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통상적으로《삼국지》라 부르는 소설《삼국지》는 본래《삼국지연의》라고 하는 것으로서, 정사《삼국지》와는 구별된다. 소설《삼국지》는 진수(陳壽)의 정사《삼국지》와 배송지(裵松之)의 주(注), 그리고 원대(元代)의《삼분사략(三分事略)》·《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에 근거해서, 중국 명대(明代) 초기에 나관중(羅貫中)이라는 이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삼국지》의 내용 모두를 역사적인 진실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리 옳다고 할 수 없다. 실지로 정사에는 없는 내용인데 구전된 내용을 첨부한 경우가 종종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소설이라고는 해도 소설《삼국지》에서는 후한(後漢)말에서 삼국시대까지의 다양한 정치적·군사적 분쟁을 그렸고, 또한 전쟁의 묘사에도 주력하여 경쟁으로 가득한 생활상의 경험과 책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좀더 넓히고, 또 그 이전 및 이후 시대와도 연결지움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소설《삼국지》의 내용 중에서 중국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에 보탬이 될 만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담아보려 한다. 물론 제갈량(諸葛亮)·조조(曹操)·장비(張飛) 등 등장인물의 전형적인 모습과 시시각각 벌어지는 사건들의 낱낱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삼국지》가 완전한 역사적 진실도 아니지만 또한 허구도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보다 많은 중국사의 맥을 짚어 나가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촉한정통론
소설《삼국지》와 정사《삼국지》를 비교하면 아마도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삼국지》의 시작은 유비·관우·장비 세사람의 도원결의(桃園結義)에서부터 시작되며, 그 이야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유비(劉備)쪽에 두어져 있다. 조조는 간웅이고, 그의 아들 조비는 한(漢)의 찬탈자이며, 주유는 한번도 제갈양을 이겨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이는 소설《삼국지》가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을 정통왕조로 하여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사《삼국지》는 이와 다르다. 정사의 저자 진수(陳壽)는 위(魏)에만 본기(本紀)를 두어 정통왕조로 서술하고, 촉(蜀)·오(吳)의 왕은 신하로 취급하여 열전(列傳)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위(魏)를 정통으로 하고 촉(蜀)을 참절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魏)정통론적 역사관에 대해 후대의 역사가들은 반대의견을 제시해왔다. 예컨대 동진(東晉)시대에 습착치(習鑿齒)가《한진춘추(漢秦春秋)》에서 처음으로 촉한정통론을 제기한 이래, 촉한정통론은 남송(南宋) 주희(朱熹)의《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원말명초의《삼국지》에서도 촉한을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확고하게 굳어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것처럼 유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한왕조를 합법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특히 주변의 이민족들에 극히 많은 시달림을 당한 남송(南宋)때 이러한 논의를 강조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현실적인 약소국의 입장에 서 있던 남송이 명분론을 강조하여 자존의식을 되찾고자 촉(蜀)에 정통성을 부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촉한정통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정통론이 어떤 시대적 배경 하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진수가 위(魏)를 높여 정통으로 삼은 것에는 그 나름의 고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진(晉)왕조 사람이고 진은 위(魏)를 찬탈하여 수립된 왕조이므로, 정통이 위(魏)에 있다면 진이 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또한 위(魏)는 후한의 뒤를 이어 중국문화의 발흥지인 황하유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사적이 비교적 많았으므로, 위의 연호를 따르는 것이 비교적 편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촉한정통론을 내세운 습착치 역시 그 당시에 벌어지고 있던 제위찬탈에 항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천심(天心)은 힘으로써 억지로 할 수 없음'을 밝히기 위해 그리한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정통론에 대해서는《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의 다음과 같은 비평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책(《삼국지》)은 위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습착치가《한진춘추》를 짓고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주자 이후 습착치를 옳다 하고 진수를 그르다 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치를 볼 때에는 진수의 잘못이 명백하나 세력으로써 따져보면 습착치가 촉한을 황제로 말하기는 순조로와 쉬운 일이나, 진수가 촉한을 황제로 하려 한다면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다. 대저 습착치의 시대는 진이 이미 남쪽으로 이동해 그 사업이 촉한과 비슷하므로 한구석에서나마 안정을 얻은 왕조를 정통으로 삼으려 하였으니 이는 그 시대에 따라서 논한 것이다. 진수는 자신이 진 무제의 신하였는데, 진 무제가 위의 정통을 이어받았으니 위를 위조(僞朝)로 하면 이는 진을 곧 비정통왕조로 하는 것이 되는데, 그 시대에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당고의 화
1. 배경 - 환관과 외척세력의 전횡
《삼국지》이야기는 후한의 영제 말기부터 전개되는데, 제위계승분쟁을 둘러싼 권력암투와 그 중요한 권력의 핵으로서 '십상시(十常侍)'라는 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환관이지만 어느 제후왕 이상의 권세를 휘둘러 심지어 천자조차도 그들의 말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이 단기간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후한 전반기부터 그 싹이 보였다는 것이다.
