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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1
#칼빈 #개혁주의
칼빈 선생은 자기를 비롯한 신앙개혁가들을 핍박하는, 어찌보면 원수와도 같은 프랑스 왕에게도 지극한 경의를 표하며 헌사를 바친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따라 국가 지도자는 선악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자임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칼빈 선생의 신학을 잇는다는 반정부 기독진영 개혁주의자들 중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칼빈 선생의 이 모습만큼은 찾아볼 수 없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칼빈 선생의 가르침과 신앙고백을 준수한다면 국가 지도자가 어떠하건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저들은 단지 자기들의 이념(신앙이 아닌 세속적)에 반대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온갖 거짓과 루머와 억측을 난무하고 비방과 저주를 서슴없이 퍼붓는다.이러한 반정부 기독진영 개혁주의자들을 칼빈 선생이 본다면, 과연 아는척을 할까 싶다.
#20160901
#유두고
예전에도 한 번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듣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난 '유두고'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럼 당신들은 유두고보다 잘난 것이 뭐가 있느냐고 되묻고 싶어진다.나는, 유두고가 창가에 앉은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자리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씀을 듣다가 졸려서 꾸벅꾸벅 한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이 밤늦게 까지 이어진 것과, 유두고가 '주경야독' 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다면, 과연 유두고를 비웃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일하느라 피곤한데도 오직 말씀을 듣기 위해서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안좋은 자리에 앉아 몇시간 동안 말씀을 들을 자신이 있는가?성경 속 인물이라고 너무 함부로 평가하지 말자.
#느헤미야
느헤미야 8장과 같은 예배를 드리고 싶다.
-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를 초청한다.
- 에스라가 새벽부터 정오까지(아마도 6시간 이상) 율법책을 강독한다. 모든 백성은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 다른 레위인들이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풀이한다.
- 백성들은 선포되는 율법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자 통회하며 자복한다.
- 백성의 지도자들이 더 자세히 말씀을 알고자 하여 에스라에게 요청한다.
- 에스라는 율법에 '기록'된대로 초막절을 지킬 것을 가르친다.
- 절기 내내 말씀을 낭독한다.
진정한 부흥이란,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오늘날은 말씀을 알고자 하는 사람도,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도, 말씀으로 부흥하려는 교회도 희귀해져버렸다. 대신, 절기마다 설교자의 설교보다 권위있는(?) 성가대의 칸타타와, 부흥회마다 광광거리는 찬양과 중언부언하는 기도만이 있는 듯.
#유월절 #성찬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마다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그들은,
- 하나님께서 죄악 된 애굽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기로 택하셨음을
-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보시고 자신들을 살리셨음을(즉, 피를 바르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자신들도 죽이셨을 것임을)
-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실 것을
깊이 생각하였을 것이다.
구약의 유월절이 성만찬으로 대체 된 오늘날,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서 성만찬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성만찬을 통해서 성도들이
- 떡과 포도음료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을 생각하고
- 하나님께서 오직 이 예수의 피로써 나를 살리시기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하며
-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성화의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깊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에스라
학사 에스라는 백성들 중 일부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살고 있다는 것에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회개한다.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거든 결혼한 모든 이방 여인들과 그들에게서 낳은 자녀들을 내보내라고 엄포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에스라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따른다.글로만 읽으며 그런가보다 하며 넘어가겠는데, 나 자신을 그 백성에 이입을 시켜보면 나는 과연 에스라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을까 고민한다. 이방 여인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일 것이고, 자녀들도 내 사랑하는 자녀들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서 혈육을 끊어버리라니. 역시나 모든 백성들이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에스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백성의 무리에 계속 있었는지는 모르겠다.그래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에스라의 그 무리한 결단을 스스로 순종하였다. 이는 분명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자신들의 의지로 순종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본성을 거스르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나에게는 과연..
#20220901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17-22
17 그 城郭을 測量하매 百四十四 규빗이니 사람의 測量 곧 天使의 測量이라
The angel measured the wall using human measurement, and it was 144 cubits thick.
Et mensus est murum ejus centem quadraginta quatuor cubitorum, mensura hominis, quæ est angeli.
