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apolitan&no=49532
.
.
.
.
.
.
.
.
.
아빠는 항상 나무 냄새가 났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안아줄 때도, 머리를 쓸어줄 때도, 잠자리에서 이불을 덮어줄 때도.
셔츠에도, 손끝에도, 심지어 숨결에서도 은은하게 풍기는 나무 향.
나는 그게 좋았다. 아빠의 냄새니까.
아빠는 가구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목공예가.
나무를 깎아 의자를 만들고, 선반을 만들고, 가끔은 작은 인형도 깎았다.
동네에서는 꽤 유명했다.
"저 집 아버지한테 맡기면 못 만드는 게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나는 그런 아빠가 자랑스러웠고, 나무 냄새가 밴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앞에 나타나는 게 조금 부끄러웠고, 그러면서도 좋았다.
그런 아빠가 돌아가셨다.
지난 화요일이었다.
향년 67세. 사인은 심근경색.
작업실 의자에 앉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손에는 조각도가 쥐어져 있었다고.
나무를 깎다 죽은 거다. 아빠다운 죽음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정리를 위해 아빠 집에 왔다.
혼자 사셨으니 짐 정리는 내 몫이었다.
아, 맞다. 나를 소개하자면.
이준영. 스물네 살. 대학원생.
엄마는 내가 다섯 살 때 사고로 돌아가셨다.
기억이 거의 없다. 사진으로만 알고 있다.
그래서 아빠가 엄마 역할까지 했다.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학교 상담도 오고.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제외하면.
매일 밤 피노키오를 읽어줬다.
다른 동화는 안 읽어줬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잭과 콩나무. 하나도 안 읽어줬다.
오직 피노키오만.
내가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심지어 중학교에 올라가서 "이제 됐다"고 했을 때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준영아, 오늘은 피노키오 안 읽어도 돼?"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귀엽기도 한데, 그때는 솔직히 좀 질렸다.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은 들었으니까.
근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빠가 읽어주는 피노키오는, 매번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처음엔 원작에 충실했다.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피노키오를 만들고,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고, 모험 끝에 착한 아이가 되어 진짜 사람이 되는 이야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느 날은 피노키오가 사람이 된 뒤에도 나무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느 날은 피노키오가 거울을 보면 잠깐씩 나무 얼굴이 보인다고 했다.
어느 날은 피노키오가 자기도 모르게 한쪽 팔이 굳었다가 풀린다고 했다.
어느 날은, 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세상에서 가장 진짜인 아이야."
원작에 없는 대사였다.
나는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아빠가 지어낸 거라고 넘겼다.
어릴 때 아빠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빠, 피노키오는 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아빠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글쎄. 아마 사람이 되어야 아빠랑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지."
"근데 나무여도 가족 아냐?"
"...그렇지. 나무여도 가족이지."
아빠의 눈이 잠깐 빨갛게 물들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어릴 적 기억이니까.
아빠 집은 시골 외진 곳에 있었다.
2층짜리 낡은 양옥.
1층은 거실과 부엌, 2층은 아빠 방과 내 방. 그리고 1층 뒤쪽에 작업실.
정리는 2층부터 시작했다.
아빠 방은 깔끔했다. 옷가지 몇 벌, 낡은 라디오, 서랍 속 안경 두 개.
서랍 깊숙이 엄마 사진이 있었다. 젊었을 때. 예쁜 사람이었구나.
뒷면에 아빠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안하다. 꼭 해낼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엄마가 죽고 나서 쓴 건가.
나를 잘 키우겠다는 다짐이려나.
내 방은 그대로였다.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 간 뒤로 한 번도 안 바뀌었다.
책상 위에 피노키오 동화책이 놓여 있었다.
표지가 너덜너덜하다. 수백 번 읽은 흔적.
이건... 가져가야지.
1층으로 내려왔다.
거실, 부엌, 작업실 순서대로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
거실은 금방 끝났다.
부엌도 대충 정리했다.
문제는 작업실이었다.
