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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힘센 넘 놈 노예삼은 막패준 강력 파워 에너지 트럼프 원문보기 글쓴이: 곽 경 국
어르신들의 기개: 시골 깊은 곳에서 나오신 노인분들이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망건 사이로 비치는 상투를 지키셨던 모습은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중년의 세련미: 중절모에 깨끗하게 다려 입은 중우적삼(중치막과 고의적삼) 차림은 당시 중년 남성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나들이 복장'이었겠지요.
질박한 삶의 멋: 비록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어도 장날만큼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예(禮)를 갖추어 길을 나섰던 우리 조상들의 마음가짐이 느껴집니다.
📜 '질박하다'는 말의 무게
'질박하다'는 것은 겉치레가 없고 소박하다는 뜻이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삶의 본질에 충실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흙을 일구며 정직하게 땀 흘리고, 장터에서 이웃과 막걸리 한 잔 나누며 시름을 덜어내던 그 시절의 정서가 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혹시 이 기억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터의 소리나 냄새가 있으신가요? 예를 들어 뻥튀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라든가, 장터 국밥집의 진한 고기 삶는 냄새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 구체적인 기억을 더 들려주신다면 그 시절의 풍경을 더 생생하게 함께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름철에는 그렇게 이제 누에 잠업을 해 가지고 갔다가 5월달쯤 되면 갔다가 이렇게 이제 공출 해서 바치게 되잖아.
그럼 이제 그럴 적에는 이제 이제 돈이 생기니까 돌아오실 적에 어떻게 오시는가 하면은 뭐 여느 장날에도 그렇지만은 그 보리 꽁치 꽁치 꽁치라고 그때쯤이면 꽁치가 나옵니다.
그래 꽁치 그 내륙 그런 읍내 같은 데도 갔다가 싣고 와서 팔게 되는데 아마 그렇게 뭐 산더미처럼 이렇게 푹 쏟아놓고 파는가 보지 그 시절에 무슨 비닐 봉지 같은 게 어디 있어 이래 갖고 오시는 걸 길 가시는 걸 본다 한다 할 것 같으면은 새끼 꼬임 새끼 꼬인 데다 마다.
안에 그저 더도 말고 다섯 마리씩 여섯마리씩 끼워가고서 손에 이래 들고 간다고 그럼 날파리들이 다 막 날아들어붙다시피 하는 그런 이제 식으로 이제 말하자면 장문에를 갔다 오는 거지 누예를 치게 되면 이제 다섯 잠을 자고 올라가게 되는데 집을 지으려 올라가게 되는데, 그 다섯잠 자고 뽕을 먹을 적을 보면은 꼭 소낙비가 오는 것 같이 그렇게 와사 사사가 이렇게 소리를 합니다.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빗소리 같은 뽕잎 먹는 소리와 짭조름한 꽁치 냄새가 시공간을 넘어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잠업(蠶業)'**과 '장터 길목의 꽁치' 이야기는 그 시절 농촌의 경제와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너무나 귀한 기록이네요.
🐛 소낙비 소리 같던 누에의 '다섯 잠'
누에가 마지막 허물을 벗고 고치를 짓기 직전, 즉 **'다섯 잠'**을 자고 난 뒤 뽕잎을 먹어치우는 기세는 정말 대단했지요.
청각의 기억: "와사사사" 혹은 "쏴아" 하는 그 소리는 단순히 벌레가 풀을 씹는 소리가 아니라, 한 집안의 일 년 농사가 결실을 맺어가는 **'희망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정성의 시간: 잠 한숨 제대로 못 자고 밤낮으로 뽕을 따다 나르던 그 고된 노동이 그 소리 속에 녹아있었겠지요.
🐟 새끼줄에 꿰인 꽁치와 장날의 풍경
잠업 공출을 마치고 주머니가 두둑해진 아버지가 손에 들고 오시던 꽁치는 그야말로 최고의 특식이었습니다.
새끼줄 뭉치: 비닐봉지 귀하던 시절, 짚으로 꼰 새끼줄에 아가미를 꿰어 대여섯 마리씩 대롱대롱 매달고 오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날파리와의 동행: 더운 5월 햇살 아래 꽁치 냄새를 맡고 꼬여든 날파리들마저도, 집에서 기다릴 자식들을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아버지의 뒷모습 앞에서는 정겨운 풍경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내륙의 별미: 바다 구경 하기 힘들던 내륙 시골 마을에서, 장날에나 맛볼 수 있었던 꽁치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행복을 나누던 매개체였겠지요.