καὶ ἐμέτρησεν τὸ τεῖχος αὐτῆς ἑκατὸν τεσσεράκοντα τεσσάρων πηχῶν, μέτρον ἀνθρώπου, ὅ ἐστιν ἀγγέλου.
성곽의 두께인 144규빗은 각각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12의 제곱수이고, 12는 하나님의 세 위격을 상징하는 3과 하나님의 세 위격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추가됨 또는 동서남북의 네 방위인 만방을 상징하는 4의 곱이며, 3과 4를 더하면 하나님 그리스도의 완전한 섭리를 상징하는 7이므로, 성곽의 두께 144규빗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완전충만한 구속사역의 섭리를 의미한다. 이것을 사람의 측량이라 하는 이유는 새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하늘의 성도들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이고, 아울러 천사의 측량이라 하는 것은 땅의 측량법이 아닌 하늘의 측량법으로서 새 예루살렘에 거할 하늘의 성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기준이 아니라 성경과 성령에 근거한 하늘의 주님의 신령한 기준임을 의미한다. 즉, 어떤 성도는 신앙의 열매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과부의 두 렙돈이나 냉수 한 그릇 같이 보잘것 없이 보여도 천사의 측량으로는 금 갈대자로 많이 재어야 할 정도로 크고, 어떤 성도는 부자들의 많은 헌급처럼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신앙의 업적을 낸 것처럼 보여도 정작 천사의 측량으로는 금 갈대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며, 어떤 성도는 땅의 모든 교회로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의 성과를 내었더라도 천사의 측량으로는 성령의 불 시험을 견뎌내지 못하고 토대만 남기고 전부 타버려 간신히 금 갈대자 끄트머리에 재를 묻힐 정도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선지자 에스겔은 유다 왕국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지 14년 후 1월 14일에 환상 중에 한 성읍의 형상과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읍을 측량하는 것을 본다. 성읍을 측량하는 사람이 가진 장대의 길이는 한 규빗에 손바닥 너비 하나를 더한 자인 척으로 여섯 척 되는 것인데, 그 척은 에스겔의 팔을 기준으로 삼은 단위가 아니라 하늘의 측량자의 팔을 기준으로 삼은 단위일 것이다. 하늘의 측량자는 마치 느부갓네살의 신상처럼 거대했을 것이므로 그가 가진 장대 또한 그에 비례하여 매우 길었을 것이다. 에스겔이 목격한 성읍과 측량자의 환상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과 천사의 측량으로 완전히 성취된다. 선지자 에스겔이 나라가 멸망하여 바벨론의 비참한 포로 신세가 된 가운데서 새 성읍의 환상을 본 것처럼, 요한 사도는 교회와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자신은 밧모 섬에 유배된 암울한 상황 가운데서 하늘의 새 예루살렘 환상을 보게 된다.
앞서 용이 세운 짐승의 이름 또는 짐승의 수는 666으로서 사람의 수라고도 하는데, 이는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아 짐승을 섬기는 구원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
18 그 城郭은 璧玉으로 쌓였고 그 城은 精金인데 맑은 琉璃 같더라
The wall was made of jasper, and the city of pure gold, as pure as glass.
Et erat structura muri ejus ex lapide jaspide : ipsa vero civitas aurum mundum simile vitro mundo.
καὶ ἡ ἐνδώμησις τοῦ τείχους αὐτῆς ἴασπις, καὶ ἡ πόλις χρυσίον καθαρὸν ὅμοιον ὑάλῳ καθαρῷ.
이 땅의 정금은 빛이 나는 밝은 노란색이지만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의 정금은 유리 같이 맑고 투명하면서도 금처럼 빛나는 그런 정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하늘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듯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을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이루게 될 땅의 성도는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리는 세속인보다 크고 존귀하다.