작업실 문을 열자 익숙한 나무 냄새가 밀려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냄새. 아빠 냄새.
작업실은 넓었다. 원래도 넓었지만, 이렇게까지 넓었나?
벽면 한쪽에는 공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가운데에 커다란 작업대가 놓여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깎다 만 나무 조각이 하나.
팔 형태. 사람의 팔.
관절 부분이 정교하게 파여 있었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깎고 있던 작품인가 보다.
나는 작업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선반 위에는 완성된 작품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무 고양이, 나무 새, 나무 시계...
그리고 선반 맨 아래 칸.
거기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유리병. 작은 유리병 여러 개.
안에는... 뭐지? 구슬 같은 것들.
아니.
눈알이다.
유리 눈알.
다양한 색. 갈색, 검은색, 연한 갈색.
크기도 조금씩 다르다.
인형에 넣는 의안 같은 건가?
목공예 하면서 인형도 만들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짙은 갈색. 크기는... 내 눈과 비슷했다.
아니, 이건 그냥 느낌이다. 넘어가자.
작업실 뒤쪽 벽으로 갔다.
여기에 수납장이 있었는데, 치우고 보니 벽면에 이상한 틈이 보였다.
문이다.
아니, 문이었던 곳이다.
합판으로 덧대어 막아놓은 흔적이 역력했다.
못 자국도 있고, 접착제 자국도 있고.
...이런 게 있었나?
나는 이 집에서 열두 살까지 살았는데, 작업실 뒤에 문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잠깐.
작업실 구조를 생각해 보면 뒤쪽에 공간이 남는다.
집 전체 도면으로 보면 분명 방 하나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한 번도 그 공간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왜지?
이상하게도, 그 공간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다.
생각해보려고 해도 안개처럼 흐릿하다.
분명 이 집에서 오래 살았는데.
나는 합판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못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작업실 공구를 써야 했다.
장도리로 하나씩 빼냈다.
20분쯤 걸렸을까.
합판 뒤에는 철제 문이 있었다.
잠겨 있었다.
열쇠가 필요했다. 작업실을 뒤졌다.
공구함, 서랍, 선반 뒤.
아빠 방 서랍에서 발견했다.
열쇠 묶음 안에 하나. 오래된 열쇠.
다른 열쇠들은 은색이었는데 이것만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문에 넣고 돌렸다.
철컥.
문이 열리자 계단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지하.
나는 이 집에 지하가 있다는 걸 몰랐다.
계단을 내려갔다.
나무 냄새가 더 짙어졌다. 위층 작업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공기 자체가 나무였다.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켰다.
불이 깜빡이다가 켜졌다.
나는 멈췄다.
이건... 작업실이 아니다.
'연구실'이라고 해야 하나.
방은 위층 작업실의 세 배는 됐다.
천장은 낮고, 벽면은 전부 선반으로 덮여 있었다.
선반 위에는 도면들이 빼곡했다. 수백 장.
도면에는 전부 사람의 신체 부위가 그려져 있었다.
손. 발. 팔. 다리. 척추. 두개골.
관절의 가동 범위가 각도까지 표기되어 있었다.
근육의 위치, 힘줄의 경로, 신경 다발의 배치까지.
이건 목공예의 영역이 아니었다.
작업대 위에는 공구들이 있었는데, 목공 도구와 함께 내가 알아볼 수 없는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메스. 핀셋. 실리콘 주입기 같은 것.
그리고 이름 모를 약품이 담긴 갈색 병들.
그중 하나에 라벨이 붙어 있었다.
'표피 안정제 - 7차 배합'
뭘 만들고 있었던 거야, 아빠.
방 한가운데에 작업대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위에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 사람 크기.
윤곽이... 사람이었다.
나는 천을 벗겼다.
그리고 세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나였다.
나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체형. 똑같은 머리카락 길이.
다른 점은 하나.
눈이 없었다. 두 눈구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이 아직 미완성이었다. 손가락 세 개만 깎여 있고 나머지 두 개는 나무 원형 그대로였다.
