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지 |
제 목 |
기고자 |
주요 활동 | |
(232-239) |
藝術에 對한 이메지의 役割 |
(1) 權煥 |
"좌파 민족문학을 주도했던 인물.민족시인으로 칭송" 저항시인 이육사와 문학동인. 1903∼1954. 1927년 일본 경도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중 사상관계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고, 잡지 《무산자 無産者》의 간행에도 관여하였다. 극좌파인 김효식(=김남천)·임화 등과 손을 잡고 좌파계열 프로문학의 주도권을 잡기도 하였다.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 등의 기자로 활약하다가 2차에 걸친 카프검거에 또 다시 연루되었고, 출옥 뒤에는 경성제대 부속도서관 사서 등의 일을 하였다. 광복 뒤에도 한동안 문학가동맹에 가담하하였으나 끝내 월북하지는 않았다. | |
(26-30) |
日蘇中立條約의 意義 |
(2) 洪鍾仁 |
평양 출생. (1929 ∼ 1940 / 1945 ∼ 1963.5).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3년 재학 중 3ㆍ1운동에 가담, 1920년에 퇴학당한 뒤 오산중학에 들어가 1921년에 졸업. 방응모의 序中會 출신. 1929년 조선일보 평양지국에서 근무중 사회부 기자로 발탁돼 1938년 사회부장과 체육부장을 맡았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10월부터 每日新報에서 사회부장 겸 정치부장, 체육부장 등을 맡았다. 광복 후 조선일보로 복귀,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겸 정경부장, 편집국장 겸 정경부장 등을 맡아 조선일보 재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 |
(174-178) |
<수필 잡문>村鷄江戶記 |
(3) 李熙昇 |
국어학자. 1932년 이화여전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조선어학회 간사 및 한글학회 이사에 취임하였다.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간사(이사)와 간사장(대표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과 ‘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 ’(1937년 완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 검거되어 일본이 망할 때까지 복역하고 8·15광복 후 서울대 교수에 취임하였다. | |
(72-85) |
나치스의 國家社會 |
(4) 朴克采 |
"조선시대(경제사)를 연구한 좌익계열 경제사학자. 한때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다" 월북후 김일성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정치경제학을 강의. | |
(186-187) |
<수필 잡문>關玉廟 |
(5) 李在郁 |
"1935년 3월 파업을 선동하는 등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권영태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독립기념관 자료- 경성 종로경찰서 高秘)" | |
(114-138) |
<座談會> 新文化드러올때 |
(6) 李能和 외 5인 |
"이능화는 손진태 등과 함께 민족사학의 계승연구에 노력한 불교계 인물이다" "경술국치 전후에 일기 시작한 불교계 계몽운동의 흐름을 탄 그는 불교포교 내지는 민족문화수호운동의 핵심체로서 "불교진흥회"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그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하였을 때 이를 수락하여 15년 동안 조선사편찬에 종사하는 한편, 종교를 비롯한 민족문화 각 분야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정리, 연구하고 이를 후학에 전수하기 위하여 원고를 집필하였다. 한국학 발전에 신기원을 이룩한 적지않은 저서의 원고는 거의 다 이 무렵에 집필된 것이다.1931년 독립운동가 박승빈·오세창 등과 더불어 계명구락부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의 계몽과 앙양에 앞장섰으며, 이 무렵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조선종교사를 강의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 | |
(170-174) |
<수필 잡문>年輪 |
(7) 李陸史 |
본명은 이원록. 조선/조광 간부였던 이원조의 친형. 3형제 가 무장투쟁 조직인 의열단 가담. 이육사는 총 17차례 투옥. 이 글 실은 이듬해에 또 다시 수감된 후에 옥사 (경찰 신문조서 클릭). 이육사(李陸史, 본명 이활 李活, 이원록, 이원삼 1905-1944)시인, 독립운동가.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생. 진성 이씨. 