19 그 城의 城郭의 基礎石은 各色 寶石으로 꾸몄는데 첫째 基礎石은 璧玉이요 둘째는 藍寶石이요 셋째는 玉髓요 넷째는 綠寶石이요
The foundations of the city walls were decorated with every kind of precious stone. The first foundation was jasper, the second sapphire, the third agate, the fourth emerald,
Et fundamenta muri civitatis omni lapide pretioso ornata. Fundamentum primum, jaspis : secundum, sapphirus : tertium, calcedonius : quartum, smaragdus :
οἱ θεμέλιοι τοῦ τείχους τῆς πόλεως παντὶ λίθῳ τιμίῳ κεκοσμημένοι· ὁ θεμέλιος ὁ πρῶτος ἴασπις, ὁ δεύτερος σάπφειρος, ὁ τρίτος χαλκηδών, ὁ τέταρτος σμάραγδος,
20 다섯째는 紅瑪瑙요 여섯째는 紅寶石이요 일곱째는 黃玉이요 여덟째는 綠玉이요 아홉째는 淡黃玉이요 열째는 翡翠玉이요 열한째는 靑玉이요 열두째는 紫水晶이라
the fifth onyx, the sixth ruby, the seventh chrysolite, the eighth beryl, the ninth topaz, the tenth turquoise, the eleventh jacinth, and the twelfth amethyst.
quintum, sardonyx : sextum, sardius : septimum, chrysolithus : octavum, beryllus : nonum, topazius : decimum, chrysoprasus : undecimum, hyacinthus : duodecimum, amethystus.
ὁ πέμπτος σαρδόνυξ, ὁ ἕκτος σάρδιον, ὁ ἕβδομος χρυσόλιθος, ὁ ὄγδοος βήρυλλος, ὁ ἔνατος τοπάζιον, ὁ δέκατος χρυσόπρασος, ὁ ἑνδέκατος ὑάκινθος, ὁ δωδέκατος ἀμέθυστος.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은 복음 전파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고를 행하고 열매를 맺었으므로 새 예루살렘 성곽의 휘황찬란한 열두 기초석으로써 영원무궁토록 영광스럽게 기념된다. 물론 기초석을 구성하는 열두 보석들은 이 땅의 보석 수준을 초월하는 하늘의 보석들이다. 사도들을 상징하는 기초석이 한가지 보석이 아니라 모두 다른 보석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마치 성경 66권의 여러 기록자들이 각자 자기자신의 성향을 따라 성경을 기록한 것처럼 사도들의 복음 사역도 각자의 성향을 따라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사도들의 복음 사역은 흠잡을데 없는 보석처럼 진귀하였기 때문에 하늘의 보석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21 그 열두 門은 열두 眞珠니 각 門마다 한 개의 眞珠로 되어 있고 城의 길은 맑은 琉璃 같은 精金이더라
The twelve gates were twelve pearls, each gate made of a single pearl. The great street of the city was of gold, as pure as transparent glass.
Et duodecim portæ, duodecim margaritæ sunt, per singulas : et singulæ portæ erant ex singulis margaritis : et platea civitatis aurum mundum, tamquam vitrum perlucidum.
καὶ οἱ δώδεκα πυλῶνες δώδεκα μαργαρῖται· ἀνὰ εἷς ἕκαστος τῶν πυλώνων ἦν ἐξ ἑνὸς μαργαρίτου. καὶ ἡ πλατεῖα τῆς πόλεως χρυσίον καθαρὸν ὡς ὕαλος διαυγής.
성곽의 열두 문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144천 명을 이루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데 이 문들이 각각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복음을 믿는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인생이 동서고금과 빈부귀천과 남녀노소와 인종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아브라함이라는 동일한 언약 조상의 자손들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만을 한 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열두 지파에 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2 城 안에서 내가 聖殿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主 하나님 곧 全能하신 이와 및 어린 羊이 그 聖殿이심이라
I did not see a temple in the city, because the LORD God Almighty and the Lamb are its temple.
Et templum non vidi in ea : Dominus enim Deus omnipotens templum illius est, et Agnus.
Καὶ ναὸν οὐκ εἶδον ἐν αὐτῇ· ὁ γὰρ Κύριος ὁ Θεὸς ὁ Παντοκράτωρ ναὸς αὐτῆς ἐστιν, καὶ τὸ Ἀρνίον.
