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소설가 방현희
<핫 뜨거, 대한민국>
당신은 오늘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 건가요?
닭갈비, 부대찌개, 불갈비, 낙지볶음.
우리나라는 지금 한창 매운 맛에 들려 있다.
세계 어느 나라가 또 이렇게 매운맛 전쟁을 벌이고 있는지 나는 들은 바가 없다.
얼마 전에 매운 라면 전쟁이 있었다. 오랫동안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 매운 라면을 대표해왔는데 그건 매운 맛 축에도 못 끼게 되었다.
근래 들어 매운 맛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라면회사들이 선전포고를 했다.
남자라면, 불닦볶음면, 틈새라면 빨계떡이 삼파전을 벌이더니
그 정점에 공화춘 짬뽕 사발면이 자리잡았다.
파닭이며 불닭이 야식계를 잠식하더니 요즘 맥주 안주들은 닭발이며 해물볶음 등에 캡사이신 원료를 넣어서 술을 물 들이키듯 하게 만들고 있다.
매워도 너무 매운 나머지 차가운 맥주를 들이붓게 하여 매상을 올린다.
속이 뒤집히게 매운 음식을 먹느라 다들 눈은 충혈되고, 입술은 붉다. 뺨은 술 때문인지, 닭발 때문인지, 닭발보다 더 매운 사회 때문인지 불콰하기 짝이 없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자. 고등학생들이 학교와 학원과 도서실에서 먹는 간식을 따라가 보면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긴장과 초조, 불안, 분노를 내재 시키고 있는지 드러난다.
아이들은 점심때 학교에서 나오는 밍밍한 급식을 대충 먹고
하교 시간에 학교 앞 분식점에서 캡사이신 원료가 뒤범벅된 죠스 떡볶이와 매운 오뎅을 먹는다.
군것질거리도 매운 새우깡에 매운 나초다.
그리고 학원과 독서실로 가서 공부를 하다가 밤 열시 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는 독서실로 돌아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편의점에 가서 눈물, 콧물과 함께
공화춘 짬뽕면을 먹는 것이다.
이 맛은 매운 맛의 절정이며, 표현하자면 혀가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한다.
그 순간 오직 맵다, 맵다, 하는 느낌에만 사로잡혀 있다.
혀를 끊어내는 매운 맛으로 열 일고여덟 살 아이들이 느끼고 겪는 다른 모든 맛을 잊는 순간이다.
편의점 한 구석에서 붉은 면을 빨아들이는 우리 청소년들의 입술이 벌겋게 부풀어오른다.
두 눈은 눈물이 매달려 글썽글썽하다. 아이들은 매운 맛으로 현실을 삼킨다.
어쩌다가 우리는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넣어 맵싸한 맛도 아니고,
멕시코산 고추씨 기름을 섞어 넣어 화끈한 맛도 아닌,
고추의 매운 맛만을 휘발성 화학물로 추출해서 농축시킨 순수 캡사이신 분말을 먹어
혀를 끊어내는 아픔을 즐기게 된 것일까.
매운 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것은 다들 알 것이다.
매운 맛은 통증을 불러 일으키고 뇌는 짧고 극심한 통증에 따르는 쾌락 물질을 분비시킨다.
그와 동시에 땀구멍을 확장시켜 땀과 함께 열을 발산한다. 시원함과 상쾌함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다.
왜 이렇게 매운맛에 열광하게 되었을까.
이런 현상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
혹자는 맛에 이끌리는 건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것과 짧고 극심한 통증을 통해서 찰나의 쾌감을 얻으려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뇌의 메커니즘은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와 같고 게임에 중독되는 것과 같아서 점점 광포함에 길들여져 갈수록 자극의 수위를 높이게 된다.
우리의 현실은 그 어떤 엽기 작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이미 엽기를 넘어섰다.
청소년들이 길을 집 삼아 사는 개를 붙잡아 차마 못할 짓을 하고,
이미 아파트가 한국인 대다수의 주거형태로 자리잡은 상황에
위층 아래층이 소음을 못 참아 싸움을 한다.
이제는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충동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실제로 종종 심각한 폭력이 벌어지곤 한다.
잠잠해질 만하면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어린아이, 소녀가 난자당한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이토록 빈번하게 벌어지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세상의 잘 사는 사람들은 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며 별세계에서 살아가고 빈곤층은 노쇠한 몸 가릴 울타리 하나 없어 죽음으로 내몰린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터지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
실수로 잘못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주먹이 날아온다.
