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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재앙-우박
출 9: 13-35
하나님께서 애굽왕과 그 백성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서 고생하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는데, 오늘은 그중에서 일곱 번째로 내리신 재앙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일곱 번째 재앙을 통해서는 세 가지를 교훈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하나님의 성실성과 하나님의 자비를 애굽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애굽은 열대인 아프리카에 속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얼음덩어리인 우박이 떨어졌다는 사실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요즘에는 그런 일이 가끔씩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기록된 우박 재앙은 단지 우박만 내린 것이 아니라 우박과 함께 불이 섞여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 이것은 우연한 기상이변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특별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섬겨왔던 신들처럼 무기력한 신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다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애굽 왕에게 알리려고 이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먹고 마시고 죄짓는 데에만 몰두하는 당시의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시어 당시의 모든 사람을 멸절하신 분입니다.(창6-9:) 그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나라를 지상에서 없애버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그들을 아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당신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과 모든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능력이나 권세를 받았으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서 선을 행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과 권세의 근원이십니다.
이사야 43:13에 보면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서 7:13-14에 보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모든 주권과 능력의 근원이십니다.
왕이나 대통령이나 권세를 맡은 사람은 자기에게 주권을 맡기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뜻과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받드는데 충성해야 합니다. 그분의 능력을 무시하고 거부할 때는 제 아무리 강한자라 할지라도 그를 꺾어 버리십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일해야 나라도 살고 자기도 삽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권세를 잡은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의 죄악을 꼬집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서 자고하고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자고" 란, 올라선다, 일어난다. 교만, 자만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제가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교만하고, 자기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자고’ 입니다. 성경이나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고’하는 바로를 혼내 주시로 결정하시고 일곱째 재앙을 내리십니다.
18절에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개국 이래로 이 같은 것이 있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불순종하는 애굽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은 그 땅에 재앙을 쏟아 부으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당할 나라도 아직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미국과 맞서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약 미사일을 발사하고 스텔스기를 발진시켜 폭탄을 퍼붓는다면 견딜 나라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박과 불을 내리게 하실 수 있고, 땅을 좌우로 아래위로 흔들어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입니다. 바닷물이 밀려와 땅을 덮어버리는 것을 해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한 사회를 심판하려 하신다면, 바닷물을 잠깐 풀어놓으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확실히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우려 했다가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땅에서 살아남을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이사실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박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출9:23, 수10:11, 시18:13, 사28:2, 겔3:11, 계8:7 등입니다. 우박은 농작물을 파괴하고, 생명체를 죽이고, 우뢰와 폭풍을 동반하며, 모든 동식물과 사람들에게 공포를 줍니다. 우리나라에도 가끔 계란만한 우박이 떨어지는 예가 있어서, 농작물을 파괴하고, 양계장의 닭도 죽은 일들이 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당시에 애굽 땅에 내린 재앙의 우박은 사람도 죽이는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18-19절을 읽어봅니다.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 이제 보내어 네 생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자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미리 친절히 경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어서 당한 뒤에는 회개고 반성이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경고해 주십니다.
그런데 20-21절에 보면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반응은 두 갈래였습니다.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는 그 종들과 생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두 가지의 태도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이 참말 같으니 대비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도 있고, 하나님은 한다 하시면 그대로 하시는 분이니, 알아서 순종하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무섭지 않으냐,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짐승과 곡식들을 모아서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들은 진노를 받을 대상이긴 했지만, 경고를 받아들였으므로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아무리 악한 죄인도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마음에 담아 두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나님이라는 신이 정말 계실까? 저 모세가 괜히 꾸며낸 것이 아닐까? 여호와가 있다고 해도 자비의 신이라는 하나님이 심판을 과연 내리실까? 나는 못 믿어,’ 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고를 마음에 담아 두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곡식을 거두지 않았고, 동물들을 들에 놔두었습니다. 아마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사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의 말씀을 사람이 지어낸 종교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전도할 때에도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믿지 않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성품이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력의 차이 때문도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성령님을 보내어서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느냐, 그 마음을 움직여 믿고 순종하게 하셨느냐 아니면 내버려 두셨느냐의 차이입니다. 성령이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22-26에 보면, 애굽에 우박이 내리게 하였고 뇌성과 불이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23절에 보면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뇌성과 우박을 보내시고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시니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박은 하늘에서 얼음덩이가 내리는 것인데, 그 덩어리의 크기에 따라서 짐승과 사람의 치사율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그냥 우박이 아니라 불이 함께 내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덩어리란 벼락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먹만 한 우박과 함께 천둥벼락이 떨어져서 짐승들이 우박에 맞아 죽고, 벼락이 떨어진 곳에 불이 붙어서 사방으로 번져갑니다. 정말 정신 차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기저기에 벼락이 떨어지고, 벼락이 떨어진 곳에는 불이 나서 옮겨 붙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번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불이 땅에 달려가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3-24절의 묘사를 보면 “여호와께서 우박을 애굽 땅에 내리시매,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애굽 전국에 그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없던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짐승과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곡식과 채소와 나무까지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앙이었습니다.
