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6일 [연중 제11주일]
마르코 4,26-34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전에 ‘광야’가 존재하는 이유
도입: 하느님 나라는 왜 한 번에 오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지옥과 같은 이집트를 탈출하였을 때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왜 꼭 광야라는 시험의 장소를 거치게 하셨을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이 그 해답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두 비유가 하나의 짝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린 씨가 뿌린 자신도 모르게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에 이른다.’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많은 새들이 깃들여 쉴 수 있는 휴식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구약성경 구절이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서(17,22-24)입니다.
하느님은 손수 향백나무의 가장 연한 가지 하나를 꺾어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됩니다.
그 열매란 이것입니다.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3)
만약 하늘 나라가 우리 노력으로 이뤄진다면 어떨까요? 인간은 교만해질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뤄져야 더 감사할 줄 압니다. 아기가 모든 이치를 깨달아서 자기 노력으로 두 발로 걷고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면 그만큼 부모에게 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행복하게 하시지 않고 광야의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행복해지면 행복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아들과 함께 노숙자로 살다가 백만장자로 자수성가한 크리스 가드너의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홀어머니에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버리고 도망가버려서 어머니 혼자 크리스를 키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화장실에서 자면서도 결국 투자관리자로 큰 회사에 들어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살았고 위로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얻은 행복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16세 때 교통사고로 두 팔을 잃은 슈레아 시나다가우더의 사연은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다행히도 크고 털이 많은 검은 남자의 두 팔을 기증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나자 그 팔이 여성의 팔로 변해갔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 스스로 매우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팔을 잃지 않았다면 팔에 대한 감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화 ‘베테랑’을 생각해봅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재벌 3세 조태호는 자신이 누리는 재산의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더 많은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만족합니다.
미국의 어떤 재벌들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노력해서 성공하는 행복의 기회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없었던 적이 없다면 그 고통을 알지 못하기에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조태호는 가난한 자의 고통 앞에서 “어이가 없네!”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알아야 진정으로 상대의 고통을 통감할 수 있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휴식 같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27년을 감옥에서 버틸 수 있었느냐고 할 때, “나는 버틴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고 포기하지 말라고 연설했던 덴젤 워싱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늘 나라를 믿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성모님은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버티다가 엘리사벳을 통해 참 행복을 맛봅니다.
저는 연옥에 안 가는 기도를 압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2년 동안 바치면 됩니다.
처음 바칠 땐 저도 긴가민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12년 동안 바치고 난 뒤에 느끼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면 알려줄 수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면서 천사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먼저 믿고 버티는 광야를 거치지 못하면 행복을 알 수도 없고 행복을 전해줄 수도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6일 [연중 제11주일]
복음: 마르 4,26-34
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
그 누구도 다녀와 본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떠들어 대다가도 가끔씩 걱정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며 코끼리의 생김새는 큰 기둥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전혀 아닌 이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끔 전례나 그레고리안 성가에 충실한 큰 수녀원 본원 미사, 그것도 부활 성야 미사 같은
큰 미사를 봉헌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 성녀들, 천사들이 모두 좌정해 계시는 곳, 그리고 한쪽 일반석에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
그럼 거기서는 뭘하는가? 마치 부활 성야 미사때처럼 제1독서, 화답성가, 제 2독서, 화답성가...알렐루야, 복음 낭독, 명강론, 성찬의 전례...등등 거룩한 예식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곳.
그래서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돈이나 세상 좋은 것들에만 오르지 함몰되어 살아왔지 미사나 전례에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곳, 그 자체로 생지옥이요 연옥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슬쩍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한없는 풍요로움과 확장성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이 어떤 씨앗보다더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더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언젠가, 먼 훗날에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된 충만함 속에 사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북돋와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땀 흘리는 우리 각자의 현실이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일 강론>
(2024. 6. 16.)(마르 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1)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안에서,
또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알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스테파노 순교자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 라는 씨앗을 심으셨고, 그 씨앗에서 ‘바오로 사도’ 라는 나무가 자라나게 하셨고, 그 나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으셨습니다.
그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은, 하느님과 온 교회 공동체 모두가 함께 누리는 큰 기쁨입니다.
스테파노가 박해를 받고 순교한 일도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박해자였던 사울이 회심하여 바오로 사도가
된 일은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과정에 대해서 여러 번 증언하고 설명하긴 했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해서 그런 결과에 도달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할 때까지 수없이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든 그 모든 일은, 또는 ‘하느님 나라 건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그 일을 도와드리는 협력자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겠지만, 구경만 했거나,
무관심했거나, 방해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일종의 질문과도 같습니다.
“이제 곧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올 텐데,
구경꾼이나 방관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협력자가 될 것인가?”
그 선택과 실행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에, ‘겨자씨의 비유’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사실 겨자씨에서 겨자나무가 자라나는 것 자체는
신기한 일도 아니고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또 작은 씨에서 큰 나무가 자라는 것도 그렇게 신기하거나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씨는 작은데 나무는 크다.’가 핵심이 아니라, ‘씨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이 핵심 주제입니다.
그 생명력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일,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씨가 작든지 크든지, 또 나무가 크든지 작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씨 속에 놀라운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은 가장 작은 씨앗이라고만 생각한다.”,
즉 “인간들은 작고 보잘것없고 하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항상 ‘작은 일’로만
시작하시는 것은 아닌데, 믿음 없는 인간들은 항상
그 일을 무시하면서 하찮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작은 일과 큰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똑같이 ‘큰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크다, 작다, 라고 분류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겨자씨’ 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주춧돌이든 작은 벽돌이든 간에 ‘하느님 나라’ 라는 집에서는, 모두가 다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를 아주 귀하게 여기십니다.>
3) ‘하느님 나라’ 라는 집에서 벽돌 하나가
빠져나간다 해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빠져나간 사람의 인생은 무너지고 끝나버립니다.
작은 실수 한 번, 작은 죄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방치하다가는 그 작은 일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태 5,19).
그것은 한 방울의 독으로 생명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대죄’가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