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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을 했다. 정확히는 자진 퇴사. 뭐가 됐던간에 하여간 할 일이 없었다. 무얼 하고싶은지도 그닥 정해둔 것이 없고.
그러니 괜히 시골에서 귀농 중인 큰 형에게 뭐 도와줄 것이라도 없나 물었던 것은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쿵- 하고 조수석 문이 닫히며 초록색의 차체가 진동한다. 잊지 않고 안전벨트를 곧장 맨 조카가 무어라 재잘대기 시작했다.
"아, 삼촌.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귀찮게 버스 안 기다려도 되네. 걸어갈 필요도 없고."
여기가 영 시골이라 버스 배차 시간이 길다느니, 또 집은 외진 데 있어 버스를 타도 걸어다니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느니. 학원 일과를 막 끝마치고 생글생글 웃는 조카가 시키지 않아도 곧장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됐어, 빨리 집이나 가자. 나 왔다고 너희 엄마가 소고기 사놓으셨대."
"엥? 진짜? 웬 일로 큰 결심 하셨네."
음, 조카가 소고기는 영 아니던가? 좋아하는 낌새가 그다지 없었다. 뭐, 그래도 고기인데 막상 가면 잘 먹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시골에서 그나마 번화한 거리를 넘어가, 슬슬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었다.
도착 하자마자 짐만 풀고 조카를 데리러 달려온 통에 영 눈에 익은 길은 아니었지만, 대충 널찍하게 짜여진 길도 그렇고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면 그다지 복잡한 과제는 아니었다.
조금 뻘쭘한 점이라면 아까까지 잘만 조잘대던 조카가 차 앞 유리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일까. 음, 요녀석이 삼촌을 오랜만에 봐서 어색해 하나? 그렇다기엔 눈치보며 스마트폰을 만지는 것도 아닌데.
뭐 학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피곤한거겠거니 여기고 운전에 집중을 하는데.
"삼촌, 아빠나 엄마가 뭐 쪽지를 줬다던가, 아님 말로 규칙 같은 거는 얘기 해줬어?"
...규칙?
"아니? 뭐 들은 건 없는데. 도착하자마자 짐만 풀고 너 데리러 온거라. 딱히 뭔갈 받을 시간도 없었고."
"...그래? 음, 그럼 이따가 아빠가 알려주긴 할텐데, 그 전에 간략하게 설명 해줄게."
음, 왜 저리 분위기를 잡지? 애가 이런 걸로 농담이라도 할 애는 아닌데. 뭐 집에 건드려선 안 되는 귀한 것이라도 있는걸까.
"삼촌, 우리 마을에서 지낼거면 알아야 할 게 있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달 정도 머무를거면, 꼭 외워 둬야해."
"...그게 뭔데?"
1. 우리 마을은 여기 시내랑 동떨어져 있는데다 밭도 되게 많은 것 치고는 꽤 넓고 사람도 많아. 다들 친절한 분들이라, 누가 인사하던 꼭 받아주는게 좋아.
근데 이건 뭐 당연한거고, 중요한 건 사람만 많은 건 아니라서 누가 인사 하면 얼굴 한 번씩 꼭 쳐다봐.
그 때 가보면 알텐데, 인사하면 안 되겠다 싶으면 무시하고 하던 일 계속 해. 아는 목소리여도 포함이야.
2. 가끔 애들이랑도 마주칠텐데, 걔네가 반갑다면서 초록색 사탕 주면 받자마자 씹어먹고 다 먹은 거 보여줘.
집에 돌아온 다음엔 주방 찬장에 타이레놀 있으니까 세 알 꺼내서 먹고 자면 돼. 좀 더 먹어도 되는데, 적게는 먹지 말고. 부족할 일 없으니까 팍팍 꺼내먹어.
3. 마을 안에 정육점이 있는데, 가끔 거기 주인 아저씨가 품질 좋은 고기가 들어왔다면서 음, 그 왜 참치 해체하듯이 공연하시는 경우가 있거든.
꽤 유명한 구경거리라 보통 전 날부터 어디서든 소문이 들려올거야. 돼지나 소를 썬다고 하면 보러 가. 꽤 재밌어. 끝나면 고기도 나눠주시고.
근데, 누구한테 잡고 물어봐도 뭘 해체하는지는 안 알려줄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정육점 근처에도 가지 마.
