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 산책할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부암동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안국역에서 내려 삼청동을 구경하다 북악산 산길을 오르면 부암동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부암동은 덜 개발되어 여전히 도시 속에서도 숲이 우거진 곳입니다.
이 숲길 사이사이를 걷다보면 숨겨진 맛집과 갤러리가 눈에 많이 띕니다.
오늘은 산책 중 발견한 레스토랑 '아트 포 라이프'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아트 포 라이프는 부암동 북악스카이웨이 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 겸 카페로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데요.
문을 두 개 통과하고 시소 같은 조형물이 설치된 작은 안뜰을 지나
계단을 통해 내려오면 숨겨진 입구가 보입니다.
뜰 벽면에 쓰인 글씨. ‘아포라’. 무슨 뜻일까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붉은 벽면에 가득히 붙어있는 사진들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주인 분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이었습니다.
카운터에 쌓여있는 수백 장의 음반처럼 역사가 느껴지는 양이었죠.
큼지막하고 두툼한 나무테이블 역시 억지로 광을 낸 게 아니라
쌓여온 시간에 의해서 윤기가 돌았는데요.
문득 가게 이름의 ‘아트’라는 표현이 저에게는 조금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뜨내기 손님인 내가 이곳에서 카메라를 들어도 될까?
카메라를 들고 망설이고 있으니 주인 아저씨께서 자신도 사진을 전공했다고,
얼마든지 사진 찍어도 된다고 웃으십니다.
이곳을 운영하시는 주인 아저씨께서는 파리에서 음악을 전공으로 하시면서
김중만씨와 함께 사진을 부전공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메뉴설명을 하시는 주인 아저씨의 예사롭지 않은 발음과 미소에서
각박한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로움을 느꼈는데요.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까지 저는 카메라에 가게 이곳 저곳을 담았습니다.
가게 안의 멋진 소품들에 사진 욕심이 나서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지만,
어째 생각만큼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내 카메라는 어두운 데에서 잘 안 찍혀.
저번에 봤던 그 렌즈를 살걸.’ 하고 투덜대고 있었는데요.
어느새 다가오신 주인 아저씨가 추억을 회상하는 듯
"한참 사진 찍고 싶을 때지"하고 멋쩍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 카메라를 가져가시더니 직접 카메라 세팅을 해주셨습니다.
주인 아저씨께서는 가끔 사진 강의를 맡으셨다고 합니다.
"요즘은 카메라가 잘 나와서 사진 기교가 예전만큼 중요하지는 않죠.
그래도 학생들 가르칠 때 강조하는 게 있어요.
처음부터 광각렌즈나 망원렌즈에 익숙해지지 말아라.
‘아웃포커싱’보다는 있는 그대로 찍어라.
사진은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보는 시선을 찍는 거거든요?
카메라의 눈을 최대한 사람의 눈처럼 여겨야 자신만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먼저 편하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세요."
조금 부끄러워 졌습니다. 저는 예술이라는 게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긴장했었거든요.
제가 갖고 있었던 예술에 대한 이미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세상의 패러다임을 다 바꿔 놓을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트 포 라이프의 주인 아저씨께서는 ‘Art for Life’. 삶을 위한 예술을 말하십니다.
예술이란 일상적인 삶의 순간을 자신의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라고요.
주인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니, 예전에 보았던 브레송의 전시회가 생각났습니다.
소형 라이카 카메라와 50mm렌즈만 들고 ‘결정적 순간’을 포착했던
리얼리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그는 트리밍이나 인화 조작을 거부하며 간편하게 찍는 ‘스냅사진’이란 개념을 생성한 작가입니다.
브레송은 평생 소형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세계 곳곳을 다녔습니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하다 어느 한 순간, 직관적인 판단력으로 셔터를 눌렀죠.
단 한번도 현실을 조작하거나 어떤 것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대상을 관찰했습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연출이 없습니다. 그는 억지로의 순간을 싫어했거든요.
그는 특이하게도 당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일반적인 통념이었던
특이한 사건이나 사고를 극단적으로 강조하거나 과장하는 것을 배격하고,
일상적인 사실을 평범한 시선으로 촬영한 작가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왕의 대관식 촬영에서 모두가 조지 6세를 보고 있을 때,
그는 밤새 자리를 잡고 기다리다 막상 대관식에서 잠이 든 사람을 촬영한 일화가 있습니다.
모두가 주목하는 휘황찬란한 예식보다
그 주변의 일상적인 상황이 본질을 잡아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지금까지 한번도 '사진' 그 자체에 정열을 쏟은 적이 없다.
사진에서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점은 아주 짧은 한 순간에 나타나는 피사체에 대한 흥분과 아름다움을,
내 자신을 잊은 상태로 찍는 것이다. 즉, 본대로의 자연스런 배열을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사진이란 현실의 리듬과 변화를 포착하는 수단이다.
눈이 피사체를 정하면 카메라가 그것을 포착하여 필름에 감광시킬 뿐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에세이집 '마음의 눈'에서
그의 사진 속에서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찬란하고 짜릿하게 존재합니다.
브레송의 사진철학을 대표하는 말인 ‘결정적 순간’은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란 말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일상적인 삶을 재발견하라는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도 언제든지 결정적 순간이 될 수 있기에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하라는 뜻으로요.
이윽고 주문한 요리가 도착했습니다.
제가 주문한 요리는 아랍식 빵과 신선한 토마토 샐러드, 천송매 파스타였는데요.
아저씨께서 말하신 사진 철학처럼 요리는 ‘있는 그대로’의 맛을 살리는 건강한 음식이었습니다.
토마토에 뿌려진 향신료는 토마토의 신선한 맛을 더욱 감칠맛 있게 배가했고,
화덕에서 갓 구운 듯한 빵은 식전의 허기를 따뜻하게 감쌌습니다.
백년초선인장과 솔잎, 매실을 넣은 천송매 파스타는
맛은 물론 소화가 편해 즐거운 저녁이 되었습니다.
식사 후에 가게 앞 정원을 산책하며 다비도프를 꺼내 물었습니다.
여름 밤의 후텁지근한 바람도 기분 좋게 느껴지더군요.
담배를 피우며 주인 아저씨께서 하신 말씀을 곱씹으니
이 곳의 인테리어가 처음처럼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아트 포 라이프’의 ‘아트’한 분위기 자체가
아저씨의 삶의 궤적이고 아저씨 본인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으니까요.
예술이란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욱 풍성하기 위한 것이다.
‘아트 포 라이프’라는 가게 이름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덕분에 다시 힘차게 살아갈 용기를 얻고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