🕯️ 질박한 삶, 그 속에 흐르는 따뜻함
공출을 해서 받은 돈으로 가족을 위해 생선 한 두름을 사 들고 오시던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 민초들이 버텨온 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 오신 꽁치는 주로 어떻게 요리해서 드셨나요?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자박하게 지져낸 꽁치 조림이었는지, 아니면 소금 툭툭 뿌려 석쇠에 구워낸 구이였는지... 그 맛의 기억도 무척 궁금합니다. 말씀해주시면 당시의 저녁 밥상 풍경을 더 그려보고 싶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먹는지 그래 이제 그 다 먹고선 고치를 집 지으려 하면 누예는 이제 잠을 잘 적에 고개를 번뜩 들고 잡니다.
그런 식으로 이제 말하자 이래 어른들이 보시고 아 이거 이제 고치 집 지을 때 됐어 입에서 뱉어내는데 실을.. 아 이러면 이제 하마 미리 알아 어느 때쯤이면 즉 꼬치가 꼬치를 지으러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 중년에는 그 말하자면 꼬치 집 짓는 틀이 나왔지만 예전에 어디 그런 게 있어 천상간에 산에 가가지고선 청솔가지 그걸 한 짐씩 해 짊어지고 오십니다.
소나무 가지를 그래 이제 그걸 방에다가 빼곡하게 말하자면 세우면서 연실 누에를 훌훌훌훌 뿌려 너 마음대로 어디 적당한 자리에 가서 집을 지으라고 그래 그렇게 해서 집을 이제 짓게 되는데 사나흘인가 이렇게 오래도록 나벼둬 그걸 또 말려야 됩니다.
그리고 이 집을 바짝 마르도록 이렇게 속이 댕강댕강 소리가 나도록 이렇게 마르게 실이 한다고 그래 이제 그렇게 이제 집을 짓고 난 다음에 또 꼬치를 전부 다 솔가지에서 따 가지고서 그걸 까야 돼.
하얗게 잔털을 다 까다시피 해야 된다고 그런 다음에 공출을 하게 되는 것이거든
어르신, 누에가 고치를 짓기 직전 고개를 번뜩 들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부터 청솔가지를 해오던 풍경까지... 말씀을 들으니 그 시절의 잠실(蠶室) 풍경이 마치 눈앞에서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지금처럼 기성 기구가 없던 시절, 산에서 직접 해온 청솔가지를 이용해 누에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던 그 정성은 정말이지 대단한 정성이었습니다.
🌲 청솔가지에 핀 하얀 '고치 꽃'
누에의 신호: 실을 뽑기 전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잠'에 취한 듯 있는 누에를 보며, "아, 이제 집 지을 때가 되었구나" 하고 때를 알아차리던 어르신들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몸으로 익히신 것이지요.
솔가지 보금자리: 산에서 베어온 싱싱한 청솔가지를 방안 가득 세우고, 누에를 그 위에 '훌훌' 뿌려주면 누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을 것 같습니다. 소나무 향과 뽕잎 향이 뒤섞인 방 안의 공기가 그려지네요.
댕강댕강 소리가 날 때까지: 사나흘을 기다려 고치가 딱딱하게 마르고, 흔들었을 때 안에서 '댕강댕강' 소리가 날 정도로 잘 익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은 농부의 인내심이 결실을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정성이 깃든 '고치 까기' 작업
고치를 솔가지에서 떼어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고치 겉면의 **부스스한 잔털(부잠사)**을 일일이 손으로 까서 하얗고 매끈하게 만드는 과정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깨끗하고 좋은 등급의 고치로 인정을 받아 공출을 할 수 있었으니,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하얀 고치를 만지며 손끝이 부르텄을 모습이 상상됩니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한 고치를 내다 팔고 사 오신 것이 바로 그 **'새끼줄에 꿴 꽁치'**였으니, 그 꽁치 한 토막이 식구들에게 얼마나 귀한 보상이었을까요.
👵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길
누에 농사는 특히나 집안 여성분들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던 일로 기억합니다. 혹시 고치를 다 까서 공출하고 남은 번데기를 삶아 드시던 기억도 있으신지요? 아니면 고치를 따고 난 뒤 텅 빈 잠실을 정리하며 나누던 가족들의 대화 같은 것이 떠오르시나요?
들려주시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조각들입니다. 다음 이야기도 편안하게 들려주세요.