아래의<표>는 후한대(後漢代)의 외척·환관세력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로 후한(後漢) 화제(和帝) 이후, 두씨(竇氏), 등씨(鄧氏), 양씨(梁氏) 등의 외척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이처럼 이들 외척세력이 전횡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들이 정치를 담당하기에 매우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외척과 함께 이러한 황제계승 음모에 가담한 또 하나의 축으로 환관을 들 수 있다. 황제가 외척의 전횡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관세력을 이용함으로써 이들 환관세력이 급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후한말 환관세력의 급성장은 환제(桓帝)가 외척세력인 양기(梁冀)를 몰아내기 위해 환관들과 모의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일단 외척세력을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그를 대신하여 오히려 환관의 세력이 더 커지게 되니, 황제들도 이를 제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제1차 당고(黨錮)의 화(禍)
이러한 외척과 환관의 전횡은 정치와 사회 전반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이에 당시 지배층인 호족(豪族) 중에는 이들 외척·환관세력과 결탁한 무리도 나타났지만, 이와는 반대로 유교적인 교양을 지니고 명예와 예절을 숭상하여 이들 세력에 대항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 후자(後者), 즉 유교적 교양을 익힌 지식인들은 재야(在野)에서 정치를 비판하면서 소위 청의(淸議)를 조성하였다. 그 구심점은 중앙의 태학(太學)이었는데, 낙양의 태학생(太學生)들과 재야 지식인들은 환관의 부패정치와 정권독점을 비난하여 여론을 조성하면서, 환관과 그 추종자를 탁류(濁流)로 빗대는 동시에 스스로를 청류(淸流)라 일컬었다.
특히 환제(桓帝)가 환관의 힘을 빌어 외척인 양씨 세력을 척살한 이후, 이들 청류파는 급성장해가는 환관세력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대해 환관들은 황제를 움직여 사예교위(司隸校尉) 이응(李膺)과 태부(太傅) 진번(陳蕃) 등이 중심이 되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탄핵하였다. 이를 들은 황제는 이들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종신금고형을 내렸으니, 이를 제1차 당고(黨錮)의 화(禍)라 한다(166년).
제2차 당고(黨錮)의 화(禍)
그 후 환제(桓帝)가 죽고 어린 영제(靈帝)가 제위에 오르자, 외척 두무(竇武)는 이응(李膺) 등을 다시 기용하여 환관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일이 누설되어 환관 조절(曹節)·왕보(王甫) 등이 먼저 기선을 제압, 진번(陳蕃)과 두무(竇武)를 체포·살해하고 아울러 청류세력을 탄압하였다. 이 때 이응(李膺)을 위시하여 당인(黨人)으로 사형을 당한 자가 백여명이고 종신금고된 자도 6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과 가까운 친척, 제자 가운데 관직에 있던 자들도 모두 해임되거나 금고처분을 받았다. 이를 제2차 당고(黨錮)의 화(禍)라 한다. 그 후에도 당고(黨錮)는 10여년이나 더 계속되다가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폭발한 후에야 비로소 사면령이 내려지게 된다.
