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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전투(深河戰鬪), 사막(沙漠)의 그 전장(戰場)에도 들꽃이 핀다. [2편]
2024년 10월 26일
○ 「제1편」에서 :
〈「조선(朝鮮)의 광해군(光海君)【朝鮮 15代 1,608 ~ 1,623】은, 출정군사령관(出征軍司令官)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평안병사(平安兵使)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이민환(李民寏)•이정남(李珽男)•김응하(金應河)•정응정(鄭應井)•문희성(文希聖)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任命)하고, 포수(砲手) 3,500, 사수(射手) 6,500, 기타(其他) 3,000 도합(都合) 13,000여(餘)【일설(一說)에는 도합(都合) 20,000여(餘) 라고도 한다】군사(軍士)들과 함께 출병(出兵), 명군(明軍)과 합동작전(合同作戰)을 펼쳤으나 8,000은 전사(戰死), 5,000은 항복(降伏), 대패(大敗)하였다」라고 전해지는 가운데, 실상(實狀)은 광해군(光海君)으로부터 은밀(隱密)하게 어명(御命)을 받은 바는 :
「불리(不利)하면 적당(適當)하게 군사(軍士)를 보전(保全)하라는 명(命)을 받았다」라고 전해진다.〉
➨ 「역사(歷史)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 「이때 광해군(光海君)의 극비 어명(極祕 御命)에 따라 적당(適當)하게 눈치껏 싸우며, 노이합적(奴爾哈赤)과의 관계(關係)를 설정(設定)하였다면 후대(後代) 삼전도(三田渡) ‘치욕(恥辱)=굴욕(屈辱)’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주장(主張)도 있다.
「국제간(國際間)의 외교관계(外交關係)는 냉정(冷靜)하게 이성적(理性的)으로 국가(國家)의 이익(利益)을 우선(于先), 판단(判斷)해야 한다」라는 것을 역사(歷史)가 증명(證明)하고 있는 좋은 “예(例)”라고 본다.
● 이렇게 대패(大敗)한 전투(戰鬪)에서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 및 그 휘하(麾下) 3,000여 병사(兵士)들은 최후(最後)까지 후금(後金)과 싸우다가 전멸(全滅)하다시피 했는데, “그 전장(戰場) 터가 바로 심하(深河)”였다」라고 전(傳)해지고 있다.
◆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서(西)쪽 1리 또는 6리에 있다」라고 당시(當時)를 살았던 많은 사대부(士大夫)는 기록(記錄)으로 이를 남겨 놓고 있다.
그러나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은 이곳 ‘전장(戰場) 터’가 “요동(遼東)” 땅이었다는 것에 있다. 「산해관(山海關)=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서(西)쪽 1리 또는 6리에 있다」라는 “심하(深河)”의 땅은,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따르면 “요서(遼西)”지방(地方)이다.
➊ 「요동(遼東)•요서(遼西)를 가르는 하천(河川)인 요수(遼水)」는 :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서(西)쪽으로 요수(遼水)가 흐르기 때문에 “심양(瀋陽)” 땅이 바로 요동(遼東) 땅이 된 이유(理由)다.」
➋ 「산해관(山海關)」은, 「“요수(遼水)”로부터 서(西)쪽으로 약 900-1,000리(里)나 떨어져 있어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復活), 돌고 돌아 회귀(回歸)해도, 빼도 박도 못하는 요동(遼東) 땅이 될 수 없는 “핵심(核心) 요서(遼西) 땅이다”」
➌ 그렇다면 이게 무슨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며,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긴가? 결과론(結果論)이지만 : 오늘날의 심양(瀋陽)도, 요수(遼水)도, 산해관(山海關)도, 심하(深河)도 20세기(世紀)로부터 지명(地名)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오늘날의 땅에 심어진 것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기극(詐欺劇)’일 뿐이다.
➨➨➨〈왜냐하면 당시(當時)를 살았던 많은 사대부(士大夫)는 말하기를 : 「요동(遼東)•요서(遼西) 땅은 모래(沙)로 되어 있는 광막(廣漠)한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 뒤엎을 만한 기록(記錄)은 없다. ‘한글 해설서(解說書)’는 일제식민지(日帝植民地) 이후(以後)에 일인(日人)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 「산해관(山海關)」은, 「서방(西方)과 동방(東方) 사이의 땅에 높게 솟아 있어야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東)쪽의 끝머리에 서 있다는 그 관문(關門)이 어떻게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될 수 있겠는가?