그래 그렇게 까다 보면 아 이 멍청이 같은 누예 놈들이 서로 들러붙어서 집을 짓는 것들이 꽤 많아 그 쌍둥이 꼬치집이라고 그런 것은 이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하자면 수등을 못 받고 우등을 못 받는다고 골라냅니다.
골라내고 뭐 좀 덜 생긴 거 이런 거 다 골라내고 또 멍석처럼 이렇게 펴서 집을 짓는 놈도 있어 그런 것도 이제 다 골라내고 그런 다음에 이제 갔다가 그렇게 이제 공출을 하게 되는 거지 그래 이제 그 자투리 그렇게 남은 것을 뭘 하느냐 하면은 명주 실을 뽑는데 이제 집에서 이제 베틀에 올려놓고서 쩔끄덕쩔끄덕거리고 아주머니네들이 그렇게 배 짜듯이 명주를 짜려고 그걸 이제 실을 뽑는데 어떻게 하면 하는가 하면은 바깥에다 솥을 걸어놓고 작은 솥을 걸어 놓고 그걸 이제 삶습니다.
많이도 안 놔 한꺼번에 열댓개 개씩 이렇게 집어넣고 그래 가지고서 이제 좀 실이 풀려서 나올 듯하면은 나무 젓갈 같은 걸로 휘휘 저어요.
그 물에다 넣고 삼기 때문에 그럼 거기 실에 이렇게 묻혀서 올라온다고 그러면 그거를 물레틀 그 앵아 송곳인가 거기다가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감고서 윙윙윙윙하고 돌리면은 거기 실이 꼬치가 솔솔솔 돌아가면서 마구 풀려나와 그럼 우리가 왜 거기서 구경을 하는가 하면은 그 맨 마지막 남으면 번데기만 남습니다.
어르신 말씀을 들으니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쌍둥이 고치(쌍고치)'**며, 솥 앞에 둘러앉아 번데기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그 시절 풍경이 마치 눈앞에서 영화처럼 상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시절,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고치들로 집에서 직접 명주실을 뽑던 과정은 정말 정교하고도 정겨운 광경이었지요.
🧥 등급을 가르던 '쌍고치'와 '멍석 고치'
영리하지 못한(?) 누에들: 두 놈이 한데 엉겨 집을 지어버린 **'쌍고치'**는 실을 풀 때 엉키기 때문에 공출할 때 찬밥 신세였지요. 우등(1등급)을 받기 위해 가차 없이 골라내야 했던 그 마음은 참 속상하면서도 아까우셨을 겁니다.
낙방한 고치의 변신: 하지만 그렇게 골라낸 자투리 고치들이 있었기에 집안 어르신들이 직접 명주를 짤 수 있었으니, 버릴 것 하나 없는 민초들의 지혜로운 살림법이었습니다.
🧵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마솥과 '물레'
젓가락의 마법: 뜨거운 물에 고치를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으면, 마법처럼 가느다란 실머리가 젓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나오던 그 순간!
윙윙 소리와 명주실: 물레를 돌릴 때 나던 그 "윙윙윙" 소리는 온 집안에 울려 퍼지던 풍요의 노래였겠지요. 고치가 뱅글뱅글 돌면서 몸집이 작아지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을 겁니다.
🍲 기다림의 끝, 고소한 번데기
아이들의 목적: 사실 실을 뽑는 어른들 곁에서 아이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진짜 이유는 바로 그 '번데기' 때문이었지요.
세상 제일가는 간식: 실이 다 풀리고 맨 마지막에 발가벗겨진 듯 쏙 드러나는 노르스름한 번데기! 갓 삶아져 나온 그 따끈하고 고소한 번데기를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던 그 풍미는 지금 파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한 맛이었을 겁니다.
👵 "쩔끄덕 쩔끄덕" 베틀 소리
그렇게 정성껏 뽑은 실을 말려서 베틀에 올리면, 밤새도록 "쩔끄덕 쩔끄덕" 북이 왔다 갔다 하며 하얀 명주 천이 짜였겠지요.
그렇게 직접 짠 명주로는 주로 무엇을 해 입으셨나요? 아버님 환갑 때 드릴 두루마기였는지, 아니면 식구들 명절 옷이었는지... 그 귀한 비단이 누구의 몸에 입혀졌을지 그 뒷이야기도 참 궁금해집니다. 있다면 더 들려주시겠습니까?
그거 껍데기가 다 벗어지다시피 하고 말갛게 보이는 속에 번데기가 들엇서 그 번데기를 이제 얻어먹으려고 주위에 있는 거지.
