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던 것은 마당 앞에 서 있는 사립문이었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그 문은 기왓장도 없고, 번드르르한 손잡이 하나 달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삐걱거리며 열릴
때면 바람이 잠깐 쉬어가는 듯했고, 그 틈 사이로 나는 언제나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먼저 마주할 수 있었다.
사립문은 굳이 잠그지 않아도 누가 들어오는지, 누가 나가는지,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았다. 담장 없는 집, 열린
마음으로 사는 시대였다. 가끔은 윗집 강아지가 문을 머리로 밀고 들어오기도 했고, 옆집 아저씨가 된장 냄새를
맡고 장독대로 불쑥 들어와 "익었네, 아주 잘됐어" 하며 웃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런 사립문이 작은 연극 무대가 되기도 했다. 한밤중 몰래 송아지를 훔쳐가던 도둑이 사립문을 넘다가
발이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 나왔고, 도둑은 잡혔다. 그때부터 우리 마을 사람들은
사립문을 "의로운 문"이라 부르기도 했다. 누군가 장난으로 문짝 위에 감자를 얹어두면, 다음 날엔 그 감자가 누룩처럼
사라지고 대신 누군가의 고구마가 올라가 있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 아파트 현관 앞에는 사립문 대신 전자동 도어락이 있다. 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리고, 카메라를 통해
누군지를 확인하고야 안심한다. 내 아이는 '사립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저 그림책 속 배경처럼 낯설게 느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아이에게 말해 준다. "예전엔 문도 마음처럼 열려 있었단다. 바람도, 사람도, 인사도 그 문을 지나 다녔어."
그러면 아이는 묻는다. "그럼 도둑은 어떻게 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땐 도둑보다 이웃이 더 가까웠단다."
사립문은 없어졌지만, 그 시절 문 너머로 들려오던 웃음소리, 서로의 안부를 묻던 따뜻한 목소리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걸려
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사립문 소리처럼, 그리움도 삐걱이며 마음 한구석을 조용히 열어젖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