나무.
이건 나무로 만든 거다.
피부처럼 보이는 것. 손끝으로 건드려 봤다.
표면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지만, 두드리면 톡톡 소리가 났다.
나무다.
이건... 나를 본떠서 만든 거다. 아니, 아직 만들고 있던 거다.
아빠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여기서 이걸 만들고 있었다는 건가?
아들을 본떠서?
기분이 이상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뭐라 해야 하나.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느낌.
나는 작업대에서 눈을 떼고 방 안을 더 둘러보았다.
선반 아래쪽에 커다란 상자가 여러 개 있었다.
상자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1. 2. 3. ... 46.
46개의 상자.
나는 1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나무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팔, 다리, 몸통 부분들. 전부 부서져 있었다.
관절이 어긋나고, 표면이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
"v1 - 관절 가동 불가. 수지 접합부 전면 재설계 필요."
2번 상자를 열었다.
비슷한 나무 조각들. 이번엔 좀 더 정교했지만 역시 부서져 있었다.
"v2 - 보행 가능. 음성 출력 실패. 성대 구조 개선 필요."
3번.
"v3 - 보행, 음성 가능. 기억 이식 72시간 후 전면 소실. 기억 유지 매커니즘 재검토."
기억 이식.
나는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4번, 5번, 6번을 넘겼다.
10번.
"v10 - 3개월간 기능 유지. 초등학교 등교 성공. 11주차에 작업실 발견. 발견 직후 전면 경화."
경화.
나무로 돌아갔다는 뜻인가.
15번.
"v15 - 8개월 유지. 작업실 이전 후 안정. 감정 표현 현저히 개선. 눈물 불가. 체온 35.1도. 정상보다 1.5도 낮으나 자연스러운 범위."
21번.
"v21 - 2년 4개월. 역대 최장. 중학교 입학까지 성공. 교우 관계 양호. 단, 출혈 반응 없음. 운동회에서 넘어졌을 때 무릎에서 나무 단면 노출. 수습 불가. 전학 처리 후 v22 가동."
나는 상자에서 손을 뗐다.
운동회.
나는 운동회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그때 무릎을 다쳤는데... 이상하게 안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냥 넘어졌는데 멀쩡해서 주변 애들이 신기해했었다.
아니, 그건 내 기억이잖아.
내 기억이 맞지?
30번.
"v30 - 7년 유지. 서울 전학 성공. 원격 모니터링 진행. 안정적이나 체온 유지 문제 지속. 겨울마다 관절 경화 경향. 준영이에게 목도리를 보냈다."
아빠가 매년 겨울마다 목도리를 보내줬던 게 기억났다.
두꺼운 목도리. 항상 목뿐 아니라 손목까지 감을 수 있는 긴 목도리.
그냥 추울까 봐 보내준 거라고 생각했다.
35번.
"v35 - 이전 버전까지의 모든 데이터 반영. 표피 4차 코팅 적용. 출혈 모사 기능 추가(인공 혈액). 체온 보정기 내장(좌측 쇄골 하단). 꿈 기능은 여전히 불가."
꿈.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빠한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꿈을 안 꿔."
아빠는 "아빠도 안 꿔, 유전인가 보다"라고 했다.
그때 웃었다.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못 꾸는 게 아니라 꿈 기능이 없는 거였어?
40번.
"v40 - 19년. 대학 입학. 표피 열화 없음. 관절 마모율 0.02%/년. 이대로면 50년 이상 유지 가능. 단, 작업실 발견 시 경화 현상은 여전히 해결 불가. 원인을 모르겠다.
왜 작업실에만 오면."
작업실을 발견하면 멈춰?.
작업실을 발견하면 멈춘다?
나는 지금 작업실에 있다.
갑자기 양손을 내려다봤다.
움직인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쥐었다 편다. 된다.
아직은 된다.
44번.
"v44 - 22년. 가장 안정적인 버전. 그러나 작업실 하부 구조를 감지한 것으로 보임. 수면 중 지하 방향으로 이동하는 행동 관찰.