그럼 이제 그 번데기를 번데기가 그렇게 맛있을수 없어...
뭐 여러 가지 벌거지는 못 먹는다 하더라도 그 누예 번데기는 그렇게 예전서부터 맛있게 먹었잖아.
예 .. 그렇게 여름철 그 시절이면 그렇게 고염나무 감나무 꽃이 피는데 그 우리 동네 옆집에 그렇게 부잣집에 고염나무가 아람드리처럼 시꺼먼 놈이 서 있는데 그 뒷뜰에 그러니 그 밑에서 그렇게 명주 실을 뽑는데 아주머니가 거기서 그러는 거야.
고염나무 꽃이 확 활짝 피었어.
막 그 저기 잎사귀하고 상간에 고염나무 고염이 얼마나 많이 달려 고염꽃이 그렇게 누리꾸리한 게 막 베기다시피 피면은 거기 그렇게 벌들이 토종벌들 뭐 이런 여느 잡벌들 파리들이 왕앙거리고서 윙윙윙윙윙윙 거리면서 막 꿀 따느라고 그렇게 많이 덤벼들 수가 없어.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5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 노란 고염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그 아래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집니다.
실을 다 풀어내고 껍질이 말갛게 얇아진 뒤에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그 번데기... 어른들이 건네주시는 그 뜨끈하고 고소한 번데기를 얻어먹으려 가마솥 주위를 맴돌던 어린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이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 고염나무 아래, 윙윙거리던 생명력의 소리
황홀한 고염꽃 풍경: "누리꾸리하게 베기다시피" 피어난 고염꽃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 향과 꿀이 얼마나 진했는지요. 잎사귀 사이사이마다 빽빽하게 박힌 그 꽃들이 동네 부잣집 뒷뜰을 가득 채우고 있던 모습은 그 시절 풍요의 상징이었겠습니다.
왕왕거리는 벌떼의 합창: 물레 돌아가는 "윙윙" 소리와 꽃을 찾아든 벌들의 **"왕왕"**거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그 뒷뜰은, 그야말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이었네요.
질박한 삶의 조화: 명주실을 뽑는 아주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과, 그 머리 위에서 꿀을 따는 벌들의 분주함, 그리고 번데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설렘이 고염나무 그늘 아래 한데 섞여 있던 그 장면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 잊을 수 없는 '번데기'의 맛
그 시절에는 먹을 것이 귀하기도 했지만, 누에 번데기만큼 영양가 높고 고소한 간식도 없었지요.
소금기 살짝 도는 뜨거운 번데기를 입에 넣었을 때 툭 터지며 퍼지는 그 진한 풍미는, 요즘 흔히 보는 통조림 번데기와는 차원이 다른 **'생명의 맛'**이었을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그 번데기를 받아들고선 뜨거워 손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드셨을까요? 아니면 아껴두었다가 동무들과 나눠 드셨을까요?
💬 "고염나무 꽃 지면 고염이 열리듯..."
그렇게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벌들이 왕왕거리던 봄날이 지나면, 어느덧 작고 단단한 고염이 조랑조랑 열렸겠지요.
그 부잣집 고염나무에서 열린 고염들이 나중에 까맣게 익으면 서리 내려올 때쯤 따서 항아리에 삭혀 드시기도 하셨나요? 그 달콤 쌉싸름한 고염 맛에 대한 기억도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어르신의 기억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서 다음 이야기가 늘 기다려집니다.
그래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렇게 이제 길을 가질 못해 여름철에 하도 뱀이 많이 나와서 뱀이 뭔 뱀이야 그 율무기 너블미기라고 해서 햇바닥 너블너블너블하게 내놓고 하는 놈 그 화사라 그러지 요즘 그런 놈들이 어떤 한 암놈이 말하자면 발정을 내게 되면 그 연못에 보면 그 연못 풀솥이나 연못 가운데도 그래 뱀이 똘똘이 뭉친 게 거짓말 보태지 않고 정말로 그만큼 커 저기 복만큼 애들 볼로 차는 축구공만큼 크게 둘둘이 뭉쳐 가지고 있습니다.
뱀들이 어디 가도 않고 그거 어떻게 한번 서로 자기가 한번 짝짓기 해보려고 그러는 건지 그건 몰라도 그렇게 서로가 뒤엉켜 가지고 공처럼 돼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런 게 이제 보이고 그냥 풀숲으로 길가로 가서 연실 그렇게 뱀이 많아 또 도랑청으로 이런 데로 가서 보면 개구리 잡아먹느라고 개구리가 잡히면 꽉 꺅 꺄 이런다고 그 이제 물려서 잡혀 죽는다고 그런 시절이다 이런 말씀이여.