모세가 내일 이맘때에 중한 우박을 내린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을 때 듣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짐승들은 다 들에서 우박에 맞아서 죽었고, 곡식들은 다 망가졌고, 그들의 집은 벼락에 맞아 불타버리고 완전하게 망하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후회했을까요? 그 후회가 가치가 있을까요? 때늦은 후회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말씀은 현실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따라야 합니다.
2. 둘째는,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보호하시며,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보여줍니다.
우박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돌보시는 분이며, 그들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시는 분인가, 얼마나 진실하시고 믿을 만 하신 분인가를 알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서 이 재앙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난리가 애굽 온 땅을 다 휩쓸고 있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센 지방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습니다.
25-26절을 보면,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무릇 밭에 있는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신기한 보호와 인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보호와 인도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사 43:1-3에 보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서 같은 차에 탔던 사람이 거의 다 죽었는데, 유독 한사람은 다친 데 한군데도 없이 살아나오는 경우를 여러분은 보셨지요?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보내어 그들의 죄를 완전히 사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이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약속입니다. 둘째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 마음속에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 성령이 평생토록 그와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돕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철저하게, 영원히 책임지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는,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말입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해 주신다는 이 말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 즉 초월자이시지만, 믿는 사람의 곁에 항상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마 28:20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시는 분입니다.
롬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삶에서는 언제나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습니까? 우리가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느끼면 느낄수록, 내 삶에서 주님의 간섭과 인도는 늘어나고 감사와 찬양은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나와는 별로 가깝지 않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은 희귀해지고 감사와 찬양은 메마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임마누엘 되심을 체험하며,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주목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목하지 않고 느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하고 인도를 받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가 됩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우리를 당당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신자만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번 일에 충격을 받은 바로는 즉시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번은 내가 범죄 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심이 아니라 급하니까 우선 재난을 피해보자는 생각으로 해 본 말이었습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 하였노라.” 라는 말은, 지금까지의 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번만 범죄 했다고 말함으로서 내가 별로 잘못한 일이 없었다는 뜻을 숨기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 라고 한 것도, 회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시인한 것뿐입니다. 악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시인했다고 해서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자백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는 변화된 것이 없이 잠시 재난을 피해보려는 수단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28) 고 했습니다. 이번 재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 만큼 알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더 이상 잡아두는 것도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변화된 모습 없이 깨닫기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을 즉시 거둬 주셨습니다. 사람이 겉으로만 회개해도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29에, 모세가 바로에게, “내가 성을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께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우박을 계속 내려서 애굽의 모든 곡식들을 다 없애버리고, 모든 짐승들을 다 죽게 해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해버릴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 이틀 더 재앙을 내린 다음에 천천히 재앙을 거두셨으면 좋을 텐데 바로가 잘못했다고 하자마자 즉시로 재앙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모세가 제 마음대로 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출34:6에서 율법을 주실 때,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시 103:8에 보면 하나님을 경험한 성도도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과연 자비하시며 쉽게 용서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 재앙이나 받는 사람은 정말 바보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더 있습니다. 31-32에 보면, 그 당시가 어떤 계절이었나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나맥은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리는 이삭이 나왔기 때문에 우박으로 다 못쓰게 되었지만, 밀과 나맥은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없었다는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그들의 식량을 치시는 이번 경우에도 먹을 것을 다 없애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이어 갈 최소한의 양식은 남겨 주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치려고 작정하셨다면, 아직 자라지 아니한 밀과 나맥을 치실방법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애굽 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하셨다면, 열 번씩이나 재앙을 끌고 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단 한번으로도 나라를 없애버릴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없애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복종하여 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방민족들도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을 받게 하는데 있음을 성경은 수없이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은혜로운 분이시고, 자비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애굽의 왕과 백성들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여전히 등지고 있습니다. 34-35에 보면, 이번은 내가 잘못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나는 악했다고 고백 했던 그 바로가 또다시 반역을 시작합니다. 자비와 인내와 긍휼의 하나님을 조롱하고 농락하는 것입니다.