결과
두 차례에 걸친 당고(黨錮)사건으로 청류파 관료는 정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울러 탁류라 불리는 환관·외척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이들의 파행적인 정권독점과 권력남용의 강도는 한층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사회정의가 크게 흔들리고 정치기강도 해이해지면서 사회불만이 야기되어, 이후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정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는 하나, 이들 청류파는 재야(在野)에서 살아 남아, 이후 위진남북조의 지배층인 귀족층의 원류가 되었다. 또한 혼란한 정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성향은 일민적(逸民的)인 것으로 변질되어, 위진남북조의 군웅할거에도 한 몫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제갈양과 방통, 서서 등 삼국시대에 활약한 모사들 대다수는 이들 청류파 계열이었다고 생각된다.
지배층과 관리등용제도의 변화
전한(前漢)의 종실인 동시에 남양(南陽)지방의 호족이었던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여러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즉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대의 전반적인 사회지배층은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豪族)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호족이 관료로서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이 당시의 관료추천제도인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를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향거리선제는 각 지방에서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는 제도로서, 이미 전한 무제때부터 시행되어 왔다. 각 군국(郡國)에서 효·렴(孝·廉 : 효자(孝子), 염리(廉吏)) 각 1명씩을 추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전한 말기 효렴(孝廉)으로 통합된 형태로서 지속되었다.《삼국지》앞부분에서 조조(曹操)가 젊은 시절 효렴(孝廉)으로 뽑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 제도가 후한(後漢) 말까지 계속 실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는 한가지 근거가 되겠다.
이들 호족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혼란기에 유민들을 규합하여 자위수단을 강구함으로써 그 세력을 한층 더 신장시켜 갔다. 대체로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며, 군사적으로 장원 안에 있는 민(民)들을 무장시켜 사병화(私兵化)할 수 있는 군사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예컨대 동탁, 왕윤이나 동승, 유표, 유장, 원소·원술, 주유, 손권 등이 호족세력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아마도 왕윤이나 동승, 유표, 원술같은 이가 이 제도를 통해 정계에 나아갔으리라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호족들이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를 장악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독점적인 호족의 관료화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후한시대에 호족의 관료화를 차단하는 강력한 세력이 중앙 정계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인데, 앞에서 언급한 환관과 외척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이리하여 호족은 환관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호족 상호간의 인간관계를 구축하고 이러한 유대관계를 통하여 환관세력에 대항하였다. 한편 환관은 이들 호족을 당인(黨人)이라 하여 탄압하였으니, 이 두 세력간의 대립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제1차·2차 당고(黨錮)의 화(禍)인 것이다.
그런데 위(魏)가 후한을 찬탈하면서, 후한대의 문란한 관직등용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추천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라는 것이다. 이 제도는 향거리선제와 마찬가지로 지방의 유능한 인재를 추천이라는 과정을 통해 선발한다는 목적을 띠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각 주군(州郡)에 중정관(中正官)을 두고, 그들로 하여금 지방의 유능한 인사를 추천토록 하는데, 각 지역의 중정관은 관할 지역 내의 여론을 살펴 덕망있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을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의 9품(品)으로 분류하게 된다. 이것을 향품(鄕品)이라 한다. 이처럼 지방에서 추천된 향품(鄕品)에 따라 중앙에서 관리로 임명하는 관품(官品)을 주는데, 향품에서 4품을 내려 관품을 제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중정관은 대체로 현지사정에 밝은 그 지역출신의 고관으로 임명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이미 호족세력이 지방의 여론을 좌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호족의 자제가 추천을 받아 고위관직을 독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효렴(孝廉)의 본래 의도가 '효자가문에서 충신이 배출된다'는 데 있지만, 실제로 독실한 효행자를 판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리고 일반 평민보다는 지방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호족의 자제가 효행이 독실하다고 평판이 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국시대를 통일하는 진(晉) 건국에 즈음하여 사마씨(司馬氏)가 자신들에 비협조적인 위(魏)왕조의 고관들을 숙청하였으므로, 이 제도는 자연히 사마씨와 관계깊은 대호족(大豪族)들이 좌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시행 초기에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성을 강하게 띠고 있던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의 본래 의미가 점차 퇴색하여 오히려 중앙권력의 약화에 일조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 결과, 호족과 관품(官品)이 밀착되면서 이전보다 더 가문을 중요시하는 문벌귀족층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대(漢代)에 비해 가문과 문벌 등 종족의 배경을 더욱 중시하는 사회체제, 다시 말하면 '호족사회에서 귀족사회'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둔전법
《삼국지》에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위(魏)의 조조(曹操)는 둔전(屯田)을 대규모로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제도는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시행되었다고 한다. 간략히 말하면 국가적 규모의 소작제(小作制)라 할 수 있다.
