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연어
/ 박이화
고백컨대
내 한 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하여
온 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질 때까지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
기꺼이
射精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
그가 바로 지난날 내 생에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이지요
도개리 복사꽃
/ 박이화
내 몸 속 어디 숨겨진 복사뼈 있듯
우리 언제 한 몸이었던 적 있었는지
내 입술과 유두
저 연분홍 꽃잎이었던 적 있었는지
거뭇한 북쪽 가지 끝의 저 은밀한 홑꽃
일만 년 전쯤
내 음순이었던 적 있었는지
그리하여
나, 오래 전 하나였던
그 몸을 잊지 못하는 듯
이렇듯 꽃 같이 붉은 생리혈 비쳐오면
내 몸은 무작정 아픕니다
복사꽃 피는 그 사나흘처럼
내 몸도 한 사나흘쯤
밤낮없이 그리움 멍울멍울 쏟으며 아픕니다
《애지》 2004년 봄호
고전적인 봄밤
/ 박이화
송도 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 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 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 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 어째서! 이 몸과 더불어 유장
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오래 전 산벚나무
/ 박이화
이른 봄날도 늦은 봄날도 아닌 계절에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자
이미 반백의 사내와 봄 산에 듭니다.
그 사내 홍안의 복사꽃도 잠시 말로만 탐할 뿐
하 많은 봄꽃 다 제쳐두고
백발보다 더 부시게 하얀 산벚 아래
술잔을 기울입니다.
어쩌면 전생의 어느 한때
그의 본처였기라도 한 듯
그 사내, 늙고 병들어 돌아온 남자처럼
갈수록 할말을 잃고
그럴수록 철없는 그 여자
새보다 더 소리 높여 지저귑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적막한 산중,
드문드문 천천히 백발의 꽃잎 푸스스 빠져
그 사내 머리 위로 쌓이고,
이윽고 그 여자 빈 술병처럼 심심히 잠든 동안
사내만 홀로 하얗게 늙어 갑니다.
비로소 저 산벚
참 고요히 아름답습니다.
후박나무 아래 잠들다
/ 박이화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이 세상 모든 죽음마저 꽃피워 줄 때
나 저 후박나무 아래 들겠네
그럴 때 통영군 연화리 우도의
저녁하늘 바라보던 내 눈은
후박나무 어린잎에게 주겠네
내 잠든 동안 저 후박나무
나를 대신 할 수 있도록
아, 살면서 누구보다 고온 다습했던 내 생은
누구보다 먼저 후박나무 그늘 아래 썩겠네
그렇게 한 생쯤
내 몸도 꽃잎 아래 물컹,
향기롭게 썩었으면 좋겠네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대는 영영
아주 내게서 잊혔으면 좋겠네
다시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나를 저 후박나무 심장처럼 높게,
꽃피워 줄 때까지
여름비
/ 박이화
호박잎처럼 크고 넓은 기다림 위로
투다다닥 빗방울 건너 뛰어오듯
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볕 아래 시든 잎처럼
그 아래 지친 그늘처럼
맥없이 손목 떨구고 늘어지던
내 그리움의 촉수들이
마침내 하나 둘 앞 다투어 눈떠
사방 꽃무늬 벽지처럼
내 마음 안팎을
온통 분간 없이 휘감아 뻗고,
예고 없이 들이친 소낙비의 행렬에
또 한바탕 허둥대며 젖는 잎,
잎들 전선이 젖고 그 선을 타고 오는
그의 목소리
열대어처럼 미끈한 물비늘로 젖어와
어느 새 내 몸은 출렁출렁 심해로 열리고
나의 포로노그라피
/ 박이화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혼신을 다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의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달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겨울동백
/ 박이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누군가의 칼날에 죽어갈지
모르는 비운의 武士들이 오히려 그 죽음의 향연을
즐겼단다.
그래서 투구 속에 귀한 향을 넣어 제 목이 떨어지는
순간 그 진동하는 향기로 살아남은 적에게 더 큰
승리의 도취감을 선사했단다.
그렇다면! 저 푸르고 질긴 잎으로 무장한 동백 한 그루.
그도 이미 그 붉은 투구 속에 향기로운 죽음을 준비했던
걸까?