● 「이건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사학자(史學者)들이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야합(野合)하여 만들어 낸 조선사(朝鮮史) 사기극(詐欺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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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 深河之役【이긍익(李肯翊) : 英祖 12년(1736)∼純祖 6년(1806)】
➨ [주-D001] 유하장군(柳下將軍) : 김응하(金應河, 1580~1619)를 가리킨다. 김응하는 광해군 때의 무신으로, 자(字)는 경희(景羲)이며, 고려(高麗)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경원 판관(慶源判官), 삼수 군수(三水郡守), 북우후(北虞候)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10)에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면서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이듬해 2월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따라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정했다. 이해 3월 심하(深河)의 전역(戰役)에서 유정(劉綎)이 이끈 명군(明軍)이 대패하고 조선의 원군도 후금 군대에 항복했을 때, 홀로 3천 명의 휘하 군사를 이끌고 수만 명의 적군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1620년에 명나라 신종(神宗)이 그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그의 처자에게 백금(百金)을 하사하였으며, 조선에서도 그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무(忠武)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당시 일군(一軍)이 모두 전몰(戰歿)한 상황에서 김응하가 말에서 내려 버드나무 밑〔柳下〕에 몸을 기대고 활을 쏘아 적을 사살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칼을 빼 들고 적을 무수히 격살(擊殺)하였는데, 그가 전사한 뒤에 적들이 버드나무 밑의 장군이 가장 웅용(雄勇)하여 범접할 수 없었다면서 유하장군이라고 찬양하였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린 각종 일화를 비롯하여, 조경(趙絅)의 《용주유고(龍洲遺稿)》 권19 〈증영의정김장군신도비명(贈領議政金將軍神道碑銘)〉, 홍세태(洪世泰)의 《유하집(柳下集)》 권9 〈김장군전(金將軍傳)〉, 이재(李栽)의 《밀암집(密菴集)》 권16 〈김장군응하전(金將軍應河傳)〉 등을 통하여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 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 深河之役]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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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농암집(農巖集) 【金昌協, 1,651~1,708)】제4권 / 시(詩) / 김 장군(金將軍) 사당
〈두 번째 : 漢虜相望列百營, 東韓壯士死分明, 千秋莫問黃沙骨, 萬國同懸白日名 : 한(漢)과 오랑캐 대군이 서로 대치할 제, 동한(東韓) 장사 충성 바쳐 장렬히 죽었다네. 사막(沙漠)에 묻힌 백골(白骨) 천추(千秋)에 묻지 마오. 충신 이름 만국이 태양처럼 떠받드네.〉
〈千 秋 莫 問 黃 沙 骨 : 사막(沙漠)【황사(黃沙)】에 묻힌 백골, 천추(千秋)【먼 세월, 먼 미래】에 묻지 마시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상식(歷史常識)과는 전혀 다르게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 서(西)쪽 땅에 있었으며, 또한 치열(熾烈)한 전투(戰鬪)가 벌어졌던 “심하(深河)”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흐르는 하천(河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주-D004] 부차(富車)의 전투 : 부차는 중국의 사막인 심하(深河)의 지명이다.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무순(撫順), 청하(淸河) 등의 보(堡)를 침입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姜弘立)을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로 하는 군사 2만 명을 파견하여 명나라 제독 유정의 군대와 합세하여 공격을 했으나, 심하의 부차에서 대패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 : 이렇게 번역(飜譯)을 하신 분도 계시다.
➡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자(史學者)들 모두는, 과거(過去)를 버리고, 대(大) 각성(覺醒)을 반드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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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월사집(月沙集) 제7권 / 경신조천록 상(庚申朝天錄上) 정부사(征婦詞)
흰 댕기 나무 비녀 쪽진 머리 엉클어지고 / 白髻荊釵不整鬟
초췌한 홍안에는 눈물 흔적이 아롱졌구나 / 紅顔憔悴淚痕斑
낭군은 스무 살에 전쟁터로 나갔는데 / 郞君二十從征戍
지난해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돌아오지 않았소 / 去歲深河戰未還
➨ 「출병(出兵)한 13,000여(餘)【일설(一說)에는 20,000여(餘)】 병사(兵士) 가운데, 살아서 ‘옥관(玉關)=용만(龍彎)’을 넘어온 병사(兵士)가 겨우 5,000여(餘) 라고 하니, 가가호호(家家戶戶) “지난해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소이다”」라는 한탄(恨歎)과 탄식(歎息)이 메아리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들은 백초(白草)와 모래(沙) 사이를 핏빛으로 물들이며, 백골(白骨)이 된 8,000여(餘) 병사(兵士)들 모두는,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只今)이나 전쟁(戰爭)은, 민초(民草)들의 피(血)로 얼룩져야 했고, 백성(百姓)들 위에 군림(君臨)했던 자(者)들은, 뒤에서 그 공(功)을 탐(貪)하기에 바빴다.
21세기(世紀) 대한민국(大韓民國)도 결코 예외(例外)가 될 수 없다. 전쟁(戰爭)이 난다면 : 국군통수권자(國軍統帥權者)는 지휘(指揮)를 빙자(憑藉), 수백(數百) 미터 지하(地下) 벙커로, 불리(不利)하면 먼 후방(後方)으로 경호원(警護員)들에게 둘러싸여 도주(逃走)할 것이고, 이하(以下) 국민(國民)들 위에 군림(君臨)했던 많은 자(者)들 역시 가족(家族)들과 함께 가장 먼저 도주(逃走)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다.
그저 죽어 나가는 것은, 민초(民草)들의 자식(子息)인 병사(兵士)들이요, 그리고 민초(民草)들 뿐이다. 누가, 어떤 새끼가 민초(民草)들을 대신(代身)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겠는가? 「지금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존재(存在)할 뿐이다.」 대통령(大統領)이고 나발이고 누구도 없다. ‘믿을 놈이 단 한 놈도 없다’라는 뜻이다.