퇴계 이황의 14대 손 5세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문 수학, 그후 신학문 수학, 20세 때 대구 남산동 662 번지로 이사 1927년 형(원기), 동생(원조-문학평론가, 원일, 폐간 때까지 조선일보 기자)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군정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독입운동을 하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검거, 이 때 학생인 원조는 풀려 나오고 3형제는 2년 7개월간 옥고를 치름 (아호인 '육사'는 이 때의 수인 (囚人) 번호 64 혹은 264번의 음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9년(26세)에 조선일보 대구 지사를 경영하면서 기자로 활동, 1930년(27세) 대구격문사선에 연루되어 원일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피검,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외삼촌의 독립운동 자금관계로 만주에 들어갔다가 군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해 귀국, 원조를 포함한 3인을 데리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3인은 3개월만에 돌아오고 육사는 봉천에 머물렀다. 1932년(29세)에 만주의 군관학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입교, 30세 졸업. 31세에 서울서 일본헌병에 피검되는 등 생전 17회 이상 투옥됨. 데뷔작은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 발표작인 <말>이다. 그후 [조광]지에 <계절의 표정> 을 발표한 1942년까지 약 13년간 작품활동을 함.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옥사. 이상화, 윤동주와 함께 대표적 저항시인. | |
(86-90) |
나치스의 文化政策 |
(8) 姜世馨 |
일본와세다대 수학, 독일베를린대 철학박사. 1938년 8월 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동지회(秘密結社 興業俱樂部)사건으로 경찰에 검거(국사편찬위, 경성지방법원 편철문서). | |
(164-168) |
<수필 잡문>나의 處世道 |
(9) 宋順鎰 |
"일제하 농민들의 고난을 다룬 시작들을 남김" 다음은 1932년 잡지 동광에 실린 "농촌애상" 이라는 시의 일부임. "밀죽도 흖지안어 굶다싶이 일하고,그래도 점심때라 뷘집에 돌아가니,학교갓든 아들아이 마당에서 쿨적이며, 밀팔아준다드니 「수업료」를 웨안주워,속이기만 한다고 우리선생 가라는데... 온식구가 매달려서, 봄누에를 첫다해야, 뵈한자도 못사는걸, 누에값도 안되는걸, 가을누에 또치라고, 면서기는 야단이지. 무엇을 바라고 우는지, 나는 입이 잇어도 말을 못합니다. | |
(362-366) |
(뉴질랜드) 마리오族 虐殺史 |
(10) 張德三 |
검색불가. 클릭 | |
(264-341) |
만증엄 |
(11) 洪起文 |
폐간당시 조선일보 간부. 조부는 국치때 자결. 1935년 조선일보 학예부장, 1937년 9월 논설위원, 1938년 학예부장 겸 사업부장을 역임하는 등 폐간 때까지 조선일보에 재직. 1946년 11월부터 1948년까지 합동통신 전무, 취체역을 맡았다가 1948년 11월 조선일보로 다시 돌아와 전무이사 재임 후 월북했다. 일제시기 저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임꺽정'(조선일보에 연재)의 저자로 김일성 집권초기 북에서 부수상을 지낸 독립운동가 洪命熹의 아들이며, 국어학자로서 신라 향가 연구에 족적을 남겼다.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교수, 사회과학원장,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등 요직을 맡았다. 북에서 조선왕조실록 편찬. 한편 홍명희의 부친은 경술국치 때 자결함. 유언은 "친일하지 말라"였다 하며, 홍명희와 홍기문은 조선일보 폐간 이후에도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고 함. | |
(312-317) |
<職域의 神技奉公> 專賣局煙草女工 |
(12) 申基碩 |
1908∼1989. "해방후 정치학계를 이끈 1세대의 대표주자". 학자·정치인. 1919년 국민학교 졸업반 학생으로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8년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였다. 1931년 대학내의 反帝同盟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 |
(182-186) |
<수필 잡문>菜圃 |
(13) 韓黑鷗 |
1909∼1979. 수필가·번역문학가. 본명은 世光. 평양출생.보성전문 상과졸. 1929년 도미하여 템플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홍콩에서 발간되던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계몽운동지《대한민보 大韓民報》에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9년 흥사단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된 일을 계기로 글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항일을 목표로 발간된 잡지《개벽》에 미국 흑인시를 최초로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수필 '보리'의 한구절 "너는 차가운 땅속에서 살아왔다"에 나와 있듯이 고난을 견디며 끈질기게 버티는 생명력을 다룬 작품들을 남겼다" | |
(268-282) |
在滿 ??? 過去와 現在 |
(14) 申瑩澈 |
中國에서의 상해 임시정부 산하 및 후원 단체(출전:독립운동사 임시정부편) <출전>동아일보 1929년 9월 28일자 기사. " 華東留學生會 任員 改選 내용을 쇄신 긔관잡지도 발간 중국남방(南方) 각처에 유학하는 우리 유학생으로써 조직된 화동 한국 유학생회(華東韓國留學生會)는 그 전에 남경(南京)에 두엇섯는데 금년 여름부터는 상해로 옴기여 왓스며 임원은 전부를 다시 뽑아셔 執行委員長 鄭光好, 庶務委員 朱??, 編輯委員 朱耀翰, 辯論委員 趙允寬, 財務委員 邊東業, 社交委員 秦愛敬, 運動委員 申瀅徹 등의 제씨가 당선되야 모든 사무를 규모잇게 새로 착수하야 진행중이며 긔관잡지 「화동학우」(華東學友)도 오는 일월부터 발행할 터인데 이 잡지에 대하야는 내외디에 잇는 유지들의 투고하기를 바란다 하며 투고는 상해양수포호강대학(上海楊樹浦?江大學) 안에 잇는 주요한(朱耀翰)씨에게로 보내이면 된다더라 ( 상해특신) | |
