능촌(陵村)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읍지(邑誌)에 기록된 불정면 마을은 다음과 같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간행년도: 영조 35년 기묘년(己卯年)(1759년).
충원현(忠原縣)
방리(坊里)
남 불정면(南 佛頂面)
화산리(花山里), 안촌리(安村里), 문등곡(文等谷), 건야미리(乾夜味里), 가야곡(佳野谷), 지장리(智莊里), 개오개리(介五介里)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편찬시기: 정조 4년 (1780년)
충주목(忠州牧)
방리(坊里)
남 불정면(南 佛頂面)
화산리(花山里), 안촌리(安村里), 문등곡리(文等谷里), 건야미리(乾夜味里), 가야곡리(佳野谷里), 지장리(智莊里), 개오개리(介五介里)
■호구총수(戶口總數)
편찬시기: 정조 13년(1789년) 기유년식(己酉年式)
불정면(佛頂面)
화산(花山), 안촌(安村), 문등곡(文等谷), 건율(乾栗), 개야곡(介也谷), 지장리(智壯洞), 개오포(介五浦)
■호서읍지(湖西邑誌)
출간연도: 고종8년(1871년)
남 불정면(南 佛頂面)
화산리(花山里), 안촌리(安村里), 문등곡리(文等谷里), 건야미리(乾夜味里), 가야곡리(佳也谷里), 지장리(智莊里), 개오개리(介五介里)
■충주군읍지(忠州郡邑誌)
출간연도: 1870년(고종 7년)로 보기도 하고 1899년(광무 3년)으로 보기도 한다. 편의상 여기에 놓는다.
남 불정면(南 佛頂面)
사현(四峴), 외릉(外陵), 안촌(安村), 문등(文等), 건야(乾夜), 가야(佳也),지장(知庄), 개오개(介五介)
■忠淸北道 各郡邑誌
광무 2년 (1898년) 이후 작성
남 불정면 (南 佛頂面)
사현(四峴),외릉(外陵), 화산리(花山里), 안촌(安村), 문등(文等), 건야(乾夜), 가야(佳也), 지장(智莊), 개오개(介五介).
지금 목도리(牧渡里)에 해당하는 가야(佳也)를 시대순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곡(佳野谷), 가야곡리(佳野谷里), 개야곡(介也谷), 가야곡리(佳也谷里), 가야(佳也), 가야(佳也).
가야(佳也)는 가야(佳野)였는데 획수가 적은 야(也)를 썼고, 중간에 개야(介也)라 한 걸 보면 개(浦)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지명이 <개실>인데 야(野)는 들과 벌(伐)의 뜻이다. <개가 흐르는 들 혹은 벌판에 자리한 마을이란 뜻이다>. 아래 네이버 지도를 보면 목도리(牧渡里)의 지형과 부합한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 1910년 측도, 1913년 제판>
불정면 일대의 모습.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불정면 일대의 모습.
색깔이 약간 붉은 곳이 불정면 목도리이다.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지도>
불정면(佛頂面) 중심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