무의식적 탐색 본능이 있는 것인가? 작업실 입구를 완전히 봉쇄. 합판 + 접착 + 벽지 처리."
잠꼬대하면서 돌아다녔다는 건가?
설마, 나도?
46번.
"v46 - 23년 4개월. 역대 최장 유지. 대학원 진학. 학업 능력 우수. 사회적 기능 정상. 단 한 가지 문제: 본인이 병원을 간 적이 없음을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함.
건강검진 권유를 회피하는 패턴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음. MRI 촬영 시 내부 구조 노출 위험."
나는 병원에 간 적이 없다.
이걸 이상하게 여긴 적은 있다.
스물네 해를 살면서 감기 한 번, 배탈 한 번 없었다.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학교 통지를 항상 무시했다.
왜 무시했지?
...귀찮아서?
아니면, 뭔가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었던 건가?
46번 상자 안의 메모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v46 이식 실패. 이식 데이터에 v1~v45까지의 잔여 기억 혼입. 과거 버전의 무의식이 남아 작업실을 찾으려는 충동으로 발현되는 것으로 추정. 이식 알고리즘 전면 개편 필요."
잔여 기억.
가끔 이상한 데자뷔가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계단을 내려가는 느낌.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장을 올려다보는 느낌.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유리 눈알들이 나를 바라보는 느낌.
그건 데자뷔가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 상자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1번부터 46번까지.
47번 상자는 없다.
왜냐하면 47번은 여기 없으니까.
47번은 상자 안에 넣어질 일이 없었으니까.
47번은 밖에서 살고 있으니까.
나.
이준영.
v47.
아, 그러니까 이준영이라는 이름도.
원래의, 진짜 이준영이 있었고.
아빠는 그 아이를 잃었고.
그래서 만들기 시작한 거다.
47번을.
나를.
선반 구석에 낡은 노트 한 권이 있었다.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펼쳤다.
아빠 글씨. 특유의 삐뚤빼뚤한 필체.
첫 페이지.
---
준영이가 죽었다.
2000년 3월 12일. 오전 11시 47분.
교통사고. 횡단보도.
다섯 살.
은경이가 아이를 구하려다 같이.
둘 다 즉사.
나만 살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
노트의 글씨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내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계속 읽었다.
---
한 달이 지났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고, 아무것도 못 한 채 한 달.
작업실에 앉아 있다가 무심코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준영이 손.
작고. 통통하고. 다섯 살짜리 손.
기억나는 대로 깎았다.
다 깎고 나서 내 손 위에 올려봤다.
차갑고 가볍고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하지만 형태만큼은 정확했다.
그래서 팔을 깎았다.
그리고 다리를.
그리고 몸을.
그리고 얼굴을.
---
---
완성했다. 준영이와 같은 크기, 같은 비율의 인형.
아무리 봐도 인형일 뿐이다.
나무고 차갑고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하지.
사람이 나무로 사람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피노키오는 됐잖아.
미친 소리라는 거 알아.
하지만 제페토는 해냈잖아.
그냥 나무를 깎았을 뿐인데, 그 나무가 살아 움직였잖아.
동화니까? 거짓말이니까?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나는 준영이의 아빠니까.
제페토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아니, 안 되더라도. 시도는 할 수 있으니까.
---
읽으면서 숨이 가빠졌다.
아빠. 이건 뭐야.
뭘 한 거야.
---
그 여자를 만났다.
마을 뒷산 소나무 숲 깊은 곳에서.
새벽 3시. 잠이 안 와서 산에 올랐다가.
그녀는 거기 있었다.
파란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어리기도, 늙기도 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나무 조각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아이를 잃었군요."
"...네."
"되찾고 싶습니까."
"...네."
그녀가 소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수령 수백 년은 됐을 법한 거대한 소나무.
"이 나무로 만드세요. 한 번에 한 명분."
"한 번에 한 명분이라니..."