(318-325) |
滿洲의 風俗 |
(15) 趙賢景 |
| |
(104-113) |
日泰貿易事情 |
(16) 吳天錫 |
1901∼1987. "해방후 이대명예교수.아동교육 중심의 교육기틀을 다진 인물.교육부장관 역임.교육철학 전공" 평안남도 강서출생. 오산학교 교장(위의 홍명희도 이곳에서 교편을 잡음) 인 남강 이승훈 등과 함께 활동한 거물급 독립운동가 기선(基善)의 아들이다.소년기에 일본에 국권을 침탈당하는 비운을 체험하면서 조국애를 키우고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에 힘썼다.1932년부터 4년간 보성전문 교수로 재직했으나,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탄압이 지속되자 중국 상해로 피신하였다. 부친 吳基善은 감리교회 목사로 동아일보 일장기 사건의 최승만 등과 함께 동경YMCA사업을 지도하였고, 3·1운동을 맞아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동거사를 추진하는 등 시위에 앞장섰다. 1921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일본인들의 한국인집단학살사건이 벌어지자, 재해동포위문단을 조직하여 본국 교회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피살자가족의 위문과 구호사업을 적극적 전개하였다. (한국정신문화원) | |
(306-311) |
東滿과 朝鮮人 |
李鶴城 |
일제시기 조선일보가 가장 많이 다루었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만주이주동포" 문제였던 듯. | |
(218-230) |
湛軒燕錄 |
洪湛軒 |
조선시대 실학자의 글을 옮긴 것임. | |
(334-385) |
滿洲新文學과 作家群像 |
吳菁蕙 |
검색불가. | |
(388-390) |
<猝富列傳> |
朴華燮 |
검색불가. 친일파들을 공격하기 위한 연재물이었던 듯(클릭) | |
(32-37) |
발칸戰後에 올 地中海의 制覇戰 |
(1) 柳光烈 |
친일로 안티조선에서 지목하는 인물이라 함. | |
(64-71) |
米國의 어제와 오늘 |
(2) 李卯默 |
"전주 이씨 및 모대학 웹은 한국을 빛낸 인물로,안티조선은 총력조선연맹 명단 등재 사실을 근거로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었음" | |
(298-304) |
協和會의 本質과 그使命 |
(3) 金泰昊 |
검색불가. 안티조선의 친일파 명단 등에도 없음. | |
(157) |
明朗愛國班 |
(4) |
| |
(92-98) |
나치스의 經濟政策 |
全承範 |
검색불가. | |
(394-397) |
<樂壇月評>(전5회):2)新人音樂會를 듯고서 |
桂貞植 |
1904∼1974.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교향악단의 지휘자. 평양출생. 1920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 1929년 독일의 Wurybury音樂學校의 바이올린과를 졸업하였고, 1935년 스위스 Basel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해 귀국하여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5년 9월 광복 후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수도극장(지금의 스칼라극장)에서 베토벤교향곡 5번으로 창단연주의 지휘를 담당하였다. | |
~41.12 |
<수필 잡문>我觀 五百年 黨史(全7回) |
木春山人 |
검색불가. "학령산인"은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가 조선일보 /조광에서 쓴 필명이라 함. | |
(348-356) |
<소설>골목안 |
古丁 |
검색불가. | |
<화보>一列勵行 |
|
| ||
(148) |
비와 애기 |
|
| |
<화보>時報 |
|
| ||
(168-170) |
<수필 잡문>女車掌 |
趙容萬 |
검색불가. | |
(264-341) |
滿甑奄?/TD> |
|
| |
(162-164) |
<수필 잡문>강아지와 ?/TD> |
李瑄燮 |
검색불가. | |
(284-296) |
滿洲國 經濟政策의 基本動向 |
黃鍾律 |
검색불가. | |
(24-25) |
貯蓄運動에 對하야 |
|
| |
(40-46) |
獨逸進擊의 다음 方向 |
徐康百 |
검색불가. | |
(178-182) |
<수필 잡문>滄山의 三朞祭 |
河淸 |
검색불가. | |
(358-361) |
國境綺譚 |
朴弼元 |
검색불가. | |
<화보>滿洲의 初夏 |
|
| ||
(149) |
徒步奬勵 |
|
| |
(328-332) |
南滿 한바퀴 |
李貞凉 |
검색불가. | |
(72-103) |
나치쏴奄?/TD> |
|
| |
(100-103) |
하우스호페르博士 |
프리데리크 손던 |
| |
(54-62) |
獨逸의 今後動向 |
윌리엄헨리쳄버린 |
검색불가. | |
(48-53) |
岐路에 선 土謚?/TD> |
成謚?/TD> |
해독불가. |
첫댓글 이거 한류게시판에서 퍼온 거군요^^
열우당하구 뇌사모만 조선일보는 친일신문이라고 떠들어댑니다..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안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조선일보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볼것입니다. 요즈음 tv에서는 좌익성향을 드러내며 현정부를 옹호하는 것을 여러번 느꼈는데, 그래도 조선일보는 사회의 목탁이라, 잘 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 같아, 내가 신문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알았지요 험험험님이 혹시 흠흠흠님?
조선일보봅니다...
넵^^
흠, 이런 중요한것을,, 국민들은 다,,,,,,,,,,,압니다. 알면서 모른척 우기는 일부와 아무생각없는 일부빼고는, ^^*,
색갈로 따지면 발갱이들이 조선일보 싢어 하지요 나는 조선일보 만 고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