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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와 동거한 오뚝이 같은 나의 삶
도 정 기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병원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큰 수술을 받고 장기간 입원 치료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젊은 시절부터 병마가 찾아와 좀처럼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수시로 나를 괴롭히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누나가 네 명에 동생 두 명으로 가난한 농부의 귀한 맏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귀한 아들이라고 친족들은 물론이고 온 마을 사람들까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태어나고부터 엄마와 누나들의 등에서 등으로 걸음마를 연습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금이야 옥이야 보살피므로 자랐다. 나는 귀한 아들이라고 형제 중에 유일하게 대학까지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박봉이지만 두 아들을 키우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다.
병마가 찾아오기 전 까지는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은 기억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체력에는 자신이 있어 각종 운동을 좋아하였다. 이런 나의 행복을 시기라도 하듯 이제 겨우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을 알만한 불혹의 나이가 되기도 전인 39살의 젊은 나이에 병마가 찾아왔다. 병명은 대장종양으로 대학병원에서 대장과 소장을 30센티미터 정도 절제하는 큰 수술을 받고 장기간 입원 치료를 하였다. 대장과 소장을 절제한 수술이라 한 달간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영양주사만으로 버티어야 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를 하지 못하다 보니 몸은 야위어 뼛골이 앙상하고 피부는 뱀이 허물을 벗듯 모두 벗겨졌다. 퇴원을 하고도 장기간 건강회복에 매달려야 했다. 다행히 수술도 잘되었고 경과도 좋아 일상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평소 건강과 체력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다는 자만으로 몸은 돌보지 않고 무절제하게 생활한 것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건강도 회복되고 수술 후유증이나 재발도 없이 16년간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간절히 바라던 교장 자격증을 받고 발령을 기다리던 2007년 어느 날 근무시간에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다. 담석증으로 쓸개의 절반 정도가 이미 제 기능을 잃고 썩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쓸개를 절제하는 수술을 하였다. 평소에 가끔 통증은 있었으나 금방 증상이 사라져 별로 의심하지 않고 생활했다. 담석이 움직이지 않으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 가끔 통증이 올 때는 담석이 움직였던 모양이다. 쓸개가 없으면 간에서 만들어진 소화액을 간직하고 있다가 음식물을 섭취하면 그때 알아서 분비한다고 한다. 그래서 소화액을 저장하는 쓸개가 없어도 음식물의 소화에는 별로 지장을 주지 않지만 간에는 약간의 부담이 더 간다는 것이었다. 인체를 구성하는 데는 가장 중요한 오장 육부가 있다. 쓸개절제 수술을 하였으나 일상적인 생활에는 별로 지장이 없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2012년 가을 큰아들의 늦어지는 결혼에 애태우다 더디어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좋아하는 나에게 또다시 병마가 찾아왔었다. 정기 건강검진 때 대장 내시경을 하니 25년 전 대장과 소장의 절제 수술을 받은 부위에 궤양을 동반한 커다란 종양이 발견되었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고 서울아산병원으로 갔다. 우리나라 의술의 최첨단을 자랑하는 서울아산병원에서도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어 수술을 해보아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까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악성 종양이라면 늦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수술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예식 날이 목전이라 예식 후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양가에서 이미 청첩장을 발송한 상황이라 결혼식 날짜를 연기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큰아들에게는 사실을 숨기고 별로 큰 병이 아니라 결혼식 이후에 다시 검사해 보기로 했다고 하였다. 어느 정도 눈치라도 챘는지 식은 예정대로 올리고 신혼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아들을 설득하여 등 떠밀어 보냈다. 평생에 단 한 번 뿐인 신혼여행을 부모 때문에 그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올 때쯤에는 수술결과에 따라 사경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언이라도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혼여행을 보내고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절차를 밟아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결과가 나온다는 날 저녁 담당 주치의 선생님께서 입원실로 올라오셨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사망선고라도 들고 오는 저승사자 같았다. 선생님의 입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중죄인이 법정에서 판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이 나의 심정과 같았으리라. 의사 선생님은 나의 앙상한 손을 잡으시고는 “축하합니다. 분명히 암은 아닙니다.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한 궤양성 종양입니다.”라고 결과를 알려 주었다. 정확한 바이러스 종류를 알기 위해 조직검사를 다시 의뢰해 놓았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였다. 함께 입원해 있던 환우와 가족들도 자기 일 인양 모두가 축하해 주셨다. 무거운 침묵만 흐르든 암 환자 병실에서 모처럼 기쁜 소식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다른 환우들에게도 나와 같이 이런 기쁜 소식이 전해오면 얼마나 좋을까. 수술결과가 좋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아들 내외를 병상에서 웃으며 맞이할 수 있었다. 2차 조직검사에서도 바이러스의 종류를 알 수 없다며 약 처방도 없었다. 1년 후에 경과를 보기 위해 예약 날짜를 잡아 놓고 퇴원해 내려 왔다. 일상생활로 돌아와 건강을 회복하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1년 앞으로 다가온 정년퇴직후의 삶에 대한 설계를 하였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직장이 필수이고 취미생활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퇴직 후에는 취미생활은 선택이아니라 필수일 것이다. 나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친구도 사귀면서 소수 인원으로도 할 수 있고 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는 것 중에서 찾기로 나름대로 기준을 마련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니 아무래도 운동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탁구. 배드민턴과 자전거 타기 그리고 텃밭 가꾸기로 했다. 퇴직 후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여 퇴직 전에 탁구 배트와 배드민턴 라켓. 자전거를 미리 구입해 두었다. 텃밭은 고향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집과 농장이 있다. 