그래서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 앞에 저렇듯 모가지
댕겅 떨구며 낭자한 향기 콸콸 쏟아내는 걸까? 그리하여
승승장구하여 달려 온 봄에게 더 큰 희열 만끽하게 하도록!
똥 패
/ 박이화
화투라면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 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 패를)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주제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애도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 데도
도무지 홍도의 순정으로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 패가 아닌 세상
잊어야 하는 데도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당신은 분명
내 생애 최악의 똥 패인지 모릅니다
나의 고금가곡
/ 박이화
선 잘 만나 광 파는 인생도 있고 광 들고 피박 쓰는
인생도 있네. 그래서 세상만사 고도리판이라 했던가?
경거망동 말라고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다고 낙장불입이라 했다.
살다보면 희희낙락 쓰리고 부를 때도 있고 금상첨화
로 씩쓸이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애써 돌던 판 나가리
될 때는 더 많고 죽어라 죽어라 패 안 풀리는 그런 날
은 또 살상가상으로 독박마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봐라 삶이 어디 경전에만 있더냐?
고도리 십계명을 알고 나면 인생만사 이 손안에 있는
것을 비. 풍. 초. 똥. 팔. 삼 이 패 안에 있는 것을!
시집 <그리운 연어> 2006년 애지
흐드러지다 1
/ 박이화
옛사랑은
종이에 맹세를 적었다
더 옛사랑은
나무 기둥에 새겼다
희고 단단한 나무에 그 마음 새겨 두면
죽어서도 나이테처럼 한 몸이 되리라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보다 더 옛사람은
조개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
무덤까지 가지고 간 이도 있다
살도 썩고 머리카락도 썩고 마침내 마지막 뼛조각마저
한 줌 흙으로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깍지 풀 듯 스르르 사그라질 그 마음
그래서 백 년은 환생에 걸리는 시간
나비를 잊고 있을 때만 나비가 내 어깨에 앉듯
당신과 내가 이 뼛속 사무치는 봄날을 잊은 채
붉은 배롱꽃으로 하품하며
다시 피고 질 후생까지의
그 백년의,
흐드러지다 2
간밤
그 거친 비바람에도
꽃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리어 화사하다
아직 때가 안 되어서란다
수분(受粉)이 안 된 꽃은
젖 먹은 힘을 다해
그러니까 죽을힘을 다해
악착같이 가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단다
그러나 으스러질 듯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 팔이
잠들면서 맥없이 풀어지듯
때가 되면 저 난만한 꽃잎도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단다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눈꺼풀 스르르 내려앉는 그 천만근의 힘으로
때가 되어 떠나는 일 그러하듯
때가 되어 꽃피는 힘 그 또한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때가 되어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
내 마흔 봄날도 분명 그러했을 터
-시집『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
황혼단가
/ 박이화
1,
내 사주일지엔가 월지에 초경처럼
부끄러운 도화살 태몽으로
복숭아 꽃물 똑,똑, 따버린 탓일까?
그럼 서녘 쪽 문 궁금히 열고 나온
천도복숭아 나무 한가지 우직 꺾어
일몽에 빗대 후려친
그대 겨운 피 어찌 감당하려는지
2,
가끔 황혼이 그 붉고 도발적인 입술로
저녁 외출하는 걸 봐요
그런데 금세 지워져 돌아오던 걸요
꼭 내가 당신을 만나고 올 때처럼
당신이 삼킨 태평양 재즈-레드 립스틱
그래서 당신 피가 점점 더 붉고 뜨거워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지만
3,
누군가 저녁 하늘 빈 모서리에
붉고 선명한 낙관을 찍는다
그 처럼 나,
그대 생애에 노을처럼
아름다운 마지막 여자일수는 없는 것일까?
4,
황혼이 내 나이 마흔을 택해
마흔이 황혼인 여자를 택해 자꾸 미치라 한다
미칠 수 있는 피를 주고
미칠 수 있는 시를 주고
어서 미치라 한다
양귀비처럼 독하고 붉게 미쳐 버리라 한다
5,
마침내 그가
내 마흔의 삶 속으로 저녁하늘처럼
저벅저벅 걸어왔다
내 이제 한폭의 석양으로 아름다울 수 있겠다
첫댓글 오월의 향내음 감도는 시절에 즐감했습니다.
감슴이 뭉클하네여.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신 5월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