'솥의 세 발과 같은 형세'로 삼국이 서로를 지탱하는 속에서도, 특히 위(魏)가 발전할 수 있었던 정치경제적 배경은 후한(後漢)제국의 기반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과 경제적으로 조조가 실시한 둔전법이 사회와 경제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촉(蜀)이나 오(吳)지역도 마찬가지지만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후 계속된 전란으로 위(魏)의 인구는 한대의 큰 군(郡)에도 못 미칠 정도로 격감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감소로 농경지가 황폐해지고 임자없는 농지가 크게 증가하였다. 따라서 조조는 196년에 둔전법을 실시하여 국가경제를 재건하려 하였다. 즉 임자없는 농경지를 둔전(屯田)으로 하고 유민을 모아 농지를 주어 둔전민(屯田民)으로 삼았다. 둔전민은 둔전관(屯田官)의 호적에 편입되어 일반 민호(民戶)와 구분되었고, 중랑장(中郞將) 등의 농관(農官)으로 하여금 관우(官牛)와 종자 등을 나누어 주고 조세의 징수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우(官牛)를 빌려간 자는 수입의 6할을, 자기의 소를 가지고 경작한 자는 수확의 반을 국가에 납부하게 하였다. 이로써 유민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써 국가의 경제력을 재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의 강남개발
흔히 양자강유역 일대를 강남(江南)지방이라 한다. 본래 중국 고대의 강남지방은 '형주·양주지방은 습지대[荊揚沮 地]'라는 이유로 화북지방보다 개발되지 못하여 변두리로 천시받아 왔다. 강남지방이 황하유역의 화북(華北 : 중원(中原)지방과 어느 정도 겨룰 수 있는 위치에 오게 된 것은 삼국이 대립하던 시기부터였다. 따라서 삼국 중에서도 동오(東吳)의 세력확장은 강남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소설《삼국지》에 그려지는 손책·손권 형제의 영토확장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호남(湖南)·강서(江西)·복건(福建)방면의 개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개척지로 천시받던 강남에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후한 말기부터였다. 전란을 피해 피난내려오는 화북인이 크게 증가하였고, 그러한 인구급증과 함께 삼국 중 오(吳)나라 때 개발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약 50여년 간 지속된 삼국의 대립·경쟁과정 속에서 각국은 서로 앞다투어 국력의 배양과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특히 대외적인 발전이 현저하게 추진되었다. 즉 촉한(蜀漢)의 운남(雲南)지방 정복과 한중(漢中)의 개발, 조위(曹魏)의 오환(烏桓·烏丸) 격파, 요동(遼東)의 공손씨(公孫氏) 공략 등이 이러한 예가 되겠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강남개발이며, 오(吳)의 뒤를 이어 강남에 기반을 잡은 동진(東晉)시대에는 본격적으로 경제발전이 추진되었다. 뒤이어 남조(南朝), 즉 송·제·양·진(宋·齊·梁·陳) 각 왕조에서도 이를 이어 나갔다. 이들 여섯 왕조[六朝]의 공통점은 강남에 그 기반을 두었다는 데 있으며, 실제로 그 수도는 건업(建業) 혹은 건강(建康)이라 불렸던 지금의 남경(南京)이다. 특히 강남지방은 좋은 기후조건과 비옥한 농경지를 바탕으로 하여 농업생산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피난온 화북인들의 선진적인 농업기술 및 생산기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진척될 수 있었다. 그러나 5대 10국 시대 이전까지의 강남개발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중원을 중심으로 하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개발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진(東晉)이나 남조(南朝)왕조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하다. 그리고 경제력을 비교해 보아도, 송대(宋代) 이전까지는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보다 더 우월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송대(宋代), 특히 남송(南宋)왕조 이후로는 관개수리사업의 진전 및 품종다양화, 1년 2기작 등 농업의 발달로 인해 오히려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을 압도하게 된다. 오죽하면 '蘇湖熟天下足', '天上天堂地下蘇杭'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 - 도교(道敎)의 기초
1. 태평도(太平道)
도교(道敎)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고대의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神仙說)을 그 중심에 두고, 도가·역리·음양·오행·침위·의술·점성 등의 논법·이론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며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떠 조합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주요 목표로 삼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종교라 할 수 있다.