어르신 말씀을 들으니 정말 그 시절 시골 풍경은 자연의 야성이 그대로 살아 숨 쉬던 때였군요. 명주실 뽑던 정겨운 마당 뒤편에는 그렇게 서슬 퍼런 자연의 생존 본쟁이 꿈틀대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질박하면서도 치열했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말씀하신 **'너블미기(유혈목이, 꽃뱀)'**와 뱀들이 축구공처럼 엉겨 붙어 있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당시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진풍경입니다.
🐍 "너블너블" 혀를 내밀던 뱀들의 세상
공처럼 뭉친 뱀 뭉치: 발정 난 암놈 한 마리를 두고 수십 마리의 수놈이 엉겨 붙은 그 **'뱀 공'**은 어르신 말씀대로 정말 축구공만 했을 겁니다. 연못가나 풀숲에서 그런 광경을 마주치면 아이들은 무서워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겠지요.
살아있는 자연의 비명: "꽉 꺅 꺄!" 하고 울던 개구리의 비명 소리... 도랑가에서 뱀에게 뒷다리를 잡힌 개구리가 내지르는 그 소리는 시골에서 자란 분들만 기억하는 **'삶과 죽음의 소리'**입니다.
길 가기도 무서웠던 여름: 무성한 풀숲 어디서 뱀이 튀어나올지 몰라 막대기로 풀을 헤치며 걷던 그 긴장감이 어르신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그대로 느껴집니다.
🌿 질박한 삶의 이면, 공존의 기억
그 시절 민초들의 삶은 단순히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거친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살았던 것이지요.
고염나무 아래서는 벌들이 왕왕거리고,
방안에서는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고,
마당 밖 도랑에서는 뱀과 개구리가 쫓고 쫓기던 풍경.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우리 민족의 질박한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뱀이 무서워 조심조심 길을 걷던 그 소년이 어느덧 세월을 돌아보며 이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혹시 그렇게 뱀이 많던 시절에, 뱀과 관련해서 겪으셨던 아찔한 일이나 혹은 뱀을 쫓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했던 독특한 방법 같은 것도 기억나시나요? 예를 들어 담배 찌든 물을 뿌린다거나 하는 지혜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도 참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그래 그 농촌의 삶들이 그렇게 아주 질박한 그림을 그려주는 거지 뭐 늘상 그저 나가서 일하고 괭이 들고 삽 들고 또 뭐라 낫 갈아가지고 무슨 산에 가서 나무 해오고 쉴 새가 별로 없어 여름철 6월 두 그때쯤 되면 장마철이 된다고 장마지고 이런다고 길이 다 이렇게 비에 씻겨 나가고 그러면 전부 다 집집마다 나와 가지고 하 그만 울력으로 하루는 그렇게 모여들 해서 길을 새로 닦다시피 해.
그렇게 이제 길을 닦고 난 다음에는 점심 점심을 한 집에서 다 모여서들 해 먹는데 어떻게 해 먹는가 하면은 집집마다 그렇게 칼국수 칼국수 참 좋지 칼국수를 그 콩가루를 조금 넣어 가지고 만든 그런 칼국수를 그렇게 이렇게 만들어 가지고 말하자면 치대야지 안반에 홍두깨로 반대에 올려놓고 홍두깨로 치대 가지고 널쩍하게 이렇게 말해잠 만들어 큰 포대기 정도 이렇게 늘궈가지고 그걸 이제 들들 말아가지고 칼로서 여기서 숭덕숭덕숭덕 쓸었다 썰어가지고 푹 삶아가지고 한옥동이씩 이고 옵니다.
그것만 이고 오는 게 아니야 이제 거기에 대해 말이야.
젊은 호박 애호박을 따 가지고서 그걸 같이 그렇게 삶아가지고 익혀가지고 국수 고임을 놓으려고 송송송송송송 썰어가지고서 아 이래가지고 가고 오면 모든 사람들이 그 일하고 난 다음에 모여들어 앉아가지고서 그러면 한 그릇씩 배급을 받는 거지 아 그러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지 예 우리들도 많이 얻어먹었어 꿀맛 같지 뭐 아 그렇게 시리 살았다 이런 말씀이야.
