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여, 조선이 호시절이었느니라.
<첩제도를 주장했다가 길거리에서 망신당한 고려 공무원 박유>
박유(朴褕)는 충렬왕 때 대부경(大府卿)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이론을 내세웠다. “동방은 목(木)에 속하는데 목의 생수(生數)는 3이고 그 성수(成數)는 8이다. 그런데 홀수는 양(陽)이고 짝수는 음(陰)이니,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그런 이치 때문이다”
그가 왕에게 건의하였다.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도 지금 신분 고하를 물론하고 처를 하나만 두고 있으며 자식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한다. 그런데 외국인은 인원에 제한 없이 처를 두니, 이대로 두었다가는 인물이 모조리 그들이 있는 북쪽으로 흘러가게 될까 우려된다. 여러 신하들에게 첩을 두게 하되 품계에 따라 그 수를 줄여서 일반인은 1처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첩에게서 낳은 아들도 역시 본처가 낳은 아들들처럼 벼슬살이를 할 수 있게 하자. 홀아비와 홀어미가 줄어들고 따라서 인구도 증가될 것이다.”
소식을 들은 부녀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박유를 원망하였다. 때마침 연등회 저녁에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위하고 따라 갔는데 어떤 노파가 박유를 손가락질하면서 “첩을 두자고 청한 자가 바로 저 빌어먹을 늙은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연이어 손가락질하니 길거리에 붉은 손가락들이 두름을 엮어 놓은 것 같았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에는 자신들 처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 논의를 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고려사』권106, 「열전」19 [제신] 박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