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성장학, 설교 해석학, 성화, 이런 것들의 오류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 가능성을 건다는데 있어요. 인간에게 무언가 끄집어내어서 분기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털끝만한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해방이 존재합니다. 해방이란 나 자신에게서 눈을 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거기 십자가가 나오지요.
십자가의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널 대신해서 내 아들이 죽었다!" 이것입니다. 거기서 눈물이 나오고 참회가 나오고 애통함이 나오게 해요. 그러니까 눈물만 줄줄 흘러야 하는데 욥처럼 다 뺏기고 배신당하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도 "난 할 말 없습니다"라고 해야되는 건데 그냥 머리 숙이고 가면 되는데 거기에 자기 열심이 들어가니까 복잡해집니다. 내 "취향"들로 주님의 공로가 모독되는 행위들을 날마다 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앙글도 감동하나 가지고 쓰면 되는데 미사여구 써가며 자기 자랑하지요. 부흥을 빌미로 연예인 간증같은 온갖 오락 프로그램 들여와서 걔중에 몇사람 교인으로 등록하면 그걸 부흥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십자가의 감동을 대치하기 위해서 신학교들이 생겨났지요.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쳐도 누구하나 반발하고 일어나지 않으면서 '난 신학생'이란 자부심에 살고, 교회개척하면 누구나 "나는 부름받은 하나님 종이다'라는 자부심에 삽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떠난 모든 열심들은 해산의 고통처럼 느껴져요. 십자가는 역설 투성이라서 그렇습니다. 역설이란 뜻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역사한다는 뜻이에요.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갑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을 찌르는 강도가 클수록 피는 더 멀리 튑니다. 세상 방식으로하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강하게 찌를수록 튀는 강도가 커집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내립니다.(로마서 5장 20절 말씀)
인간세상에서 역설은 인기가 없어요. 뭐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기가 없습니다.
오늘날 미국이고 한국이고 복음을 봉쇄하는 곳은 없어요. 십자가만을 상쇄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궁핍하고 힘든 이 삶이 십자가라고 하면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인데 거기 "내"가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존재에요. 그러니까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피의 흔적이 있는 성도는 가능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고백만 묻어나옵니다
피의 흔적이란 골고다에서 날 기억하고 죽기까지 충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에요.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믿음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성도라면 이런 고백을 하겠지요
"오직 주의 영광만을 위해서 산화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만으로 내 영혼이 소각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