A.D 3세기 무렵 중국에는 신선설(神仙說)이 생겨났다. 이 신선설은 본래 중국 고대에 있었던 각지의 산악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신선설에 중국 종교의 원시적 형태인 무술적 신앙과 각종 주술 및 자연숭배 등이 혼합되어,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력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방술(方術)이 성립되었다. 진시황제와 전한 무제 등의 제왕들도 방사(方士)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였고, 백성들 역시 이러한 신선설이나 방술에 사로잡혀 그 종교적인 공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 그리하여 전한 말에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가 초인적인 존재로 부각되어 신선화됨으로써 황로사상(黃老思想)이 대두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신선방술의 내용이 조정·확대되면서 새로 들어온 종교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도교(道敎)로 개괄되는 특정 종교로서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후한 말기의 혼란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여 도교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종교적 집단이 출현하였다. 태평도는 오행사상(五行思想)·무술·의술에 능했던 산동성(山東省) 출신의 우길(于吉)이 후한(後漢) 순제(順帝)때 곡양(曲陽)의 샘가에서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그 후 강절(江浙)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향을 피우고 도서를 낭송하며 부적을 담궜던 물을 병자에게 먹여 병을 고치는 등의 주술적 질병치료법을 중심으로 하면서 여기에 불교적인 의식을 가미해갔다. 소설《삼국지》에서 소패왕(小覇王) 손책(孫策)을 격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도사 우길(于吉)과 같은 이름인데, 아마도 이전 시대의 인물을 삼국시대에 끌어들인 듯하며, 이런 부분이야말로 바로 정사《삼국지》와 소설과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그의 뒤를 이어 대현양사(大賢良師)라 자칭하는 거록(鉅鹿)출신의 장각(張角)이 태평도의 조직을 굳건히 했는데, 그 역시 질병치료와 사과신신앙(司過神信仰)을 채택하였다. 그는 이러한 종교집단으로 많은 도당을 얻어 큰 세력을 잡게 되었고, 급기야는《삼국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처럼 수십만의 신도를 동원하여 후한 왕실을 타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184년). 이들은 '창천(蒼天)은 죽었고 황천(黃天)이 나오리라'는 참위적 성격을 띤 말을 퍼뜨리면서 누런 두건[黃巾]을 쓰고 봉기했으므로 황건적(黃巾賊)이라 한다. 비록 종교적인 교리면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재해와 부패상을 겪으면서 고난에 시달리고 있던 하층 농민들을 끌어들이는 힘은 강했기 때문에 십여년에 걸쳐 화북지방에서부터 양자강지역까지 수십만의 신자를 얻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결국 간단히 말하면 태평도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초보적인 인과관·주술신앙·내성(耐性)에 의한 질병치료 등을 혼합하고, 당시 사회혼란과 불안을 교묘히 이용하여 성립된 종교집단이라 할 수 있다.