"다시 범죄 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바로의 마음이 강팍하여" 라는 표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 구제불능의 죄인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거듭 거듭 거역하는 불경스럽고 악한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곱째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하나님께 속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와,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를 보았습니다. 한없는 능력과 자비를 가지고,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도우시는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하나님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박 재앙이 주는 교훈
출 9: 13-35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베이징올림픽 역도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건 장미란 선수는 이미지 트레이닝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상상 훈련'입니다.
미국 클리블랜드병원 신경과학자 광 예 박사는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정신적 훈련으로만 실제 근육을 강화시킬 수 있는지 실험을 한 것입니다. 각 훈련 시간은 10~15분 정도로, 총 50회 정도를 반복하면서 매 10초 정도씩 마음속으로 근육을 강하게 수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4개월 간의 훈련을 거친 결과, 젊은이와 노인들 모두 15% 정도의 근육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비합니다. 마음이 신체를 지배합니다. 생각이나 마음의 작용은 단지 마음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감정을 일으키고 몸의 생리적 작용이나 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어떤 것에 한 번 집착하면 쉽게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에 한 20여 년 동안 만들어 놓은 자료를 담아 놓은 usb 메모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금요일까지 사용했는데 월요일 날 작업을 하기 위해 쓸려고 하니 없었습니다. 아무리 기억해도 금요일까지만 기억이 되고 그 후로는 기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있을 만한 곳, 떨어뜨릴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있지 않았습니다. 허망했습니다. 생각이 계속 usb 메모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요즈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내용이 많아 저녁에 교회에서 잠을 자고 기도하는데도 기도 중에도 usb 메모리가 생각났습니다. 이미 잃어버린 것입니다.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잃어버린 usb 메모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착하면 결국 인생은 불행해 집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최명기 의사가 [현대인의 15가지 '마음 감옥']이라는 책을 내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과거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의 황폐한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고통에 빠뜨리는 15가지 마음의 감옥'를 말합니다.
①의존의 감옥 :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②강박의 감옥 :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 미칠 것 같다
③게으름의 감옥 : 무슨 일이든 자꾸 미룬다
④ 분노의 감옥 : 화가 나면 참을 수가 없다
⑤비난의 감옥 : 나만 똑똑하고 다 바보천치다
⑥시기질투의 감옥 : 남이 잘 나가는 꼴을 못 본다
⑦ 의심의 감옥 : 아무도 믿지 못한다
⑧관심의 감옥 :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주목받고 싶다
⑨ 회피의 감옥 :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싫다
⑩ 끈기부족의 감옥 : 뭐 하나 진득하게 하는 일이 없다
⑪ 우울과 죄책감의 감옥 : 잘못된 일이 다 내 탓 같다
⑫ 허영의 감옥 : 자신을 과대평가 한다
⑬ 두려움의 감옥 : 겁이 너무 많아 손해만 본다
⑭ 중독의 감옥 : 아무리 애써도 끊을 수가 없다
⑮ 이성의 감옥 : 내면의 무의식을 인지하지 못 한다” 등을 말합니다.
