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2주일설교 시편47:1-9(손뼉치며 하나님을 찬송하라)
본문: 시편47:1-9
제목: 손뼉치며 하나님을 찬송하라!
오늘은 시편47:1-9의 말씀을 가지고
“손뼉치며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손뼉치며 하나님을 찬송하라!”
얼마 전에 루돌프 부흐빈더라는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17년 전엔가 러시아에 갔다가 시디를 한 장 샀는데
이번 연주회에 간 연주자의 시디였습니다.
연주가 얼마나 정교한지 참 멋져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서 연주회를 한다고 해서
가장 싼 B석 좌석이지만 표를 사서 연주회를 갔습니다.
피아노 연주회를 여러 번 가서 들은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감동적으로 들은 적은 없습니다.
만 76세인 연주자의 연주는 숨을 죽이며 듣게 하였습니다.
30분 정도 한 곡의 연주가 끝났을 때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만한 자신은 없었고
그저 손바닥이 아프고 팔뚝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76세란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고
그의 연주는 수천의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기에
박수 소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박수를 쳐 보셨습니까?
누구를 향해서 박수를 치셨습니까?
손바닥이 아프도록
팔뚝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 보셨습니까?
1.손뼉을 치면서 소리를 지르라!
오늘 시편은 손뼉을 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손뼉을 치는데 그치지 않고
즐거운 소리를 지르라고 말합니다.
언제 박수를 치십니까?
공연을 가서 박수를 치십니까?
하지만 공연가기가 어려우니 그럴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텔레비전을 통해서
공연을 보고 박수를 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가서 듣는 것과
텔레비전으로 듣는 것은 달라도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비용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공연에 가게 됩니다.
그만큼 감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박수를 치는 것은 경험했기에 가능합니다.
감동했고 놀라웠고 좋았고 행복했기에 박수를 칩니다.
물론 세상을 박수를 강요합니다.
공연장에 가보면 진행 요원들이 박수를 치라고 합니다.
공연자들도 박수를 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박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것도 기뻐서 너무 감동이 되어서 치는 박수입니다.
오늘 시인은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또 무엇이라고 합니까?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그 짧은 한절에 찬송하라는 말을
네 번씩이나 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손뼉을 쳐라,
찬송하라는 말은 권하는 말이 아닙니다.
해 달라고 사정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누구에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1절에서 “너희 만민들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손뼉과 찬양은
만민이 다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을 믿는 자만 그렇게 하지 않고
선택받은 이스라엘에만 그러게 하지 않고
모든 만민이 다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라고 말할까요?
물론 그렇게 만민이 명령을 받았지만
다 찬양하며 박수를 치는 않을 것입니다.
이 명령에 만민이 다 반응을 보여
찬양하며 박수를 친다면
이 곳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박수를 쳐 달라고 하고
누구에게 박수를 치라고 합니다.
노래를 잘한다고
연기를 잘한다고
운동을 잘한다고
뭔가 뛰어나다고
정치를 잘한다고 박수를 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의 가수에 대해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서
음식과 여러 공산품에 대해서
세계가 박수를 보내고 환호를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보는 이야기를 보면
누구를 향해 좋아서 열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주접이 풍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서
자신들이 돈을 내고 시간을 내어서
행하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럽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너무 심해서
주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돈과 시간을 투자를 해서
행하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행복해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이 불문하고 남녀 불문하고
그들의 주접에 보는 사람들의 놀랍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박수를 치며 찬양을 하고 있습니까?
진정 손뼉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고 있습니까?
큰 소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까?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왜 시인은 우리에게 박수를 쳐라
찬송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2.온 땅의 왕이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한 달째 보고 있습니다.
그를 칭송하고 좋다고 박수를 치고 있습니까?
대통령이라고 왕이라고
누구나 다 박수를 치며 그를 칭송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합니다.
심한 이들은 물러난 전임 대통령에게
날이면 날마다 욕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왕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박수를 치지 않으며
칭송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박수를 치며
그를 향해 칭송과 찬송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2절에 보면 주님은 두려워할 지존자시며,
온 땅을 다스리는 크고도 큰 왕이라고 합니다.
두려운 존재 앞에, 크고도 큰 왕 앞에
박수를 치지는 않습니다. 칭송도 못합니다.
그저 두려움에 빠져 벌벌 떨 뿐이고
감히 입을 땔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우신 분이
만왕의 왕으로서 크고도 크신 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셨습니까?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를 우리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괴롭게 하던 그 어떤 세력 만민을
우리를 억압했던 그 어떤 나라는
우리 곧 나와 여러분의 발 앞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만민을, 온 땅을
다스리는 그런 존재로 삼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언제 우리가 만민을 우리의 발로 밟고 있습니까?
그러기는커녕 사람에 눌리고 돈에 눌리고
여러 가지 것들에 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유명한 드라마가 있는데
“나의 해방일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눌려 있으면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환호하며 좋아할까요?
그런데 분명하게 주님의 두려워할 지존자요,
주님의 크고도 큰 왕으로서
만민을 우리에게 복종케 하시고
뭇 나라를 우리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신다고 말하십니다.
창세기3:15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원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가장 처음으로 예언한 말씀이 이 말씀이라고 합니다.
뱀 곧 사탄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그 곧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뱀 곧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 사탄의 세력을 발로 그 머리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여기에 야곱의 영화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화라는 말은 자랑거리라는 말입니다.
자랑거리라는 말은
교만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는 말입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발꿈치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아버지를 속이고
삼촌을 속이는 삶을 살면서
더 많고 지독한 속임을 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삶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억압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무릎을 꿇어 엎드렸을 때
그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발꿈치만 잡던 그래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그의 이름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힘으로 살던 야곱이
그래서 인생이 참으로 고통과 억압 속에 살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 곧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뭇 나라를 그의 발아래 밟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그가 사는 땅을 그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3.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탄에게 발꿈치를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
죄의 권능을 율법입니다.
우리는 죄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내 육신을 믿지 않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로 인해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로 올라가시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심으로
이제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더 이상 우리를 억압과 고통이 아니라
승리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이 왕이시므로
만민이 우리의 발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오르신다.
환호하는 함성이 울려 퍼진다.
주님이 보좌에 오르신다
나팔 소리 크게 울려 퍼진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 오르십니다.
더 이상 그 앞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 누가 그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도
하나님은 뭇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 분이
나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만 두려워하고
그분만 믿고 따른다면
더 이상 그 무엇이 두려울까요?
더 이상 누가 우리를 억누르며 힘들게 할 수 있을까요?
9절도 보시겠습니다.
“뭇 나라의 고관등리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모든 백성이 모든 방패가 모든 군왕들이
다 주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에게 손뼉을 치며 찬송하여야 하겠습니까?
손바닥이 아프도록 목이 터지도록
박수를 치며 찬송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돈을 주는 사람입니까?
나에게 힘을 주는 사람입니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입니까?
누구입니까?
그 돈을 얼마나 줍니까?
언제까지 줍니까?
힘도 그렇고, 인정도 그렇고, 그 무엇도
다 일시적이며 또한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물론 그것들에 감동할 수 있고 박수를 칠 수 있습니다.
어찌 그런 일들이 없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진정 우리가 박수를 치며 찬송해야 할 대상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늘 보좌에서 왕으로 계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박수를 받아야 할 대상이며
우리의 찬송을 받아야할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시적인 대상에 빠져
영원하신 그분을 잊거나 멀리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며
어리석은 길을 가는 길이 됩니다.
1절과 6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