광야에서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에, 솔로몬의 성전 및 포로귀환 후 재건된 성전은 유다 왕국 예루살렘에 세워졌었고, 사도 시대부터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성도의 영에 내주하심으로써 성도들을 성전 삼으시므로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이 땅에서는 누구나 건물이건 사람이건 주님의 성전을 육안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전이 되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와는 정반대로 새 예루살렘 성이 성전 안에 거하는 모양새가 된다. 즉 이 땅에서는 건물이나 성도가 성전이 되고 그 안에 하나님께서 언약궤로나 성령으로 거하신다면, 장차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전이 되시고 그 중심에 새 예루살렘 성을 두셔서 마치 언약궤처럼 존귀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10901
#신명기 #Deuteronomy 31:1-2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잇다
1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을 잘 알고 신앙이 출중한 신자들 조차도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비록 머리와 입술로는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 고백하더라도 마음의 깊은 곳 한 켠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안타까움과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모세는 자기가 육체적으로나 세상 권세로나 동족에 대한 애정으로나 한창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는 정작 그들을 위해 쓰임받지 못하고 그저 살인을 저지른 한 사람의 범죄자로서 몰래 도망쳐야 했고 그 후로 40년 동안 허송세월 하듯이 장인어른의 양떼나 돌보며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힘도 없고 권세도 없고 동족에 대한 애정도 다 식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80세가 되어서야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마지못해 가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긴 했어도 광야에서 아무리 여호와의 능력을 그들에게 선보였어도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독한 원망과 비방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그에게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나 혐오나 미움보다는 병아리들을 품는 암탉처럼 친아버지처럼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넘쳐났었다. 그렇게 40년 동안 홀로 외로이 이스라엘을 고생스럽게 인도했으면 여호와께서 그 수고를 보셔서라도 가나안 땅에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같이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면 좋으련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패역함에 격동해서 불순종하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모세 자신의 죄책으로서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게 차단하신다. 더욱이 모세는 그래도 여호와께서 혹시나 자기에게 일말의 은혜와 긍휼을 베푸실까 싶어서 요단 강을 건너가게 해주십사 기도를 드려보지만 여호와께로부터 더 이상 이를 간구하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그런 모세에게 베푸신 긍휼은 요단 강 이쪽편에 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멀찌감치 보이는 가나안 땅을 희미하게 바라보게 하신 것 뿐이다.
이처럼 모세는 40년 동안 여호와께 순종한 대가를 이 땅에서는 단 하나도 얻지 못했는데, 이는 아마도 여호와께서 그의 수고에 대한 상급을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지극히 풍성한 것으로 주시려고 그러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하늘에서 얼마나 높아졌느냐면, 우선 그는 산 위에서 홀로 죽었어도 그 시체는 천사장인 미가엘이나 천사장이었던 사탄조차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논쟁을 벌일 정도였었다. 즉, 여전히 모세의 시체는 이 땅의 사람들이나 하늘의 천사들이나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신비로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가 산 위에서 죽었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통상적인 사람들처럼 죽음의 과정을 겪은 것인지, 아니면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들려 올라간 것인지도 긴가민가 할 정도이다. 게다가 모세는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과 산에 오르셔서 잠깐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때 엘리야와 함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그분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위해서 모세를 대표적으로 언급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맡은 바 충성을 다 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세의 이 땅에서의 수고와 하늘에서의 상급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고난들과 하늘에서 다시 받으신 하나님 우편의 영광을 예표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도 창세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무한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고 계셨어도 그것을 이용해서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려 하시지 않으셨고 도리어 당신의 영광의 육신을 이 땅의 죄 있는 인간의 육신으로 무한히 낮추셨다. 모세가 다 늙고 힘이 없었던 80세의 노년에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을 감당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고난의 구속사역을 감당하셨다.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스라엘에게서 원망과 비방과 반역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등의 선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먹고 마시는데만 관심있었던 군중들에게서 외면을 당하시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숱한 비방과 참소를 당하셔야 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한 간구를 거절 당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그 잔이 지나가기를 간구하셨으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아시고 스스로 물리셨다. 그러나 모세가 자기 사역이 전부 끝나고 그 시체가 천사장들도 모르는 신비가 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창세 전 천사들이 지음 받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셨었던 육신의 영광을 되찾으셨고, 그 구속 사역의 경륜과 섭리의 비밀은 하늘의 천사들도 알고자 소망하나 알지 못할 정도의 신비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목사가 아무리 목회하기 힘들다 한들 모세보다 힘들 수 없고 아무리 교인들이 속을 썩인들 모세보다 더 악독한 반역을 당할 수 없기 때문에, 목사로서 겪는 어렵고 힘든 일들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징징대거나 감성에 팔려서 자기 연민에 빠질 자격이나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SNS가 발달되어서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조조이 아비 야곱에게 일러 바치듯이 자기 목회의 고충을 낱낱이 까발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럼으로써 설령 사람들에게서 연민과 위로는 받을지언정 결국 자기 손으로 하늘나라 상급을 까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다.