장기간의 여행 떠날 준비를 하듯 만반의 준비를 하여 놓고 퇴직 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년퇴직을 불과 3개월 정도 남겨놓고 경과를 알기 위한 검사 날이 다가올 때 그렇게도 나를 괴롭혀왔던 병마가 또다시 찾아왔다. 복부가 조금씩 부풀어 오러드니 하루 밤 사이에 갑자기 많이 부풀어 올라왔다. 대구의 집 근처 병원을 찾아 검사하였더니 1년 전 수술한 부위에 궤양이 재발하여 대장에 천공이 생겼다는 것이다. 병원에는 자기가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면서 지금 바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로 가라는 것이다. 며칠 후에 수술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 진료가 예약되어 있는데 그때 가겠다고 하니 살아서 내려오려면 지금 당장 올라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대장 천공이 시간을 다투는 병이란 것을 그때 알았다. 입원할 준비를 하여 그날 저녁에 올라가 응급실에서 검사하였다. 검사 결과는 대구에서와같이 대장 천공으로 긴급수술을 해야 하는데 토요일이라 수술을 할 수 없어 응급처치만 하였다. 월요일 오전 일찍 수술하였다. 수술결과는 1년 전과 같은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에 의한 대장에 천공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는 바이러스라 치료 약도 없으니 다시 제발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하였다. 왜 이런 바이러스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괴롭히는지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퇴원을 하고 6개월 후 경과 검사를 한 결과 이상이 없었다. 이렇게 대수술을 한두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하면서도 결코 스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타고난 강한 체력과 주저앉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과 건강을 고려한 적당한 운동을 꾸준히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퇴직 후 2년간은 건강을 회복하느라 취미 생활을 접어 두어야 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친구들과 근교의 가벼운 산행을 한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금호강 자전거 길을 달리며 고향의 작은 텃밭도 가꾸고 있다.
오뚝이처럼 쓰러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또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도 결코 병마에 굴하지 않았다. 길지 않는 삶의 여정에서 이렇게 네 번의 수술로 오랜 세월 병마와 동거한 나의 삶이었다. 이제 마지막 수술한 후 3년이나 지났는데 별 이상이 없으니 병마와의 동거도 끝나는가 싶다. 인생 4부작 드라마 같은 삶을 겪은 주인공인 나의 연기에 힘겨워하다 보니 뒤에 있는 보조출연자들의 애환을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해피-엔드로 끝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보조출연자들의 애환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금방이라고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어 가는 나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마음조이며 살얼음판을 걷는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여 늘 어두운 그늘이 있었고 노심초사하며 마르지 않는 눈물이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 생각하니 미안하고 안타깝다. 아내의 희생과 가슴 아픈 고통을 감내했던 나날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을까? 인고의 세월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길은 병마와의 동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나의 여생을 기쁨과 행복만이 넘쳐나는 드라마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건강관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앞으로는 가족들의 얼굴에 항상 웃음꽃이 피어나고 행복이 철철 넘치는 모습만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첫댓글 어느 조사에서 사람의 한 평생 중에서 가장 햄복한 시기는 70대 부터랍니다. 뒷 모습을 그려 보며 하시고 싶은 일들을 하시면서 행복하게 지낼 때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누구에게나 굴곡없는 삶의 뒷모습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앞으로 더욱 건강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한사람 인생에 등장하는 보조 출연자들 이란단어가 멋집니다공감합니다
누구에게나 그인생의 보조출연자들이 있죠 디딤돌이든 걸림돌이든 말이지요
굳건한 마음은 노년을 지키는 무기 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시험 때 산업분포에 농업인구가 몇%냐는 시험문제가 나왔답니다. 답이 70%였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15% 내외라고 기억됩니다.돈이라야 가축 곡식을 내다파는 게 돈의 전부 였지요. 힘들게 살아오신 부모님세대와 그기서 교육을 받아온 우리 모두 어려웠던 지난 세월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건강하셨어 사모님과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고생 참 많았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가 바로 그 시기인 것 같습니다. 인생 보조출연진 특히 사모님이 무척 고생 많이 하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댓글 주신 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발가벗고 대로에 나서는 심정이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한편의 드라마같은 삶의 여정이라 저같은 경우를 겪어신 분이 단 한분이라도 있어시다면 저와 같은 삶의 여정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까해서 저를 대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저는 지금 어두운 긴 터널을 벗어나 꽃피고 새우는 낙원에서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여생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조연도 이제 더없이 행복 하답니다. 그래요 최선생님의 말씀 처럼 가장 행복한 70대가 되어가니 유년시절 처럼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려나 봅니다. 댓글 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앞으로는 좋은일들만 있으시겠습니다. 길흉화복이라더니 인생 5부작 드라마같은 삶 잘 읽었습니다.
힘든일이 연속되어 고생하셨습니다. 본인도 힘들고 가족모두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것 같습니다.이제부터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사시길 축원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이 살아간다는 일은 기적의
연속입니다. '죽암'선생님의 삶의 기적은
하나님의 가호와 조상분들의 '음덕'의
힘이라 생각되어 지는 숙연한 세월이
였습니다. 선생님의 건승과 가내 편안을
기원합니다.
몇 번의 수술도 잘 견뎌내시고 오뚜기처럼 오늘의 행복을 쨍취하신 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님의 등뒤에서 둿 모습응 지켜보며 조연의 역활을 휼륭히 해내신 사모님과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련을 겪으셨네요. 인생사에서 접할 수 있는 불행이 아니고 하늘이 내리는 시험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관문을 통과 했으니 장하십니다. 앞날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슴 먹먹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