2. 오두미도(五斗米道)
《삼국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유비가 세력확장을 위해 나아가는 곳이 바로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四川)지방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지배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베푸는 장로(張魯)라는 인물이다. 결국 장로(張魯) 및 그 수하들은 조조에게 항복하므로 소설《삼국지》에서는 더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지만, 실제로 이들은 조조로부터 진남장군(鎭南將軍)·만호후(萬戶侯)로 봉해졌으므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이후 천사도(天師道)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태평도(太平道)보다 더 도교(道敎)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시작은 후한 환제(桓帝)·영제(靈帝) 시대의 장릉(張陵)(?∼178)이다. 그는 만년에 유학(儒學)을 버리고 장생법(長生法)을 배워 황제(黃帝)의 구정단법(九鼎丹法)을 터득하고, 사천(四川)에서 저술과 수도에 전념한 끝에 허다한 신들이 강림하여 도를 전수해 주었다 한다. 장릉은 이 법으로 질병을 고쳐주어 수만을 헤아리는 신도를 얻고, 그 신도들로부터 쌀과 비단을 바치는 법을 정하고 신도를 통할하는 직책을 만드는 등 해서 종교집단을 성립하였다. 그의 지위는 아들 장형(張衡), 손자 장로(張魯)에게 계승되었으며,《삼국지》에도 등장하는 손자 장로(張魯)는 사회 혼란으로 야기된 불만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군대를 육성하고 새로운 독립국가를 세웠으며, 교세의 확장을 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천(四川)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도들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읽히고 천(天)·지(地)·수신(水神)에 참회서를 써 바치는 이른바 삼관수서(三官手書)의 법을 시행하며, 부적을 먹이고 기도를 하여 질병을 고쳤다고 한다. 또한 귀졸(鬼卒)·귀리(鬼吏)·간령(姦令)·좨주(祭酒) 등의 직책을 만들어 신도를 통할하고 입교자들로부터 종교헌금이나 치료비의 명목으로 매년 다섯 되의 쌀[五斗米]를 받는 한편 의사(義舍)라는 미육(米肉)까지 제공하는 무료숙박소를 마련하는 등, 조직화된 종교집단을 성립시켰다. 달리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리며, 이 천사도(天師道)와 앞에서 언급한 태평도(太平道)를 원형으로 하여 후에 도교(道敎)가 성립하게 된다.
그 후의 도교사를 간략히 정리하면, 삼국시대와 서진(西晉)시대를 거친 후,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라는 사람이 이 천사도(天師道)의 비합리적인 점을 개혁하고 종교로서의 체계를 정립하였으니, 이를 신천사도(新天師道)라 한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이 신천사도(新天師道)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집대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종교로서의 도교는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귀의를 얻어 국가적인 종교로서 발돋움하였으며, 남북조가 통일된 이후 시기인 당대(唐代)에도 현종(玄宗)과 무종(武宗) 등 절대적인 도교 신봉자를 얻으면서 그 신앙을 세상에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남송(南宋)시대에 이르러 남북종의 양파로 나뉘고, 다시 북종이 둘로 나뉘는 분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중 북종은 전진교(全眞敎)라 하며, 남종은 정일교(正一敎)라고 한다. 이 외에도 도교에 속하는 것으로는 금대(金代)에 창시된 태일교(太一敎)와 진대교(眞大敎)가 있으며, 또 무당도(武當道)가 있다. 이 중 태일교와 진대교는 14세기에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화타(華 )(?∼208) - 외과(外科)와 양생학(養生學)의 태두
《삼국지》에는 명장, 지략가들뿐만 아니라 뛰어난 의술(醫術)의 소유자도 등장한다. 동오(東吳)의 장수 주태(周泰)를 치료하여 그를 살려낸 일, 관우의 독화살맞은 상처를 치료한 그 유명한 고사, 그리고 조조에게 의심받아 생을 마감하는 신의(神醫) 화타(華 )가 바로 그이다.《삼국지》에서도 이미 신의(神醫)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는 실제로 중국의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 인물이라 한다.
그는 내과·외과·부인과·소아과·침구과 등에 정통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외과에 뛰어났다. 그가 이토록 유명한 것은 마비산(麻沸散)이라는 마취제를 이용한 전신마취법을 창안하여 복강(腹腔)종양절제수술과 위장절제봉합수술, 그리고 뇌수술 등의 시술에 성공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외과의술은 거의 오늘날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외과의 태두로 존경받고 있다.