#20200901
#레위기 #Leviticus 19:30-(3)
(3)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한 유다 지파와, 성전 제사를 담당한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남 유다 왕국 또한 북 이스라엘과 상황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르호보암 시대에 분열된 이후 얼마간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신앙을 유지하는 듯 했으나 세월이 흐르고 왕이 바뀌기를 반복하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선한 왕보다는 여로보암과 방불한 악한 왕이 더 많이 집권하였다. 심지어 어떤 왕은 죽을뻔한 목숨을 살려주고 왕위에 앉히며 여호와의 법도대로 행하기를 지도한 대제사장을 따라 한동안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준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제사장이 죽자 유다 왕국의 귀족들과 장로들이 나서서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자고 까지 왕에게 건의하였고 또 그 왕은 그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 때까지의 모든 신앙개혁을 무너뜨리고 배교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그런 배교를 대제사장의 아들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꾸짖자 대제사장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의 아들을 성전에서 죽이기까지 한다. 결국 그 왕은 신하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고 왕들의 무덤에 안치되지도 못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르호보암 이후 수백년의 기간 중에서 유월절을 지킨 왕은 요시야와 히스기야 정도 밖에 없었으므로 그 외의 나머지 기간에는 여호와의 안식일이 제대로 지켜졌을리는 만무하다. 여호와께서는 남 유다의 패악이 어찌나 심하였는지를 선지자 에스겔에게 호소하듯이 말씀하신다. 그들은 사마리아, 즉 처음부터 여로보암을 따라 배교했고 단 한 명의 선한 왕도 배출하지 못했던 북 이스라엘 보다도 더 급격하고 깊게 부패했다는 것을 동생 오홀리바의 음행이 언니 오홀라의 음행보다 더 심하였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게다가 죽을뻔한 여아를 가까스로 살려 먹이고 입히고 키우고 아내로 삼았더니 남편 보는 앞에서 온갖 외간 남자들이랑 음행을 저지르는 음녀로 비유하신다. 또한 환상으로 예루살렘 성전 으슥한 곳들을 구석구석 데리고 다니시면서 제사장들과 방백들이 거룩한 여호와의 성전에서 온갖 추악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신다. 다른 선지자에게는 그 제사장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의식을 매우 번거롭고 하등 쓰잘데기 없는 일로 치부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런 제사장들 밑에서 백성들은 제대로 된 신앙을 배울리가 없었다. 여호와께 드려야 할 제물은 흠없고 순결한 것 대신 거저 줘도 받지 않을 그런 하자있는 것들만 바쳤다. 우상숭배가 극심했을 때는 이방신 몰렉과 힌놈을 위해서 자기 자녀까지 번제로 아낌없이 바치던 그들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안식일을 비롯한 영광과 권세가 훼손되는 것과 당신의 소유인 자녀들이 이방 신들에게 희생되는 것을 더이상 참지 않으시고 유다 왕 시드기야 11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멸망 시키신다. 이스라엘에겐 오랫동안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어서 언제든지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릴 수 있었으며 안식일을 지키는데 아무런 방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성전이 견고하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헛되고 죽은 믿음 때문에 성전의 파괴와 함께 나라도 멸망 당하고 말았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되었을 때 신앙으로 백성을 지도하고 다스릴 책임이 있었던 왕족들과 귀족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고 단지 그들에 의해 가혹한 착취를 당하던 가난한 농민들 소수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아이러니하게도 경작할 땅을 부여받게 되었다.