가서 구경 해도 상관은 없는데, 해체 끝나고 주위 사람들한테 고기 나눠준다고 아까 얘기 했지?
우리 가족은 그거 안 먹으니까 삼촌이 먹을거면 가도 돼.
4. 어디 갔다가 머리 아프면 타이레놀 대신에 소화제 먹고 손 따면 돼. 그거 머리 아픈거 아니거든.
그래도 계속 아프면 타이레놀 하나 빻아서 눈에다 넣어. 먹는 것보단 그게 나아.
5. 우리 집 앞에 있는 김밥집 참치김밥 되게 맛있으니까 꼭 사먹어. 아, 말 하니까 또 생각나네.
아... 먹고싶다. 꼭 사먹어. 먹으러 갔으면 내 것도 포장해서 방에다 놔줘. 그거 진짜 되게 맛있거든. 꼭 사먹어. 알겠지? 어떻게 만든건진 모르겠는데 진짜 환상적이거든.
6. 어디에 있던 꾀죄죄한 아저씨가 동냥하고 있으면 동전 하나씩 던져줘. 우리집 안에 동전 상자 있으니까 나갈 때마다 넉넉하게 네 개씩은 들고 다니고.
불쌍하다고 여러개 주진 말고. 딱 500원 동전 하나씩만. 더 주면 걔네 나중엔 500원 하나만으로는 만족 못 해.
혹시 초록색 동전 발견하면 밖에다 던져버리고 그 날은 밖에 나가지 마.
7. 우리 마을 광장이 꽤 넓어서, 매월 1일, 11일, 21일에 거기에 장이 서. 아무거나 사먹어도 괜찮은데, 해산물은 사지 마.
실수로 샀으면 10L짜리 일반쓰레기 봉투에다 담아서 버려.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단 버리지 말고. 그거 초록색이라 우리 지역에선 못 팔게 막아놨어.
8. 우리 집은 상추, 배추, 고추, 고구마, 감자 이 다섯개만 키워. 아빠나 엄마가 어디 다른 작물 밭으로 가라고 하면 듣지 마.
아마 어디로 가야 할 지는 알게 될텐데, 갈 때는 괜찮아도 돌아올 때는 걸어서 못 오니까.
9. 밭일 하다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트랙터 타고 수고가 많다느니 인사 하실텐데, 처음 말한 것처럼 열심히 인사 받아드리면 돼. 초록색 트랙터만 빼고.
우리 마을, 아니 이 지역 전체에 초록색 트랙터는 못 들여와. 발견하면 누가 타고있던 무시해. 어차피 거기서 못 내리니까 걱정 말고 하던거 하면 돼.
아, 맞다. 가끔 동네에 초록색 자동차도 돌아다니는데, 그거 보이면 안 보이는 척 무시하면 돼. 누가 타있던 간에 트랙터처럼...
"..."
조카가 갑작스레 말을 쏟아내던 입을 굳게 다문다.
"아 씨발, 삼촌 내일 온다고 했었지..."
노을빛이 반사되는 찬란한 초록빛의 차체가 흔들거리며, 마을을 지나 지평선을 향해 달려나간다.
첫댓글 바보조카ㅠ
마 니 바보가
조카야ㅠ
조카 의심하고 있었는데 반전이네ㅠ
순둥이 ㅜ
잘가게
이 바보야 ㅠㅠ
아이고 바보야ㅠ ㅠㅠㅠ 착한 초카 풀어주시오 ㅠㅠㅠㅠㅠ
ㅅㅂ 반전 뭐야 무사와요..
삼촌이 초록색을타고와뷰렷네
와 재밌다 ㅋㅋㅋㅋㅋㅋㅋ
착한 조카야!!!!! 🥹
샤갈 뛰어내려줘요
참치김밥 너무 강조해서 뭐 중독된줄 알았는데 걍 순둥이먹보 조카였노 ㅠ
헐 재밌다 반전이네
ㅠㅠㅠ조카야...
참신해
애기 돌려보내!!!!!!!!칷씌 이초록악마새끼야!!!!!!!!!
가는길에 참치김밥 사줘요
조카 살려죠 ㅠ
조카돌려줘ㅜ
말 개많어
조카돌려조라시발로마
헐 ㅠㅠ 개소름
아이고 간 다 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