➨ 〈「대통령(大統領)」이란 자(者)가 ‘가장 앞장서서’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꾀하고 있잖은가!」 바로 ‘지’ 아내를 위해서 말이다. 법(法)은 만인(萬人)에게 평등(平等)하다는 말, 법(法)과 원칙(原則)에 따라… …이런 미사려구(美辭麗句)는 ‘어떤 놈들이, 어떤 새끼들이 지껄였는가?’〉
국민(國民)들은, 민초(民草)들은 이러한 놈들을, 이런 새끼들을 결코 신뢰(信賴)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피해(被害)를 보고, ‘개고생’하는 것이 바로 국민(國民)들이요, 민초(民草)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戰爭)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最) 상책(上策) 중의 상책(上策)이라고 현인(賢人)들은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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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북원록(北轅錄)【이의봉(李義鳳, 1,733~1,801)】 제1권 산천풍속총론(山川風俗總論) : 【북원록(北轅錄)은 AD 1,760∼1,761의 연행기록(燕行記錄)이다】
〈냇물 중에서 큰 것에는 요동의 동량하(東梁河) 【일명 태자하(太子河)라고도 한다.】, 심양의 혼하(渾河)와 요하(遼河)【일명 주류하(周流河)이다】, 금주의 대릉하와 소릉하(小凌河), 영원의 영원하(寧遠河), 임유(臨楡)의 심하(深河), 영평(永平)의 청룡하(靑龍河)와 난하(灤河), 풍윤의 환향하(還香河), 계주의 용지하(龍池河) 【일명 어양하(漁陽河)이다.】, 삼하(三河)의 구하(泃河) 【일명 호타하(滹沱河)이다.】, 통주의 백수하(白遂河) 등 이 13개의 물은 더러는 작은 배를 타고 더러는 다리로 건너는데 백하(白河)와 요하가 가장 커서 거의 우리나라의 송파도(松坡渡)와 같았으며 그 나머지는 겨우 금천(金川)의 저탄(猪灘)과 같았다.〉
임유(臨楡)의 심하(深河) : 림유현(臨楡縣)을 말하는 것이다. 또 림유현(臨渝縣)이라고 한다. 바로 산해관(山海關)이 있는 곳을 말하며, 산해관(山海關)을 유관(楡關) 또는 유관(渝關) 또는 림유관(臨楡關) 또는 림유관(臨渝關)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약 해발고도(海拔高度) 2,400m에 달하는 “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이 있고, 그 아래를 “림유하(臨渝河)=림유하(臨楡河)”가 흐르고 있다고 하였다.
또 「심하(深河)가 이 현(縣)에 있다」라고 하였다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을 보면 :
➨ 오늘날의 「림유현(臨楡縣) 땅」에 이러한 산(山)【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도 없고, 하천(河川)【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도 없다. 또 “심하(深河)는 요동(遼東) 땅에 있다”라고 하였으나, 이곳 “임유현(臨楡縣)은, ‘요수(遼水)=요하(遼河)’로부터 서(西)쪽으로 900리(里) 떨어져 있는 요서(遼西) 땅의 핵심지지(核心之地)”이다.
이게 무슨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개새끼가 풀 뜯어 먹는 소린가! 곧 이 모두는 「짝퉁 모조품(模造品)이라는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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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수사록(隨槎錄) 권3 유상수필(遊賞隨筆) 하(下) 홍화점(紅花店)【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 : AD 1,831年 연행기록(燕行記錄)】
(23)-1) 수사록(隨槎錄) 본문(本文) ㈠ / 〈산해관(山海關) : 산해관(山海關)은 옛날의 유관(楡關)이다. 성곽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대략 4,000리가 되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몽염(蒙恬)이 지은 것으로, 각산(角山)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서쪽으로는 홍무【洪武 명 태조(太祖)의 연호, 1368~1398】 병진년(1,376) 서달(徐達)에게 명하여 증축하였다고 한다. 봉우리마다 돈대(墩臺)가 있고, 평지로 들어서면 5겹으로 성을 쌓았으며, 앞으로 요동 벌판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창해(滄海)를 끼고 있다. 성의 모양새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은데, 위쪽은 6마리 말이 달릴 수 있는 넓이이다. 동쪽을 향해서 관문이 4중으로 나 있는데, 모두 철갑을 두른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서로 떨어진 거리가 1리쯤 된다. 첫 번째 관문은 옹성(甕城)으로 누대가 없으며 동쪽ㆍ남쪽ㆍ북쪽으로 문이 뚫려 있는데, 문미에 “위진화이(威鎭華夷)”라고 새겨져 있다. 두 번째 관문은 4층 누각인데, 편액에 “산해관(山海關)”이라고 쓰여 있다. 세 번째 관문은 3중 처마로 된 누각인데, 서쪽 문미에 큰 글씨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쓰여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이사(李斯)의 글씨라고 한다.〉
➊ 「산해관(山海關)은 옛날의 유관(楡關)이다. 성곽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대략 4,000리이다」 그렇다면 요동(遼東)까지 만리(萬里)라는 말은? 산해관(山海關)이 진(秦) 때의 것이라면 그 축조(築造) 방식(方式) 또한 진(秦) 때나 명(明) 때나 똑같았다는 것인가?
➋ 「앞으로 요동(遼東) 벌판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창해(滄海)를 끼고 있다.」 : 「요동(遼東)은 요수(遼水)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으로 :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요동(遼東) 땅까지는 최소한 900리(里) - 1 천리(千里)가 떨어져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슨 재주로 “요동(遼東) 벌판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있을까?」
➌ 「세 번째 관문(關門)은, 3중 처마로 된 누각인데, 서(西)쪽 문미에 큰 글씨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쓰여 있다.」 아래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3층 누각(樓閣)인가?
아래의 “사진(寫眞)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3층 누각(樓閣)이 있는 곳은, 바로 “가욕관(嘉峪關)”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다.