마음이 이런 감옥에 갇히면 쉽게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좀 더 행복하게 살려면 이런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진단입니다. 바로는 바로 사람들 가운데 주목을 받아야 하는 관심의 감옥,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의심의 감옥,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아집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마음만 바꾸면 될 텐데 강퍅한 마음의 감옥 교만한 마음의 감옥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일곱 번째 우박 재앙을 통해 바로의 마음에 재앙을 내린다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여섯 가지 재앙과 달리 재앙의 대상이 바로의 마음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첫 번째 대상이 네 마음입니다. 처음으로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대상으로 말씀합니다. 이번 재앙을 통해 교만하고 완고한 바로의 마음에 일격을 가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박 재앙이 이미 임한 여섯 가지 재앙과 독특하게 다른 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우리가 복받는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목표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고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최고하라고 생각하는 교만의 감옥,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허영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바로는 태양의 신의 아들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의 왕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중심에 놓여 있고 자신을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영광받는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최고인 것입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은 순종해야 합니다. 누구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살아 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겸손하게 마음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박 재앙을 통하여 그 마음을 손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박 재앙을 통하여 바로의 마음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셔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영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가 영광을 받아야 할 분임을 깨우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바로를 왜 하나님께서 즉시 멸망시키지 않고 왕 위에 그대로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까? 강퍅한 바로를 그 자리에서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왕을 세워도 되는데 왜 교만한 바로를 그대로 왕위에 놓아두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지금까지 살려주고 이집트 왕으로 세워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바로가 하나님 마음에 합해서도 아닙니다. 첫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거대한 하나님의 능력 앞에 아무 힘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바로 인식하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애굽에 임한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당시의 열방들에게 당시 최고의 패권국인 대국 애굽에 임한 재앙 사건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여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신 것입니다. 바로를 왕으로 삼은 이유가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어떠했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여전히 자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지 않습니다. 그 많은 재앙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바꾸지 않고 교만합니다. 교만의 종착역은 멸망입니다(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우리는 하나님이 왜 나를 세웠는지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나에게 좋은 직장을 주시고, 왜 나에게 자녀를 주시고, 왜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왜 나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삶의 사건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는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기도하여 치유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간증하길 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마음은 분명한 목표점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그렇게 살면 인생은 어떤 경우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영광이 마음의 중심에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이름을 내는 것이 마음의 중심에 있습니까?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계시는 L. 픽켙 목사님이 했던 설교 가운데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신도회장이 한 번은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음 주일날 광고를 해주세요. 교인들 보고 빈병, 폐품을 전부 모아 가져와 달라고 해주시면 그걸 팔아서 교회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목사님이 설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먼저 잘라서 바치는 것이지 폐품 팔아서 하나님 일 하는 것 아닙니다." 그랬더니 여신도회장이 계속 간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일 하려는데 돈이 모자라서 그래요." 그래서 목사님은 알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음 주일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광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빈 병이나 폐품이나 휴지 조각 있으면 전부 가져오십시오. 그것을 모아 팔아서 우리 여신도회장님 살림살이 좀 보태주려고 합니다. 여신도회장님 용돈 좀 마련해 드리려 합니다."
예배가 끝난 후 여신도회장이 길길이 뛰면서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를 어떻게 보고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나를 거지로 아셨나요? 자존심 상해서 교회 못나오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정중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회장님 그 빈 병 팔아서 모은 돈으로 회장님이 쓰면 자존심 상하고, 하나님이 쓰면 괜챦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은 그럼 자존심도 없는 분이신 줄 알았습니까?"
그래도 여신도회장은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지 못하고 씩씩거리다가 늦은 밤에 잠이 들었는데 천국에 가게 됐습니다. 갔더니 온 교인들의 천국 집이 보이는데 황금으로 지은 집사님 집, 진주 보석으로 지은 권사님, 집사님 집들이 가득하게 있는데 자신의 집이 없었습니다. 동네가 끝나는 한쪽 개울 아랫동네에 기둥은 병 조각 부셔서 세우고, 벽은 휴지조각 뜯어서 갖다 붙인 집이 있길래 이게 누구 집인가 하고 가서 봤더니 자기 이름이 큼지막하게 써 있었습니다.