"여러 번 시도하게 될 거예요. 아마 많이."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파란 빛이 잠깐 번졌다가 꺼졌다.
미친 거다. 확실히 미친 거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 그 소나무를 베러 갔다.
---
파란 옷의 여자.
파란 요정.
피노키오에 나오는 파란 요정이잖아.
동화가 아니었던 건가.
아니면 아빠가 미쳤던 건가.
아니면 아빠가 미쳐서 진짜로 만나게 된 건가.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나는 여기 있다.
---
v1을 가동했다. 소나무 원목으로 깎은 첫 번째 아이.
눈을 떴다.
진짜로 눈을 떴다.
나는... 나는 주저앉았다.
준영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입이 벌어지고, 눈이 깜빡이고.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관절 설계가 잘못됐다.
그리고 12시간 만에 다시 나무로 돌아갔다.
나무로 돌아간 v1을 안고 울었다.
한 시간.
그리고 다음 날 v2를 깎기 시작했다.
---
---
v3. 기억을 넣는 방법을 알아냈다.
준영이의 물건을 태워 그 재를 나무에 섞으면
준영이의 기억 일부가 전사되는 것 같다.
그녀가 알려준 방법이다.
하지만 72시간 뒤에 기억이 전부 사라진다.
멍하니 서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무로 돌아갔다.
미안하다 준영아. 조금만 기다려라.
---
---
v10.
3개월.
학교에도 보냈다.
선생님에게는 전학생이라고 했다.
아이들과 놀고, 밥도 먹고, 숙제도 했다.
체온은 낮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11주째 되던 날.
이 아이가 작업실 문을 열어버렸다.
그 순간, 눈앞에서 아이의 피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무 결이 드러나고.
관절이 굳고.
입이 닫히고.
눈이 멈추고.
3분.
3분 만에 나무로 돌아갔다.
내 눈앞에서.
나는 또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v11을 깎기 시작했다.
---
이 대목에서 나는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아빠.
46번을 이걸 했어?
46번이나?
한 명 한 명이 살아났다가 나무로 돌아갈 때마다.
아빠는 자기 아들이 죽는 걸 46번 지켜본 거잖아.
노트의 뒷부분으로 갔다.
글씨가 점점 노쇠해지고 있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글자 크기가 커졌다.
---
v47.
이번이 마지막이다.
소나무가 거의 남지 않았다. 한 명분. 딱 한 명분이 남았다.
그리고 내 몸도 한계다. 손이 떨린다. 눈도 침침하다.
이번 아이에게는 완벽한 기억을 심었다.
다섯 살 이후의 기억은 이전 버전들의 데이터를 조합하여 24년 치를 구성했다.
엄마의 사진도 넣었다.
학교 기억, 친구 이름,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과목 전부.
이 아이는 자신이 스물네 살의 이준영이라고 믿을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믿을 것이다.
작업실은 합판으로 막고 벽지를 덧붙였다.
기억에서 이 공간의 존재를 지웠다.
이전 버전들이 작업실을 찾아낸 모든 패턴을 분석해서
이번에는 절대 찾지 못하도록 설계했다.
됐다.
이번에는 된다.
준영아.
네가 이 노트를 읽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읽고 있다면. 미안하다. 또 실패한 거다.
하지만 읽고 있지 않다면.
넌 지금 어딘가에서 숨 쉬고, 걷고, 먹고, 웃고 있겠지.
꿈은 못 꾸겠지만 그 정도는 봐 달라.
아빠가 아무리 해도 꿈만큼은 넣어줄 수가 없었다.
대신 하나는 확실하게 해뒀다.
넌 거짓말을 못 한다.
해봤자 표정이 다 티가 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되잖아.
그건 처음부터 그런 거잖아.
...
농담이다. 그냥 그렇게 됐다.
진짜 이유는 모르겠다.
코가 안 자라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
나는 노트를 덮었다.
거짓말.
나는 거짓말을 못 한다.
이건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하면 얼굴이 벌개지고 말이 어눌해졌다.