산해관(山海關)은 2층 누각(樓閣)이요,
가욕관(嘉峪關)은 3층 누각(樓閣)으로 만들어져 있다.
➊ 산해관(山海關) :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출처 : 고전번역원 DB] : 단장(丹粧)하기 전의 1,900년대(年代) 이후(以後)의 사진(寫眞)일 것으로 추정(推定)된다.【‘중국어 위키백과’에 인용(引用)된 사진(寫眞)과 ‘고전번역원 DB’에 인용(引用)된 2층 누각(樓閣) 창문(窓門) 즉 ‘天下第一關’ 현판(懸板) 아래 창문(窓門) 모습이 똑같아야 하는데 ‘전혀 다르다.’】
산해관(山海關) : ‘유관(楡關)=유관(渝關)=림유관(臨楡關)=림유관(臨渝關)’이라는 이칭(異稱)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
㈠ 「산해(山海)」 곧 「‘산(山)과 해(海)’【海 또는 大江 또는 內陸海】가 함께 어우러져 있던 중요(重要) 경계지(境界地)에 설치(設置)한 관문(關門)을 말한다.」라는 것이고,
㈡ 이에 따르면 : 「1,000여 인(仞)【1인(仞) : 8자 : 2.40m】곧 해발고도(海拔高度) 2,400m 이상(以上)의 삐쭉삐쭉한 봉우리가 뛰어나온 험준(險峻)한 산(山)인 “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이 있고, 그 아래를 흐르는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가 있는 곳에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유관(渝關)=림유관(臨楡關)=림유관(臨渝關)”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지세(地勢) 곧 「㈠ + ㈡」를 충족(充足)시켜주는 지세(地勢)를 가진, 강적(强敵)과의 경계(境界) 지역(地域)에 “산해관(山海關)”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㈢ 그러나 「오늘날의 진황도(秦皇島)의 산해관(山海關)은 바다(海)는 있지만 산(山)인 ‘림유산(臨楡山)=림유산(臨渝山)’과 하천(河川)인 ‘림유하(臨楡河)=림유하(臨渝河)’가 없다.」
◆ 오늘날의 ‘진황도(秦皇島)’에 있는 ‘산해관(山海關) 곧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전형적(典型的)인 역사왜곡(歷史歪曲)을 만든 「짝퉁 모조품(模造品)」이다.
➋ 하서회랑(河西回廊)에 있는 가욕관(嘉峪關)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명(明)나라 때 축조(築造)했다고 전해진다. 3층(層)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는데, 위의 것은 새롭게 단장(丹粧)한 모습이다. [출처 :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 嘉峪關建於明太祖洪武五年(1372年)]
【嘉峪關關城,位於嘉峪關最狹窄的山谷中部,地勢最高的嘉峪山上,城關兩翼的城牆橫穿沙漠戈壁。嘉峪關以地勢險要,巍峨壯觀著稱於世,被稱為「天下第一雄關」。與千里之外的「天下第一關」——山海關遙相呼應,聞名天下】
㈠ 明史 本紀 太祖 / 「洪武四年, 秋七月辛亥, 徐達練兵山西. : 홍무(洪武) 4년, 가을 7월 신해(辛亥)에, 서달(徐達)이 산서(山西)에서 병사들을 훈련(訓練)시켰다. 辛酉, 傅友德下成都, 四川平. : 신유(辛酉)에, 박우덕(博友德)이 성도(成都) 아래에서 사천(四川)을 평정(平定)하였다. 乙丑, 明昇至京師, 封歸義侯. : 을축(乙丑)에, 명승(明昇)이 경사(京師)에 이르자, 귀의후(歸義侯)로 봉했다.」라고 하였으니… …
➨ 이때가 ‘명(明)’나라로써는 아주 중요(重要)한 시기(時期)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이 있다.
즉(卽), 주원장(朱元璋)은 거느리고 있던 휘하(麾下) 장수(將帥)와 병사(兵士)들이 목숨을 걸고 출정(出征), 토벌(討伐)한 참칭(僭稱)【스스로 황제(皇帝)를 칭하며 나라를 세움】한 “명승(明昇)이나 진리(陳理)와 그 가족(家族)들을 포로(捕虜)로 획득(獲得), 주원장(朱元璋) 스스로 처리하지 않고 고려(高麗)로 보내야만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때의 정치적(政治的) 구도(構圖), 상황(狀況)으로 보면 : 〈「고려(高麗)는 천자국(天子國)이요, 주원장(朱元璋)은 일개 제후(諸侯)였을 뿐이다」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즉(卽), ‘고려(高麗) 천자(天子)’의 명(命)으로 이들을 토벌(討伐)하고, 포로(捕虜)들을 처벌(處罰)할 권한(權限)이 없으므로 천자(天子)【고려(高麗)】에게 보낸 것이다〉라는 것으로 해설(解說)할 수밖에 없다.
「주원장(朱元璋)은, 고려(高麗) 황제(皇帝)의 어명(御命)에 따라 출정(出征)하여 획득(獲得)한 주요(主要) 포로(捕虜)들을 처리(處理)할 권한(權限)이 없다. 그래서 그 권한(權限)을 가진 천자(天子)에게 보냈다」라는 것 외(外)로 설명(說明)할 합당(合當)한 이유(李儒)가 없다는 것이다.