깜짝 놀래서 깨어난 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니구나' 회개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하나님을 가장 중심자리에 높여서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2. 우리가 복받는 삶을 살려면 마음의 방향을 내 의지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말씀 순종에 고정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끝없이 실행하려고 합니다. 계속적인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을 노예로 잡아 놓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잡아 놓으므로 경제 대국으로 노동력을 확보하고 전쟁시 동원 병력을 많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더 복받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박 재앙을 통하여 내 말에 순종하는 것이 나라가 잘되고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우박 재앙이 다른 여섯 재앙과 다른 점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18절 보십시오. 내일 이맘때면 중한 우박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12-3월경에 가끔 내리는 자연적인 우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크기와 무게를 가진 얼음덩어리가 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애굽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우박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고해 주시면서 다른 재앙과 달리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 재앙을 피할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생축이나 들에 있는 것을 집에 들여 놓으라는 것입니다(19) 그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종과 생축을 집에 피하게 해 놓았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자들, 경고를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21) 그 종들과 생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듭니다. 하늘에서 천둥 벼락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대한 우박이 떨어집니다. 신비한 일이 생깁니다. 번갯불이 하늘에서만 번쩍거리는 것이 아니라 땅위에서도 한 동안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박과 번갯불이 동반되면서 마치 횃불처럼 되었습니다. 밭에 있는 것은 사람이이 짐승, 채소 등 모든 것이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피해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 말고 또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20절 다시 보겠습니다.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첫 번째 재앙부터 세 번째 까지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번째부터 6번째 까지는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하였습니다. 7번째부터 9번째까지는 이집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의 구분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과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들은 화를 받는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은 10계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2)”라고 말씀합니다. 10계명을 주시기 전에 10가지 재앙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불순종함으로 죽음의 열 가지 재앙을 받았는데 10가지 계명을 지킴으로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이고 금지사항처럼 보이지만 구속과 속박이 아닌 축복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우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벌의 표와 심판의 도구로 자주 쓰입니다(수 10:11; 학 2:17; 계 8:7; 16:21). 말씀을 반역하면 결국 형벌과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면 보호를 받으며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여신으로 오시리스의 어머니 신인 ‘누트’와 공기의 신 ‘수’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과정 속에서 복받는 길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을 회복하는 복은 말씀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십시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2)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3)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 28:6)”
그런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신 28:19)”는 길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신 28:15)”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부흥함으로 복받는 길은 내뜻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우리가 순종할 때입니다. 서로 내 뜻을 관철시키고 실행하려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고통받습니다. 서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에 풍성한 사랑의 복을 받습니다.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서로 도우라는 말씀에 순종할 때 교회는 용서의 공동체, 도움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받습니다. 계속적으로 재앙이 임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과정 과정들을 늘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삶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행복해집니다.
3. 우리가 복받는 삶을 살려면 우리 마음을 적당한 회개보다 철저히 회개에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잘못된 길로 가서 실패하고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잘못을 깨닫고 바꾸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하는 것은 적당히 회개하기 때문입니다. 바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적인 재앙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저도 목회하다 보면 저에게 계속적인 어려움이 오거나 성도님들에게 계속적인 어려움이 오면 다시 한 번 저 자신을 성찰해 봅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것을 찾아 회개하고 더욱 매달립니다. 우박 재앙을 통해 바로가 자신의 잘못을 조금 깨달았습니다. 이 우박 재앙이 앞에 나온 여섯 가지 재앙과 다른 점은 바로가 최초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한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사람을 모세와 아론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무슨 잘못을 시인합니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며 나와 내 백성은 악하다고 시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형벌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회개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회개입니다. 거짓회개입니다(히12:16,17).
순간적인 감정의 변화에 의한 일시적인 회개입니다. 뇌성 번개를 통하여 내리는 전무후무한 우박 앞에 바로는 충동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용서받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영적인 죄에 대한 각성을 동반합니다(행2:37,38).
회개 후에 마음에 참된 기쁨이 찾아옵니다(행3:19). 회개 후에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마3:8; 행26:20). 참된 회개는 지식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감정적으로 잘못은 통회하고 의지적으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이렇게 회개하지 않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회개하는 체 하는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박과 뇌성이 그치는 것을 보자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은 어떻게 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다시 범죄하여 마음이 완강하였습니다.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왜요 아직은 살만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밀과 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회개할 때 철저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수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재산에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건강에 어려움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끝없는 고통 가운데 문제가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삶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기보다는, 악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7)”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이스라엘의 일대 왕 사울과 2대 왕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울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사무엘이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말을 무시합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결국 자식도 전쟁터에서 죽고 자신도 비참하게 죽음으로 불행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릅니다. 성군이라고 불리우는 다윗도 간음하고 살인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합니다.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지고 있는 왕입니다. 그 막강한 권력으로 얼마든지 처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철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병들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금식하며 철야하며 회개기도를 드렸습니다. 일주일 동안을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아주었고 그에게 선물로 솔로몬을 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유다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똑같이 범죄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용서받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들 중에 누가 선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죄악 가운데 살아 가고 죄를 짓고 삽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12지파의 아버지가 된 야곱도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까? 세계 선교를 통세 시대를 변화시킨 바울도 살인 방조자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가 있냐 없냐가 아닙니다. 회개하느냐 회개하지 않느냐입니다. 회개한 죄인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존재할 뿐입니다.
회개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여 니느웨의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12만명이 주님께 돌아 왔습니다. 성경에 한 번에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예가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교만함으로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회개함으로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회개함으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십자가의 은혜의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 받아 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순종, 오직 회개로 복된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