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자 여사.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守正)와 그의 부인
이쓰코(伊都子)의 장녀 마사코(方子)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에 고준 황후가 됨) 및
화족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미미한 이유로
1916년,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했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롯폰기에서 결혼후 1921년, 장남 진(晉)을 출산.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1923년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영친왕 부부.
1931년, 둘째 구(玖)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 복권을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 삶을 살았다.

1927년~1928년.,중년기에 유럽 순방.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후,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할 수 있게 되었다.
1962.06.15.
이방자는 한국에서 지내며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년,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하여 자행회(慈行會)를 설립했다.
1967년, 언어장애인 및 소아마비 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을 설립, 해외모금,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을 잃고 1971년, 지적장애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에 자혜학교를 설립. 1973년, 숙원사업인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
국가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힘든 생활 여건 속에서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 후, 일본에 있는 아들.,구(玖)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했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영친왕)와 합장,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2006년 11월, 일본 후지TV '의민태자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가 방영되어 논란이 되었다.
2007년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탤런트 김희애를 주연으로
'의민태자비의 일대기를 그릴 드라마'가 기획 중이었으며,
그 이전에도 탤런트 이휘향이 '의민태자비' 역할로 출연한
미니시리즈 드라마 왕조의 세월을 한국방송에서 방영했다.
황태자비를 부르는 명칭은 영친왕비, 영왕비, 이방자 여사 등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은의 영왕 칭호는 결혼 전에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황태자비 또한 태자비(세자비)로서 혼인한 것으로 되었다.
친왕(왕자)과 황태자(왕세자)는 엄연하게 다르기 때문에
영친왕비 아닌 의민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맞을듯 하다.
오늘날까지 의민태자비를 "이방자 여사"라고., 흔히 부른다.
................의민태자(懿愍太子 : 영친왕)..................
대한제국 황태자(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일본제국 군인이었기에, 영친왕(英親王)이 아닌.,"황태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7남이고 생모는 순헌황귀비(엄상궁).
생모 엄상궁은 이은을 낳은 후 1897년 10월 22일에 귀인.
1900년 8월 3일 순빈(淳嬪), 1901년 10월 14일에 순비(淳妃),
1903년 12월 25일 황귀비로 책봉, 원래 엄귀비의 신분은.,천민.
순종과 의친왕, 덕혜옹주와는 이복 형제.
1897년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나 의친왕을 제치고
병약해 아들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책봉되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0년, 한일 병합으로 대한제국의 황제가 왕으로 격하
왕세자가 되어 1920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정략혼인.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해 제2대 창덕궁 이왕(李王).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을 졸업했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계급이 중장에 이르렀다.
1963년에서야 혼수상태인 채로,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에 안장, 원호 영원(英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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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국도 내가 묻힐 곳도.,한국."- 이방자 여사.
1963년 11월 영친왕과 함께 귀국을 했지만
1970년 영친왕 운명 후, 홀로 낙선재를 지키며
운명할 때까지 약 20년간 장애자 봉사활동에 전념.
사실(史實), "이방자." 성명 그 자체가 일본식이다.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에서 신부의 성(姓)
나시모토(梨本)를 떼고 신랑 성.,이(李)를 붙여.,이방자(李方子)
"여사"라는 명칭도 황태자비 존칭으로는 부적합한듯 하다.
생전에 "이방자 여사" 호칭으로 국민적 사랑을 많이 받았다.
저서 <지나온 세월>. <The World is One><세월이여 왕조여>
한국 외국어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한국 한사대학교 명예 사회과학 박사.
친정 아버지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1874년 - 1951년)
친정 어머니 : 나시모토노미야 이쓰코(1882년 - 1976년)
이방자 여사의 여동생은 나시모토노미야 노리코여왕.
‘결혼이 다른 어떤 결합 형식보다 뛰어난 점은
남녀에게 서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동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 앙드레 모로아 -
이방자 여사는 일한융화(日韓融和) 명분으로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과 부부로 맺어졌다.
고독한 남편 이은의 반려자로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살았다.
그녀는 타고난 절제의 미덕과 따뜻한 심성으로
덕혜옹주를 비롯하여 여러 왕족들을 돌봐주었다.
말년에는 이 땅의 장애인을 대상으로
각종 사회사업에 열정을 기울임으로써
소외받던 그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열정은 삶을 거룩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이방자 여사는 정략으로 흔들릴 뻔하였던
자신의 삶을 인내와 정성으로 바로 잡았다.
국내에 들어온 뒤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이땅의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음으로써
세인들에게 고귀함이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인간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그로 인해 한국인들은
그녀를 '일본 여인' 마사코가 아니라
'조선의 어머니' 이방자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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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 '이은'의 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 4. 30에 낙선재에서 88세로 별세.
일본의 왕녀로 태어나 조선의 황태자비로 눈감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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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 여사가 평소 즐겨쓰던 문구처럼
‘대공무아(大公無我)’ 삶을 살다가 갔다.
............................大公無我...............................
큰 인물이 되려면 자기의 이익에 대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치란. 백성을 배부르게 하고, '足食' 나라를 튼튼히 해야하며
'足兵' 백성들이 믿게 하는 것. '民信之'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족병(足兵)이니라. 둘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족식(足食)이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민신(民信)를 잃어서는 안된다. - 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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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玖)와 지내다가, 시누이 덕혜옹주 운명 9일 후에 운명,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인사 1천여명이 참석한 국민장.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영원(英園)에
의민태자(영양왕, 이은)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소파상 등 수상,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영친왕 그림




영친왕 그림


영친왕 서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