어르신 말씀을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면서도 코끝이 찡해집니다. **'울력'**으로 길을 닦고, 커다란 양은 대야에 칼국수를 가득 이고 오던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네요. 그 시절의 고단함은 **'함께 나누는 맛'**으로 씻어냈던 것 같습니다.
🤝 마음을 합치는 '울력'과 길 닦기
장마에 씻겨 내려간 길을 보며 누구 한 명 탓하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 집집마다 괭이와 삽을 들고 나와 길을 고치던 그 풍경... 그것이 바로 민초들의 질박한 공동체 정신이었지요. 내 집 앞만 치우는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소통할 길을 다 같이 만드는 그 마음이 참으로 귀합니다.
🍜 안반 위 홍두깨 소리와 콩가루 칼국수
홍두깨의 리듬: 안반 위에서 홍두깨로 밀가루 반죽을 널쩍하게 밀어내던 그 소리와 리듬은 마을 여인네들의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었지요. 특히 콩가루를 섞어 고소한 향이 진하게 배어 나온 반죽은 그 시절 최고의 별미였습니다.
숭덕숭덕 썰어낸 정성: "숭덕숭덕" 썰어낸 투박한 면발은 기계로 뽑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손맛이 담겨 있었을 겁니다.
애호박 고명: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애호박을 송송 썰어 듬뿍 올린 그 칼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고된 노동 후에 받는 가장 큰 위로였겠지요.
🍯 "꿀맛 같던 배급 한 그릇"
길 닦는 어른들 틈에 끼어 "나도 한 그릇 달라"며 줄 서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커다란 옥동이(함지박) 가득 담겨온 국수를 한 그릇 배급받아,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후루룩 들이켜던 그 맛! 어르신 말씀대로 정말 **'꿀맛'**이라는 표현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 질박한 삶이 주는 교훈
땀 흘려 일하고, 이웃과 똑같이 나누어 먹으며, 비 온 뒤의 땅을 단단하게 다지던 그 시절... 비록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만큼은 지금보다 훨씬 넉넉하고 단단했던 것 같습니다. 어르신께서 기억하시는 그 **'질박한 그림'**이야말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사람 사는 냄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그 칼국수 한 그릇 드시고 나면, 어른들은 담배 한 대 피우시며 쉬시고 아이들은 또 어디로 뛰어놀러 갔나요? 혹시 비 갠 뒤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하지는 않으셨는지, 그 뒷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이 귀한 삶의 조각들을 계속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째 내 이야기하는 것이 실감이 나는가 안 나는가 시골 사람들 삶이 우리 동네에서 또한 조금 더 깊은 골짜기 동네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 굴바위라 하는 마을이 있는데 많이도 안 살아 그저 5채인가 하고 그 아랫마을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살고 그런데 거기는 그렇게 말하자면 사방 큰 장을 가려면 면소재지거나 읍소재지 가려면 사방으로 30리 40리요.
그러니 관청에 사람들이 와 볼래 하루 종일 옛날에 무슨 차가 당겨 전부 다 터덜거리고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런 말씀이야. 거기까지 올라가면 해가 저물어 갈 판이여.
절대 오지 못합니다. 그래 거기서 그렇게 큰 사람 키보다 더 큰 술독을 3개씩 4개씩 만들어 가지고 막 밀주를 해서 먹는데 그 뭐여?
그렇게 거기 이제 깊은 산골에 나무들이 많으니까 삼판을 하게 되면 목상이 와서 삼판을 하게 되면은 그렇게 옛날 그 바퀴열개 십발이지 시발이 트럭 그걸 제무시라고 그래야지 제무시가 와가지고 거기서 제무시가 그냥도 못 당깁니다.
길이 좁아 가지고 뒷바퀴 하나를 빼버려 그러면 안에 바퀴만 갖고 와서 그 좁은 길로 도돌도돌도돌도돌 이래 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나무를 실어 나른다.
이런 말씀이야. 무슨 길이여 도랑청이지 도랑청을 대충 말이야.
길처럼 닦고서 고개 넘 때듯 큰바위넘듯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저리 걸고 걸치고 이래 가지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싣고서 또 그러고 토덜토덜토덜하면서 내려오게 된다.
이런 말씀이야
어르신, 실감이 나다뿐이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있으니 제가 마치 그 제무시(GMC) 트럭 옆자리에 앉아 덜컹거리는 도랑청 길을 함께 지나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 시절 '굴바위' 마을처럼 깊은 산골의 풍경은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네요. 면소재지까지 30리, 40리 길을 걸어야 했으니 나라 법(관청)도 산맥에 가로막혀 닿지 못하던, 그야말로 **'민초들의 자치구'**였던 셈입니다.
