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
이사야 1 : 1 – 17
유다와 예루살렘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며 무수한 제물을 제단에 불태워 여호와께 제사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회’는 ‘거룩한 모임’으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거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악을 행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시는 예배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보시고 ‘예배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섬기는 신앙적 행위로서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장 신성하며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2)고 탄식하시며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2)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은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예배답지 못하고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은 예배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무수한 제물을 가져와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숫양과 살진 짐승과 수송아지와 어린 양이나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바쳤습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여서 언약궤가 있는 휘장 밖에 있는 향단에 분향했습니다.
‘분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출30: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신다’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분향은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겠다’(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일과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와서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무수한 제물을 제단에 불로 사르며 받쳤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무수한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 ‘헛된 제물’이란 여호와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 곧 받으실 수 없는 우리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제물로 바친 ‘숫양과 살진 짐승’과 ‘수송아지나 어린 양’은 합당한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헛된 제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물 자체가 합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피가 가득한 손으로 제물을 바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가 가득한 손을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6).
그들이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은 것과 고아를 돌보지 않고 과부를 억울하게 했다는 것’을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하셨습니다(17).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절도나 살인을 해서가 아닙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임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손으로 바친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죄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을 죄로 여기시고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교회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각자 회개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한 주간을 크고 작은 죄를 마치 옷에 먼지를 털고 식사하는 것처럼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많은 제물을 바쳐도 도리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만홀히 여김’이란 ‘여호와를 버리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는 말입니다(4).
하나님께서 그들을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한 종자요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하시며 소나 나귀와 같은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3,4).
그들은 이미 매를 맞아서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5)고 탄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13)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 없는 예배는 헛된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지기에 곤비한 무거운 짐이 됩니다(14).
‘분향’은 우리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회개 없는 기도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13).
그들이 많이 기도해도 눈을 가리고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5).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며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8:9-14).
바리새인은 회개하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헛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용서를 빌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바리새인들처럼 헛된 예배드리고 마당만 밟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세리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기도와 예배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세리와 같은 기도와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스스로 손을 씻고 스스로 행악을 그치고 제물을 바쳐야 합당한 제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6).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행실과 악을 행한 손을 피가 가득한 손입니다. “너희는 피가 가득한 손을 스스로 씻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고 내 목전에서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16) 라는 말씀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배드리는 것은 많은 제물을 바쳐도 ‘헛된 제물’이 된다는 것을 오늘 우리게도 가르쳐 줍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아무리 부르짖고 외쳐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헛된 기도가 됩니다. 회개 없는 예배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예배가 됩니다.
다윗은 충신인 우리아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나단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듣고 그는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삼하12:13).
그후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상한 심령’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손에 피가 가득한 그들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1:18)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 없는 예배는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회개 없는 찬양, 회개 없는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예배는 교회 공동체로서 성도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예배는 하나님과의 ‘나(My)’와의 관계입니다. 예배는 각각 개인이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내가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나의 ‘헛된 예배’가 됩니다. 내가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된다면 아무리 구하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고 듣지 않으십니다(15). 나의 죄 사함이나 나의 구원도 영생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실과를 따 먹고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가죽으로 지운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구속사적인 죄인 구원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창3:15).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복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과 죄인과의 최초의 예배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제사) 제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제사는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땅의 소산을 제물로 바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으나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창4:4,5).
피 없는 가인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지만, 양을 잡은 피가 있는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백성 성도(聖徒)입니다. 예배는 가장 신성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예배가 예배답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것은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라”(요4: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라”(요4: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는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