㈡ 「洪武 五年 春正月 乙丑, 徙陳理, 明昇於高麗. : 을축(乙丑)에 진리(陳理)와 명승(明昇)을 고려(高麗)로 옮기었다(보냈다). 甲戌, 魏國公徐達為征虜大將軍, 出雁門, 趨和林, 曹國公李文忠為左副將軍, 出應昌, 宋國公馮勝為征西將軍, 取甘肅, 征擴廓帖木兒 : 갑술(甲戌)에, 위국공(衛國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서달(徐達)이 안문(雁門)을 나서고, 조국공(曹國公) 이문충(李文忠)이 부장군(副將軍)으로, 응창(應昌)을 나서고, 송국공(宋國公) 풍승(馮勝)이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감숙(甘肅)을 취하고, 광곽첩목아(擴廓帖木兒)를 쳤다.」라고 하였으니… …
➨ 「‘홍무(洪武) 5년(年)’ 이때는 병사(兵士)들이 한 진지(陣地)에 죽치고 앉아 성(城)이나 쌓고 있을 그러한 한가(閑暇)한 때가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곧,
㈢ 「서력(西曆) 1,372년(年)【홍무(洪武) 5년(年)】에 감숙(甘肅)을 토벌(討伐)하고, 축조(築造)했다」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설명(說明)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當時) ‘홍무(洪武) 5년(年)’ 때는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 군대(軍隊)를 동원(動員), 토벌작전(討伐作戰)을 진행(進行)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兵士)들을 성(城) 쌓는 곳에 동원(動員)할 수 있는 여력(餘力)이 없는, 급박(急迫)한 시기(時期)였기 때문이다.
… 산해관(山海關)【又名渝關、榆關】에 있다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 가욕관(嘉峪關)【天下第一雄關】에 있다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이 두 관문(關門)은, ‘일란성(一卵性) 쌍둥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 「천하제일(天下第一)」이란, “천하(天下) 곧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밖에 없다”라는 뜻이다. 그러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하나는 “짝퉁 모조품(模造品)”이란 뜻이다.
➨➨➨ [출처 : 維基百科 自由的百科全書] : 〈被稱為天下第一雄關. 與千里之外的天下第一關 : 山海關遙相呼應, 聞名天下. :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천리(千里) 밖에 있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 산해관(山海關)과 서로 멀리 떨어져 호응(呼應)하고 있어 천하(天下)에 이름이 들린다〉라고 하였는데,
이게 얼마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하며, 언어도단(言語道斷)적인 말인지를 알 수 있다.
즉(卽), 위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대로라면 : 「가욕관(嘉峪關)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에서 천리(千里) 밖(外)에 있다」라는 ‘산해관(山海關)=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㈣ 「동(東)쪽 천리(千里) 밖(外)」은 : 가욕관(嘉峪關)에서 장액(張掖)까지는 500리(里), 장액(張掖)에서 무위(武威)까지 5 백리(百里)이니, 일천(一千) 리(里)요, 더 나아가면 황하(黃河)에 닿는데, 이러한 「황하(黃河) 변(邊)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산해관(山海關)’이 있어야 한다.」 일천(一千) 리(里) 밖에서 서로 호응(呼應)을 하려면 말이다.
㈤ 「서(西)쪽 천리(千里) 밖(外)」은 : 돈황(燉煌)까지 800리(里), 폐(廢) 수창현(壽昌縣)까지 50리(里), 옥문관(玉門關) 및 양관(陽關)에서 포창해(蒲昌海)까지 3백 여리(餘里)에 이르므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산해관(山海關)은, 포창해(蒲昌海) 연안(沿岸)이어야 한다.」
【通典, 州郡 : 蒲昌海, 一名鹽澤, 廣袤三四百里, 則蔥嶺于闐兩河之所注 : 포창해(蒲昌海)는 일명(一名) 염택(鹽澤)이다. 넓이[廣袤 : 東西:南北)가 3, 4 백리(百里)이며, 총령(葱嶺)과 우전하(于闐河)의 물이 모이는 곳이다.】
㈥ “가욕관(嘉峪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10,000리(里) 이상(以上) 떨어진 곳에 있다. 따라서 위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은, “짝퉁 모조품”임을 스스로 고백(告白)하고 있다.
「‘천리(千里)’와 ‘일만(一萬) 리(里)’는, 비교대상(比較對象) 자체(自體)가 될 수 없다.
(23)-2) 〈수사록(隨槎錄) 본문(本文) ㈡ / 〈산해관(山海關)에서 3리를 가면 심하(深河)라는 곳이 있는데, 일명 ‘석하(石河)’라고도 한다. 길에 모래(沙石)가 가득 깔려 있어서 발이 물에 젖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수사록(隨槎錄)」은 : 서력(西曆) 1,831年에 한필교(韓弼敎)【1,807(純祖, 7) ~ 1,878(高宗, 15)】에 의해 기록(記錄)된 연행기록(燕行記錄)임을 감안(勘案)해 보면 : 왜 “심하(深河)”가 “1 천리(千里)” 동(東)쪽으로 이동(移動) 심양(瀋陽) 동(東)쪽에 자리 하고 있는 것일까?
즉(卽)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도, 심양(瀋陽)도 모두 ‘짝퉁 모조품’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위의 ‘수사록(隨槎錄)’에서 밀하고 있듯이 “심하(深河)”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흐르고 있으니, 하천(河川) 바닥이 모두 모래로 되어있는 것이다.