🏺 관청도 몰랐던 깊은 산골의 '밀주 독'
사람 키보다 큰 술독: 30~40리 길을 가야 장터가 나오니, 술 한 잔 마시기도 참 귀한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산골 사람들은 몰래 큰 독에 술을 빚어 나누어 마셨던 것 같습니다.
민초들의 위안: 산일(삼판)하고 내려와 그 커다란 독에서 갓 퍼 올린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면, 고단한 하루가 싹 씻겨 나갔을 그 흥겨운 풍경이 그려집니다. "관청 사람들은 오지도 못한다"는 말씀에서 느껴지는 그 시절 산골 사람들의 배짱과 여유가 참 정겹습니다.
🚛 산길을 호령하던 '제무시' 트럭의 위용
뒷바퀴 하나 빼고 가는 투혼: 길이 얼마나 좁고 험했으면 그 큰 십바리 트럭의 바퀴를 하나 빼버리고 다녔을까요. 좁은 도랑청 길을 통과하기 위한 민초들의 절박하고도 기막힌 지혜입니다.
도랑청이 곧 길: 번듯한 신작로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물 흐르는 도랑 옆 바위를 타고 넘으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올라가던 그 트럭의 **"도돌도돌"**거리는 엔진 소리가 귓가에 쟁쟁합니다.
삼판의 활기: 목상들이 들어오고 제무시가 산을 오르내리던 시절은, 비록 길은 험했어도 온 동네에 사람 사는 생동감이 넘쳐나던 때였지요.
⛰️ 굽이굽이 흐르는 고갯길 인생
큰 바위를 넘듯, 고개를 넘듯 삶의 험한 파도를 넘으며 나무를 실어 나르던 그 시절은 참으로 거칠고도 질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토덜거리며 내려오는 트럭 뒤로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날 때, 그 먼지 속에 섞여 있던 사람들의 정과 땀 냄새가 지금은 참 그리운 풍경이 되었습니다.
어르신, 그 제무시 트럭이 나무를 한가득 싣고 내려올 때면 온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러 뛰어나오곤 했지요? 혹시 그 트럭 뒤를 쫓아가며 놀거나, 나무 베는 아저씨들이 주시는 새참을 얻어먹었던 그런 기억도 있으신가요? 그 시절 깊은 골짜기의 더 깊은 이야기들이 정말 보석 같습니다. 또 들려주셔요.
아 그런데 그 한해께[한해께라하는 발음을 서구태생 인공지능 잘못알아 듣고선 서양귀신 하나님이라 알아듣네 전부 이런식오 타교정 이라고 시불알(始佛謁)넘어 기계가 잘로 욕이 나오는것 왜냐하면 내가제일 싫어하는단어 들이거든 ] 뭔 볼 일이 있어 가게 됐는데 아 그래 이게 밀주를 한 사발 이제 말하자면 사서 먹게 되었어.
이십전인가 . 아마 이것도 뭐 뭐 이야기 한갑이 넘은 그런 시절인데 그래 그걸 먹으니까 그냥 여기 도가에서 파는 술보다 더 맛있게 그렇게 만들어서 먹더라 이런 말씀이지. 시골청정하니 물맛이지뭐..
그런데 그 거기서 글쎄 뭐 연장 도구 농기구 같은 거 이런 걸 사러 가려면 바꾸려면 천상 간에 읍내 장에 가야 할 판이여.
그런데 그 아침 일찍 새벽에 그렇게 어떤 아저씨가 중절모를 쓰고 중우적쌈을 입고서 뭘 갖고 가느냐 하면 많이도 못 가져간다는 거여 무거워서 콩을 한 두 말이나 될까 시리 바랑에 이제 짊어지는 거야.
그걸 짊어지고 고개를 넘고 넘고 넘고 넘고 30리를 걸어갈래 봐 얼마나 힘이 들겠어.
저 서쪽으로 가도 30리 북쪽으로 가도 30리가 뭐요?
30리도 더 되지 거기 또 좀 가깝다는 말이야. 좀 경상도 땅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거기도 그 면 소재지가 한 30여 리가 넘는다는 게 거기서 그러니 얼마나 힘들어 그러니까 거기서는 그렇게 삶을 사는데 관인이 와서 터치를 안 하니 배짱 편하게시리 농사만 짓고 살게 된다.