또한 그는 내과·외과의술뿐만 아니라 양생술(養生術)에도 관심을 보여, "움직이면 곡기(谷氣)가 없어지고 혈맥이 잘 통하며 병이 생기지 않는다. 예컨대 문지도리는 끝내 썩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여 의료보건체조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호랑이·사슴·곰·원숭이·새 등의 동작을 모방하여 만든 '오금희(五禽戱)'라는 보건체조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질병예방과 체질증강에 기여한 바가 커, 현재까지도 그의 보건체조법이 전하여 오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마취술뿐만 아니라 양생학설(養生學說)을 주창·발전시켜 중국 의학의 주요학파로 자리잡게 한 인물로서도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삼국시대의 문인들
소설《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曹操)의 모습은 크게 두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난세의 간웅'으로서의 조조이며, 또 하나는 문인(文人)으로서의 조조이다. 실제로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식(曹植) 삼부자는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은 문인이었다. 조조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아들 조비는 중국 최초의 문학평론서로 알려져 있는《전론(典論)》의 저자였고, 여기서 또 '문장(文章)은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이고 불후(不朽)의 성사(盛事)'라는 말로써 문학의 가치를 칭송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리고 조식 역시 뛰어난 시인이었는데, 그의 시적 재능에 깊이 감명받은 조조가 한 때 맏아들 대신 조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고 하는 것이나, 또한 조비의 핍박에 못 이겨 지은 칠보시(七步詩)를 읽어보아도 조식의 문학적인 재능이 비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曹操)의 모습은 크게 두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난세의 간웅'으로서의 조조이며, 또 하나는 문인(文人)으로서의 조조이다. 실제로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식(曹植) 삼부자는 문학적으로도 인정받은 문인이었다. 조조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아들 조비는 중국 최초의 문학평론서로 알려져 있는《전론(典論)》의 저자였고, 여기서 또 '문장(文章)은 경국(經國)의 대업(大業)이고 불후(不朽)의 성사(盛事)'라는 말로써 문학의 가치를 칭송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리고 조식 역시 뛰어난 시인이었는데, 그의 시적 재능에 깊이 감명받은 조조가 한 때 맏아들 대신 조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고 하는 것이나, 또한 조비의 핍박에 못 이겨 지은 칠보시(七步詩)를 읽어보아도 조식의 문학적인 재능이 비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보면《삼국지》에는 무장(武將)과 참모들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인(文人)들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소(袁紹) 휘하에 있으면서 조조(曹操)를 비난하는 신랄한 격문을 지어 조조(曹操)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진림(陳琳), 그리고 조조(曹操)의 부중(府中)에서 활약한 공융(孔融) 등이 그들이며, 이들과 왕찬(王粲)·서간(徐幹)·완우(阮瑀)·응창(應)·유정(劉楨) 7명을 합쳐 후한(後漢) 말기의 연호 건안(建安 : 196∼220)의 명칭을 써서 건안7자(建安七子)라 한다. 이 일곱명 중 공융(孔融)은 기세가 호탕한 산문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왕찬(王粲) 등은 모두 난을 겪었기 때문에 그 시문의 대부분이 비분강개와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학적인 성취가 가장 뛰어난 사람은 왕찬으로, 칠애시(七哀詩)와 등루부(登樓賦)가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또 유정(劉楨)의 증종제(贈從弟) 3수는 개인의 뜻과 포부를 적은 것으로, 언어가 명쾌하고 그 기세가 웅대하며 힘차다. 진림(陳琳)과 완우(阮瑀)는 산문으로 유명한데, 그들의 산문은 역사적 사실을 많이 인용하고 대구법과 대우법을 많이 사용했다. 이는 양한(兩漢)의 산문이 남북조의 변려문(騈儷文)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림(陳琳)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이 있다. 서간(徐幹)의《중론(中論)》이라는 책은 일찍이 조비(曹丕)가 칭찬한 바 있고, 또한 그의 시 실사(室思)는 시정(詩情)이 깊게 배어 있는 매우 출중한 작품이라 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히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올려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