사실 일찍이 이사야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나라가 멸망하고 70년이 지난 후에 포로 된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시키신다 예언하였으나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된 판국에 살아남은 백성들은 그런 예언이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그나마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70년 동안 성전도 없이 안식일도 없이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은 상실해버린채 바벨론 땅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다니엘은 노인이 되어서 바사 왕 다리오의 신하가 되고 나서도 이미 수십년 전에 무너져버린 고국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방향으로 창을 열어 하루 세 번씩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바벨론의 포로된 백성들이 성전도 없이 안식일도 없이 70년을 보냈어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70년이 차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게 하신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책을 읽으면서 그 기한이 차는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서는 스스로 겸비하여 여호와께 은혜를 베푸실 것을 간구한다. 드디어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이 되는 해인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하늘의 감동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토로 귀환시켜서 성전을 짓도록 조서를 내린다. 이 사역에 학사 에스라와 아닥사스다의 술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앞장서서 지휘하고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여호와의 예언으로 백성들에게 하루빨리 새 성전을 지을 것을 촉구하였다. 느헤미야는 여호와의 안식일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서 안식일 새벽에 성문 밖에 진을 치고 앉아있는 이방 족속 장사꾼들을 향해 두 번 다시 안식일에 장사하러 얼씬거리면 모두 감옥에 집어넣어버릴 것이라고 엄포하면서 쫓아내었다. 그렇게 새롭게 지은 성전과 새롭게 안식일을 일으키고 나서야 백성들은 포로 된 가운데서도 다시 여호와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 것처럼, 70년 만에 성전과 안식일을 되살린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노아의 후손들이 노아 시대의 대홍수를 피하기 위해 높은 탑을 지은 것마냥 두 번 다시 성전과 안식일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여호와의 규례를 넘어서는 자기들만의 장로들의 전통을 4백여 년 동안이나 구축해 나갔다.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배 민족인 로마와의 굴욕적 화친을 통해 로마에서 보낸 총독의 지원으로 새로운 성전을 마련하였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의료행위까지 금지할 정도로 지나치게 세세한 율법들을 세워나갔다. 그런 장로들의 전통들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은 과부를 꼬드겨 가산을 성전에 바치게 하고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에게 매매를 허용함으로써 결탁하였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대 지배계층의 회칠한 무덤 같은 외식적인 껍데기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하시며 일부러 그들이 보도록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시곤 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세운 안식일 전통을 자꾸만 파괴하고 뒤흔드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세운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고 이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므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신다. 이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형식 보다는 비록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비롯한 이웃의 안위를 먼저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와 같은 코로나 집단 감염 시국에 이웃의 안전을 돌보지 아니하고 정부 지침에 반역하여 현장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회칠한 무덤이요 평토장한 무덤이며 마귀와 독사의 자식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에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으셨듯이, 한국의 저런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에게도 아무런 긍휼도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에 죽으시고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셨는데 이는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기존 유대인들이 껍데기만 남겨놓은 형식적인 안식일을 폐하시고 신자들에게 새로운 안식일을 지정하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과 제자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 대신 지켜왔으며 오늘날 주님의 날이라는 '주일'로 불리게 된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교의 안식일도 평일처럼 여기며 일해야 했을 것이고 이는 곧 유대인들의 분노를 자아내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배국인 로마의 황제도 섬기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야말로 온갖 핍박을 감수하며 주일을 지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창 핍박이 극심했을 때에는 그들은 카타콤이라는 지하동굴을 파서 몰래 주일을 지키곤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 하나 자기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비방하거나 저주하거나 무력으로 항거하지 않았다. 신앙 행위가 들켜 잡히면 끌려가고 재산을 뺏으면 빼앗기고 처형 시키면 처형 당하고 거주지에서 쫓아내면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이런 그들의 신앙이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오늘날 기독교회는 초기 성도들처럼 불이익을 감수할 각오는 되어있지 않고 그저 지금처럼 편안한 교회 생활을 유지하려는데만 집착한다. 자기들의 종교활동을 침해한다고 여기는 대상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하여 감히 신성한 주일 예배를 가로막는다며 악다구니를 쓴다. 자기들의 주일 현장 예배를 위해서라면 이웃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 심지어 자기 교회와 신분을 속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인식과 행태는 신천지 같은 해악을 끼치는 이단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교회의 이러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이미 세상에서 맛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독성물질을 내뿜는 교회, 3년이 지나도록 열심히 비료를 주고 가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못하는 들포도만 맺는 교회, 하늘에서 복음의 비를 숱하게 흡수하고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교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쇠몽둥이로 부서질 일만 남았다.