➨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이나 그 서(西)쪽 땅 어디에도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 곧 짝퉁 모조품(模造品)이라는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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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용주유고(龍洲遺稿)【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제2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김 장군을 애도하며〔哀金將軍〕:
〈義勇堂堂死不殫。始知男子出東韓。威生大漠陽和變。血射長空白日殷。漢使載金催帝奬。邦人爲廟聳江干。莫言陵律今如此。誰却將軍大將壇。: 의리와 용기 당당하여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 남아가 동한(東韓)에서 나왔음을 비로소 알겠네. 사막(沙漠)에서 위엄 부리니 따뜻한 날씨 변하고, 창공에 피를 뿌리니 태양이 붉게 물드네. 중국 사신 금 싣고 황제의 포상 재촉하고, 나라 사람이 지은 사당은 강가에 우뚝하네. 이릉과 위율아 지금 이와같다 말하지 말라. 누가 대장군의 단에서 장군을 물러나게 하랴〉하였다.
➨ 「김응하(金應河)와 3천(千) 병사(兵士)들이 최후(最後)까지 싸우다 전멸(全滅)했다」라고 전해지는 “심하전투(深河戰鬪)”는 전형적(典型的)인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일어났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여기서 또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하는 것은 『동한(東韓)』이라는 나라 이름[國名]이다. 이는 동국(東國)이라는 이름도 포함(包含)되는 것으로, 『“동한(東韓), 동국(東國)”이 있었다고 한다면 분명(分明) 대칭(對稱)이 되는 “서한(西韓), 서국(西國)”이 있어야 함은 순리(順理)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동한(東漢)”은 무엇이고, “서한(西漢)”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이해(理解)하시 쉽지 않을까! 도대체 서한(西韓)은, 서국(西國)은 누굴 지칭(指稱)하는 것일까? 이럴 때 “동한(東韓)이니 동국(東國)”이니 하는 나라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된다.
이제는 한국인(韓國人)들도 먹고살 만하지 않은가! 역사인식(歷史認識)에 대한 전향적(轉向的)인 자세(姿勢)가 필요하지 않을까!
➨ 언제까지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 집단(集團)”이 만들어 놓은 “반국가적(反國家的) 역사서(歷史書)를 달달 외우며, 가슴에 품고, 살아갈 건가?”
(25) 密菴先生文集卷之十六, 傳 / 金將軍應河傳 : 〈會大風衝塞起。沙礫擊人面。日色晦冥。銃藥飄散。: 변방에서 일어난 큰바람(大風)을 만나, 모래와 조약돌이 사람의 얼굴을 때리니, 일색(日色)【햇빛, 하늘의 색깔】이 캄캄하고 어두워져(晦冥), 총약(銃藥)이 펄럭이며 날아 흩어져… …〉라고 하였으니,
당시(當時)의 계절(季節) 요인(要因)으로 보면【1,619년(年) 3월(月)】“사막지대(沙漠地帶)”의 전형적(典型的)인 “매(霾)” 현상(現象)을 말하는 것이다.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이런 일을 경험(經驗)해 본 분이라면 100% 동감(同感)할 것인바, 필자(筆者) 역시 젊은 시절 여러 차(數次)에 걸쳐 이런 “매(霾)” 현상(現象)을 몸으로 때웠다.
‘김응하(金應河)의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말하기를 : 「모래바람이 불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커다란 모래바람을 ‘매(霾)’라고 한다. 「갑자기 크게 매(霾)가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라고 사서(史書)에서 말하고 있다.
「매(霾)」 : 흙비 올 매(霾) : 「특히 3, 4월의 모래바람은 한 치 앞도 분간(分揀)할 수 없는 지독한 ‘토사(土砂)=토사(土沙)’의 분진(粉塵)인데,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風景)이다.」 지세(地勢)와 자연환경(自然環境)은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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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 / 祭文 : 창성의 忠武公 金應河를 모신 서원에 사액하는 치제문〔昌城忠武公金應河書院賜額致祭文〕
〈粤在戊午, 深河有役, 詔書徵旅, 弊賦是索, 爰有虎臣, 佩符西徼, 受命誓師, 實摠左校 : 지난 무오년에, 심하(深河)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천자가 조서로 징병하여, 우리나라 군사 요구했지, 이에 용맹한 신하 있어, 병부 차고 서(西)쪽으로 가, 명을 받아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실로 좌영의 군대를 거느렸지〉라고 기렸는데… …
➨ 위의 글을 쓴 저자(著者) 「이건명(李健命)」은 : 〈AD 1,722년[景宗 2] 4월 5일, 흥양(興陽)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죄인(罪人)’ 이건명[李健命 : 1,663~1,722]의 유배지(流配地)를 같은 현(縣)에 있는 나로도(羅老島)로 옮겼다. 그리고 넉 달 뒤, 선전관(宣傳官) 이언환(李彦瑍)ㆍ금부도사(禁府都事) 이하영(李夏英)이 입회(立會)한 가운데 이건명(李健命)은 참수(斬首)에 처해졌다.」 : [出處 : 고전번역원 DB 해제(解題)]〉라고 전해진다.