"넌 정직한 아이야"라고 선생님이 칭찬했지만
진짜는 거짓말을 못 하는 거였다.
포커도 못 치고, 마피아 게임도 항상 졌다.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냥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을 뿐.
방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열었다.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멈췄다.
선반이 있었다. 벽면 양쪽으로.
선반 위에 나무 인형들이 서 있었다.
사람 크기.
전부 같은 얼굴.
내 얼굴.
1번부터 46번까지.
나이가 다양했다. 다섯 살짜리도 있고, 열 살짜리도 있고, 스무 살짜리도 있었다.
가장 끝에 있는 v46은 나와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머리카락, 피부색, 눈매, 입술 형태.
다만 전부 나무였다.
눈이 열려 있었다. 유리 눈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46쌍의 눈이.
v46의 가슴에 뭔가 새겨져 있었다.
작은 글씨.
'작업실을 찾으면 안 돼'
v45에도.
v44에도.
v30에도.
v10에도.
v1에도.
전부.
'작업실을 찾으면 안 돼.'
아빠가 새긴 게 아니었다.
글씨체가 아빠 것이 아니었다.
날카롭고, 빼곡하고, 절박한 필체.
이건 그들이 직접 새긴 거다.
찾아버린 뒤에.
나무로 돌아가기 직전에.
마지막 남은 힘으로.
다음 버전에게 남긴 경고.
46명 전원이. 똑같은 말을.
나는 지금 그 경고를 읽고 있다.
읽어버렸다.
이미 찾아버렸다.
양손을 내려다봤다.
오른손 새끼손가락.
움직여봤다.
움직인다.
근데.
아까보다 조금 뻑뻑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긴장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노트를 선반에 올려놓았다.
계단을 올라갔다.
작업실을 지나 거실로 나왔다.
부엌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아빠가 마시다 남긴 커피잔이 있었다.
일주일 된 커피. 차갑겠지.
양손으로 잔을 감쌌다.
차가운지 따뜻한지 모르겠다.
아니.
느껴지지 않는다.
온도가.
손끝에 아무 감각이 없다.
예전부터 그랬나?
아니면 지금부터인 건가?
모르겠다.
모르겠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작업실 너머 뒷산에 소나무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가 유난히 작았다.
수백 년 된 거목의 그루터기. 거의 다 잘려나간.
한 명분. 아빠가 말했던 마지막 한 명분.
거기서 나는 왔다.
나는.
이준영은.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었을까.
매일 밤 아빠가 읽어주던 이야기 속의 피노키오는.
진짜로 사람이 되었을까.
아빠가 매번 다르게 읽어줬던 결말.
어느 날은 사람이 되었다고 했고.
어느 날은 사람이 되었는데도 나무 냄새가 난다고 했고.
어느 날은 사람이 된 줄 알았는데 거울에 나무가 비쳤다고 했고.
어느 날은 아무 말도 않고 책을 덮었다.
아빠는 피노키오의 결말을 몰랐던 거다.
47번째에도.
결말을 쓰지 못한 채 먼저 간 거다.
"넌 세상에서 가장 진짜인 아이야."
아빠.
나는 진짜야?
아빠는 항상 나무 냄새가 났다.
지금 나에게서도 그 냄새가 난다.
첫댓글 뭔데 슬프냐고ㅠ킵 고잉 트리ㅠ
굳어가고 있는거야?? 안돼
엔딩이 슬픈 동화같다 ㅠㅠ
자기 실체를 알게 되면 경화되나 보다....ㅠ 거짓말을 못하니까 스스로의 존재도 못 받아들이는 느낌.... 가짜라고 생각해서....
아 이게 맞는듯… 눈물나내ㅠ..
헐미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맞네.. 이거네... 넘 안타깝다ㅠㅠㅠㅠ
행복하게해주세여ㅠㅠㅠㅠㅠㅠ
해피엔딩 줘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슬프다...
ㅜㅜㅜㅜㅜ너무 슬프다 ㅁㅊ
슬프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