#20190901
#에스겔 44:9-31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새 성전의 모습을 보이신 후에 기존 레위인 제사장들을 모조리 전격 경질 시키시고 오직 사독의 후손 제사장들만 남기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제사를 위해 특별히 구별하여 세우신 레위인 제사장들이 어느새 본분을 잊어버리고 자기 지위와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고관들과 더불어 감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증한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에 앞장서서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이 더이상 당신의 제사를 드리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셔서 가장 고귀한 직분인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신다. 그러나 그들을 아예 성전에서 내어쫓지는 않으시고 성전 문을 지키는 일과 희생제물을 잡는 등의 일에는 봉사하게 하셨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백의종군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범죄한 레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다만 제사장 직분만 박탈하심으로써 그들로 자기 죄를 깨닫게 하고 더욱 심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차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특별히 세우신 복음 사역자들이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갈취하여 죄악을 일삼다가 드러나게 된다면, 교회는 마땅히 아무리 그가 담임목사라 하더라도 공중 앞에서 자기의 범죄의 분량에 따라 적절하게 징계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을 다시 제사장으로 복직시키지 않으신 것처럼, 교회에서 징계를 받은 목회자들은 자기의 복음 사역자 직분을 반드시 내려 놓아야 하며, 레위인들이 백의종군을 한 것처럼 교회를 위해서 일반 신자와 같이 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 번 제사장이 영원한 제사장이 아닌 것처럼,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가 아니다. 자기가 더이상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교회에서 목회하기가 불가능해질 때가 목사 직분을 내려 놓아야 할 때인 것이다. 그 시기를 알지 못하고 억지로 담임목사를 부여잡고 있게 되면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죄를 짓게 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 직분을 내려놓는 부끄러움과 세속적 손해는 잠깐이나, 이로 말미암아 자기 영혼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면 아낍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 중에서 오직 사독의 자손들만 제사장으로 남기시는데, 그것은 그의 자손들이 다른 레위인들의 범죄에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다른 레위인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따돌림과 괴롭힘 등을 받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지키는 것이 참된 유익임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독의 자손들이 그렇게 신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조상인 사독의 신실함 덕분일 수도 있다. 제사장 사독은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다윗을 섬겼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쫓길 때도 다윗을 저버리지 않고 그를 위해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러나 제사장 아비아달은 솔로몬의 시대에 솔로몬을 대적하여 일어난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가 솔로몬으로부터 제사장 직을 박탈 당하고 귀향을 가게 된다. 그러나 사독은 솔로몬의 편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제사장 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독은 하나님의 율법이 자기 일생에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몸소 경험하였기 때문에 자기 자손들에게도 수시로 이를 단단히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요나답의 자손들이 요나답의 명령을 받들어 대대로 집을 짓지 않고 천막에서 지내며 포도주도 먹지 않았던 것처럼, 사독의 자손들은 사독이 철저하게 가르친 하나님과 그 율법을 대대로 준수하며 내려왔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 한 명이 천 대까지 끼치는 신앙의 유익이 이런 것일 것이다. 교회에서 전통과 관행이라는 이유로 성경을 거스르는 죄악이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질 때, 그것을 믿음으로 거부하고 정당히 지적하며 시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인 것이다.
하나님의 새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섬기게 될 사독의 자손들은 성전 안에서는 의관을 정제하고 머리를 단정히 하며 술을 멀리하고 아내도 신경써서 맞이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오늘날에는 이런 구약의 제사법이 폐지되었다고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볌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비록 구약의 저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행하지는 않더라도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만큼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였는지는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의 외적 요소를 잘 분별하여 영과 진리로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외적으로도 엄숙하게 드러나야 할 것이다. 내면이 중요하다고 하여 형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비록 사독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새 성전의 제사장으로 세워졌어도 그들의 제사장 직분은 온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 내려왔다 하더라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 중 한 명에 불과해서 그 제사장 직분을 영원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의 제사를 무언가 죄사함의 효력이 있어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단지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어음처럼 그들의 죄악을 유보하신 것에 불과하다. 구약에서의 참 제사장 직분은 오로지 멜기세덱, 즉, 그 당시에 현현하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으며, 그분이 성육신 하셨을 때 멜기세덱의 참 제사장 직분을 다시 이으신 것이었다. 구약시대에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중단된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에게는 죄사함의 효력이 있는 참된 제사는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