위의 글에서 “김응하(金應河)”가 임금의 명(命)을 받고 오랑캐(後金) 노이합적(奴爾哈赤)을 치기 위해 진군(進軍) 출정(出征)한 곳은 : 「佩 符 西 徼 : 패부(兵符)를 차고 서(西)쪽 변방(徼)으로 갔다」라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한양(漢陽)=한성(漢城)=도성(都城)”에서 바라볼 때 : 서(西)쪽이 어딘가? 또 북(北)쪽은 어딘가? 이걸 분간(分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능멸(陵蔑)하고, 천하(天下)에 둘도 없는 어리석은 민족(民族)임을 공포(公布)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똑같이 적용(適用)되는 : 「반국가적(反國家的), 반민족적(反民族的)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한반도(韓半島) 땅 어디에서 보더라도 :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은 “북(北)”쪽이지 서(西)쪽 땅일 수 없다.」진짜 답답(沓沓)한 이야기요, 너무 답답(沓沓)해 답(答)이 없는 이야기다.
➨ 위에서 말해주고 있는 명백(明白)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김응하(金應河)는 3,000 병사(兵士)를 거느리는 병부(兵符)를 차고, 멀리 서(西)쪽 변방(邊方)으로 출정(出征)했다」라는 이야기다.
이런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이 바로 「조선인(朝鮮人)에 의한, 조선(朝鮮)을 위한, 조선(朝鮮) 민족(民族)을 위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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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존재집(存齋集)【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23권 / 전(傳) / 의사 양공전〔義士梁公傳〕
〈獨深河大樹下死將軍。立萬古綱常。: 홀로 심하(深河)의 큰 나무 아래서 죽은 장군이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을 세웠다. 중략(中略). 嗚呼。遼沙白骨。閱歷百年風霜。節骼義肫。豈盡磨滅否耶。: 아, 요동 “요(遼)”【원문(原文)을 보면 “요(遼)”라고 했지, 요동(遼東)이라고 하지 않았다】의 모래 속 백골(白骨)이 백 년의 풍상(風霜)을 지나면서 절개 있고 의로웠던 뼈가 어찌 모두 마멸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번역(飜譯)은 있는 그대로를 해야 함은 번역(飜譯)의 기본(基本)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사첨족(畫蛇添足) 즉(卽), 사족(蛇足)을 달면 안 된다」라는 뜻이다. 원문(原文)에는 분명(分明) 「요(遼)」라고 했으므로 「요(遼)」땅 전체(全體)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요동(遼東) 요서(遼西)’를 모두 포함(包含)하는 것이 “요(遼)”라는 글자의 의미(意味)다.
번역자(飜譯者)의 의도(意圖)대로라면 : 「요(遼)」를 ‘요동(遼東)’ 땅으로 국한(局限)시키는 것인데, 그럼 ‘요서(遼西)’ 땅은, “요(遼)” 땅이 아니라는 이야긴가?
‘원전(原典) 원문(原文)’에 따르면 : 「요(遼)」 땅은 사막지대(沙漠地帶)이며, 심양(瀋陽)이나 북경(北京) 모두 사막(沙漠) 위에 세워진 도회지(都會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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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해관(山海關)과 가욕관(嘉峪關)은 그 축조(築造) 형태(形態)가 “일란성(一卵性) 쌍둥이”처럼 똑같다. 그 시차(時差)가 무려(無慮) 1,500년 정도(程度)가 되는데 말이다.
【기원전(紀元前 : BC) 221년(年)에 ‘제(齊)’를 마지막으로 멸(滅), 천하통일(天下統一)을 했다고 전해지니 이후(以後) 시황제(始皇帝)가 급사(急死)할 때까지 BC 213년(年) 사이에 몽념(蒙恬)과 그 40만(30만) 대군(大軍)들이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산해관(山海關) 역시(亦是) 이때 축조(築造)된 것이다. 더구나 3층 누각(樓閣) 문미(門楣)의 현판(懸板) “天下第一關”이라는 글자가 바로 “이사(李斯)의 친필(親筆)”이라고 전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황당(荒唐)하게도 글씨체는 진(秦)나라 때의 것이 아닌 한(漢)때의 것이라고 하니 웃기는 일이다. 더불어 3층(層)이 누각(樓閣)이라고 하였는데, 2층(層) 누각(樓閣)밖에 없으니 이게 뭔 일일까?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진(秦) 때에 쌓고 만들었다’라는 것은, 거짓말(虛構)이라는 증거(證據)다. 특히,
➨➨➨ 「산해관(山海關)」 : 연행기록(燕行記錄)으로 보면 : 산해관(山海關)은 3층(層) 누각(樓閣)으로, 3층 누각(樓閣) 문미(門楣)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진황도(秦皇島)에 있다는 산해관(山海關)은, 2층(層) 누각(樓閣)으로 기록(記錄)과는 전혀 다른 관문(關門)이다.」그러나,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은, 3층(層) 누각(樓閣)으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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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의 기록(記錄)을 보면 : 열이면 열 모두가 「심하(深河)는 요서(遼西) 땅의 산해관(山海關) 서(西)쪽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 동(東)쪽의 심하(瀋河)는, 곧 혼하(渾河)일 뿐, 심하(深河)가 아니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로 보아도 : 「심양(瀋陽)과 산해관(山海關)은 ‘1 천리(千里)’ 떨어져 있다. 전혀 다른 엉뚱한 하천(河川)에서 절개(節槪)를 지킨 병사(兵士)들의 영혼(靈魂)을 달랜다?」
기막힌 이야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말 그대로 “기가 막힐 일이다” 여기서 문제(問題)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 「엉뚱한 곳, 엉뚱한 장소(場所)에서 막걸리를 따라 놓고 영령(英靈)들을 위로(慰勞)한다」라는 추태(醜態)를 벌이지 말자. 창피(猖披)하지도 않은가!
그러고도 ‘한류(韓流)’니, ‘K-Pop’이니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資格)이 있나?