네티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아고라에 들어가보면 이래서 살인충동 느끼고,
저래서 살인충동 느낀다는 말을 한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말이라지만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회가 되었을까. 얼굴을 맞대고는 참고 있지만 그것이 진짜 속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영화나 게임은 갈수록 잔인해져가고 있어서 대량 살상에 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대중가요는 그 성격상 전 연령층에 무차별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건강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노래와 함께 뮤직 비디오가 나오면서 최근에 와서는 청소년들이 즐기는 음악이 어른들의 어두운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어른이 되어 갈수록 도덕성이 점점 사그라들거나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른과 아이의 구분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공의를 중요시하지 않는 현실에서, 공의를 가르치는 학교와 교사가 거의 없는 사회에서 도덕성이 그 무엇의 판단 근거가 되겠는가.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송년회 모임 자리에서 한 젊은 소설가가 하는 말을 들었다.
이번 작품에서 피를 쫙 뿌려 방안을 온통 피칠갑을 했는데
다음번에는 얼마나 더 수위를 높여야 하는 거냐, 고 했다.
그는 자기 작품에 관해 말하면서 자조와 자괴감이 뒤섞인 웃음을 웃었다.
요즘의 소설들은 어떻게 하면 독자로 하여금 더 치를 떨게 할까, 어떻게 하면 비위를 더 상하게 할까, 얼마나 더 잔인한 사회를 보여줘 소름끼치게 만들까, 하는 경쟁을 하는 듯하다.
소설이 별 효용가치가 없는 세상에서 작은 시장을 놓고 수많은 작가가 경쟁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해 자극적으로 나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소설은 당대를 반영한다. 당대의 가장 아픈 곳, 당대의 가장 문제적인 곳,
내 이웃과 함께 겪는 동시대의 진창. 그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니 어떤 작가들은 아예 잔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어떤 작가들은 미처 따라가기 어려워 잔인함을 놓치기 십상이다.
모든 찌개와 볶음에 맵게, 더 맵게, 를 주문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분노 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한국. 모든 사람들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으면서
발산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당하지 않은 상황에 분노를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기 몸을 고통으로 내몰고, 거기서 짧은 쾌락으로 위안을 삼는 것이다.
매운 맛으로 통증을 표현하면 다른 누구를 해치는 것은 아니니까, 자기 몸에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우리 국민 중 2-30대 인구는 5-60대 인구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젊은이들은 일인당 2인 이상의 노인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모든 정책은 중장년층 이상이 결정한다. 기득권을 가진 중장년층들은 당장 자기 앞이 중요하다. 젊은이들을 위해 내 줄 자리가 없다.
당장 자기 앞이 불안한 중장년층, 앞길이 아주 막막한 청년층,
모두 불안하고 두렵다.
게다가 한번 풍요를 맛본 사람에게 그 박탈감은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사람에 비해 극심하다.
우리 중장년층 이상은 자기 손으로 이룬 풍요를 누린 적이 있다.
그런데 세계가 급변했다. 새로운 경제 형태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몰고 왔다.
누군가가 내 몫으로 주어진 것을 빼앗아가는 것만 같다.
아무도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알지도 못하는 그것을 빼앗길까,
내가 찾기 전에 다른 사람이 차지해버릴까 두려워한다. 한국 사회 전체가 허둥지둥한다.
어느 쪽에서는 두둑한 주머니를 헐어내야 할까봐 불안하고 어느 쪽에서는 푼돈마저 빼앗겨 실의에 빠진다.
공의를 배운 적이 없는 한국. 그것이 우리가 매운맛을 즐기는 것을 넘어 매운맛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유이다.
What we eat is what we are,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다. 당신은 무엇을 먹으며 그것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가.
첫댓글 그런 현상이나 마음 참 걱정스럽게 그리고 오래전부터 공감하고 있었지요. 리모컨 작동하는데도 전기 쓰인다지요? 어떤 인물만 나오면 불에 덴 듯 리모컨 잡아드니 이 돈은 또 어떻게 감당할꼬. 마음 보태야할 곳 많은데 액수 적어질까 두렵습넘어다. 어린애들은 또 어떤 가치관으로 이끌어야할지, 지천명 넘어가는데 책임질 일은 더 늘어났으니, 에구.
할수 없어요. 건강챙겨 오래사는 수밖에. 맛에 관한 자극도 순해질 때까지요. 맛 아닌 것을 맛이라 우기는 그릇된 가치를 조금씩이라도 바로잡아보자고요. 참 질기고 그악스러운 정서를 기 약한 우리가 이겨낼지 잘 모르겠지만요.
우리 사회의 멘토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나대는 사람들은 그저 힐링만을 외고 있으니.... 공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방향을 잡을 수조차 없는 것 아닌가 싶네요~~ 청요리집님, 건강 잘 챙기시고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