그리고 역사(歷史) 공부(工夫)를 좀 하자.」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이 만들어 놓은 “한글 해설서(解說書)”인 “식민지전용(植民地專用) 조선사(朝鮮史)”를 과감(果敢)하게 교수대(絞首臺)로 보내자.
➡ 명(明)의 요청(要請)에 의해 파견(派遣)되었던 13,000여(餘)【일설(一說)에는 20,000여(餘)】병사(兵士)와 함께 출전(出戰)했던 종사관(從事官)들!
‘옥문관(玉門關)=옥관(玉關)=용만(龍彎)’을 넘어 귀환(歸還)한 자(者)들이 겨우 ‘5,000여(餘)’라고 하였으니, 8,000여(餘)∼15,000여(餘) 병사(兵士)들과 일부(一部) 종사관(從事官)들은 그곳에서 ‘전사(戰死)=전몰(戰歿)=전망(戰亡)’하였으니, 그 젊은이들의 혼(魂)만이 귀환(歸還)했으리라… …규방(閨房)에서 눈물로 지새는 많은 이들이 또한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심하전역(深河戰役)의 ‘터’는 :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으로부터 “서(西)쪽으로 1 만리(萬里)”쯤 떨어진 곳에 있다. 특히 그곳은 사막지대(沙漠地帶)가 ‘1 천리(千里)’ 광막(廣漠)하게 펼쳐져 있는 곳에 있었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 「본래(本來)의 산해관(山海關), 심하(深河), 심양(瀋陽), 북경(北京)」등은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는 사실(史實)이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분노(忿怒)를 자아내게 한다.
위에서 인용(引用)한 많은 연행기록(燕行記錄)에서 말하고 있듯이 「산해관(山海關)도, 심하(深河)도, 심양(瀋陽)도, 요동(遼東), 요서(遼西) 땅 모두가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라는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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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조선사(朝鮮史)는 이렇게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허구(虛構)의 사실(事實)로 만들어져 있을까? 스스로 치고받다가 소멸(消滅)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즉(卽),
「서세(西勢)와 일제(日帝) 등의 강대국(强大國)들이 “옛 조선(朝鮮)의 모든 것들을 망가뜨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역사(歷史)까지도 조작(造作), 최후(最後)에는 동족(同族)끼리 치고받다가 스스로 소멸(消滅)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건 팩트(Fact)다.
이렇다면 :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일까? 답(答)은 하나다.
즉(卽), 「시대(時代)에 맞지 않는 법(法)과 제도(制度)를 고쳐 스스로 강(彊)하게 하고【變法自彊】, 나라를 부유(富裕)하게 하고, 군대(軍隊)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富國强兵】」는 것이고, 그 이후(以後) 옛 영광(榮光)을 되찾으려 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 정신(情神)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덧붙인다면 : 「시대(時代)에 맞지 않는 법(法)과 제도(制度)를 고쳐 스스로 강(彊)하게 하고【變法自彊】, 나라를 부유(富裕)하게 하고, 군대(軍隊)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富國强兵】」하는 데 있어,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을 발본색원(拔本塞源), 강력(强力)하게 처단(處斷)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이란 국가(國家)의 이익(利益)을 심하게 훼손(毁損)하는, 하려는 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영토(領土)를 분쟁화(紛爭化)하려는 무리, 친일사대주의자(親日事大主義者)들,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 헌법(憲法)을 불법(不法)으로 무력화(無力化)하려는 친위세력(親衛勢力), 사적(私的) 이득(利得)을 취(取)하고자 국론분열(國論分裂)을 획책(劃策)하는 무리」 등이다. 여기에는 대통령(大統領)도 결코 예외(例外)일 수 없다.
➨ 「대통령(大統領)」이란 자리는 말 그대로 ‘선출직(選出職)’으로, 현행(現行) 제도(制度)로 보면 : 「5년(年)짜리 임시직(臨時職)」이다.
‘5년(年)’짜리 임시직(臨時職)이, 선출(選出)한 국민(國民)들의 뜻과 다르게 정치(政治)를 하지 않고, 권력(權力)을 남용(濫用), 국민(國民) 위에 군림(君臨)하며, 그 권력(權力)을 휘두른다면 주권(主權)을 가진 국민(國民)들은, 스스로 행사(行事)한 주권(主權)을 회수(回收)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치(理致)다. 이게 민주주의(民主主義) 【주권(主權)이 국민(國民)에게 있으며, 국민(國民)에 의해 정치(政治)를 행하는 주의(主義).】다.
2024년 10월 2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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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다음 게재 내용은 :
(1) '발해(渤海)는 가로(橫)로 수백리에 걸쳐 놓여 있다'
(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속의 국도(國都 : 京都)의 地形地勢(지형지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하겠습니다.
위의 것 중에서 먼저 완성되는 것으로 게재 예정입니다.
참고해 주세요.
문무선생님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 하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의 논문은 가슴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대진"님!
감사합니다.
* '조선사의 실체[왜곡과 조작이 되지 않은 진실된 조선 역사]'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접근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옛 '고전 원전의 기록'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진"님의 가슴에 큰 울림이 있었다니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더 좋은 내용을 가지고 뵙겠습니다.
추운 겨울철이 다가오고 있는데,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라며,
댁내 두루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십수년을 공부하지만 머리속 지도상으로 그리기엔 난해합니다.
시각적 지도상으로 풀이해주신다면 더할나위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