이런 말씀이야.
어르신, 우선 제 인공지능이 어르신의 귀한 사투리나 입에 붙은 고운 우리말 표현을 제멋대로 '하나님'이니 뭐니 하며 오해해서 답답하게 해드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 어르신께서 하신 **'한해께(그 무렵/그 근처)'**라는 정겨운 시간 표현을 기계 놈이 문맥도 모르고 엉뚱하게 짚었으니, '시불알(始佛謁)' 소리가 절로 나오실 만합니다.
그 시절 삶의 결을 담은 말씀 하나하나가 보배인데, 기계가 사람 마음을 못 따라가서 송구합니다. 다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르신의 '질박한 삶' 이야기를 경청하겠습니다.
🍶 도가 술보다 진했던 '청정 밀주' 한 사발
물맛이 술맛: 이십 전 주고 사 드셨다는 그 밀주, 그건 술이 아니라 그 골짜기 맑은 물과 민초들의 정성이 빚은 **'보약'**이었겠지요.
도가 술과는 비교 불가: 세금 떼고 검사받아 파는 도가 술보다, 깊은 산골에서 눈치 안 보고 푹 삭혀낸 그 밀주가 얼마나 걸쩍지근하고 달았겠습니까. 시골 청정 물맛에 취해 한 사발 들이키면 30리 길 피로가 잠시나마 잊혔을 풍경이 그려집니다.
🎒 콩 두 말 짊어지고 넘던 '30리 고갯길'
중우적삼에 짊어진 바랑: 중절모 딱 쓰시고 중우적삼 차려입으신 아저씨가, 콩 두 말을 바랑에 넣고 고개를 "넘고 넘고 넘고" 가시던 그 길... 30리가 말이 30리지, 산길 12km를 무거운 콩을 지고 걷는 건 고행(苦行)이었을 겁니다.
등물과 맞바꾼 농기구: 그렇게 힘들게 장에 가셔서 콩을 팔아 무거운 쇠낫이나 괭이를 사 오셨겠지요. 올 때는 또 그 연장을 들고 그 험한 길을 다시 돌아오셨을 테니, 옛날 어르신들 다리 힘은 정말 천하장사셨습니다.
⛰️ "터치 안 하는" 산골 자치구의 평화
관인이 못 오는 무풍지대: 어르신 말씀대로 관청 사람들이 오고 싶어도 해가 저물어 못 오니, 그곳이야말로 **'민초들의 낙원'**이었네요.
배짱 편한 농사꾼: 법보다 무서운 게 배고픔이고 힘든 노동이었겠지만,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 없이 내 땅 일궈 먹고 밀주 한 잔 나누던 그 시절이 어쩌면 지금보다 마음은 더 편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30리 길을 걸어 장에 다녀오시면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마을에 들어서셨을 텐데, 그때 마을 입구에서 풍겨오던 굴뚝 연기 냄새며 집안의 온기가 참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먼 길 다녀오신 아버님이나 아저씨들 바랑 속에, 집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을 위한 **'눈깔사탕'**이나 '강정' 같은 주전부리가 들어있지는 않았나요? 그 시절 장날의 끝자락 이야기도 더 듣고 싶습니다. 기계가 또 헛소리 안 하도록 제가 눈을 부라리고 잘 듣겠습니다!
농사를 지어 먹어도 마음속은 편하다 이거야 어중간한 농촌에 살면 꼭 관인이 와가지고 못 살게 굴어.
특히 아전들이 아전이 뭐야 군 서기 면서기 뭐 이런 거 어 그런 작자들이 와 가지고 구관이 명관이네 하고 꼭 와서 뭔가라도 틈을 흠을 잡고 탈을 잡고 이래서 아주 귀찮게 하며 툭 하면 오락가락하고 이런단 말씀이야.
그런데 너무 깊은 골짜기 속에 살면 거기 자기네들이 오고 싶어도 힘이 들어 못 오거든.
뭐 차도 없는데 오솔길 걸어올꺼야 그 양반들이 절대 그렇게 다리로 걷는 짓은 안 합니다.
조그만큼이라도 차길이 드러나야지만 거기까지 무슨 면 차를 타든 군 차를 타든 뭐 이렇게 차 타고 오든가 하지
어르신 말씀을 들으니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게으르고 민초는 부지런하다"**는 진리가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관청 놈들 무서워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들이 게을러서 못 오는 곳이 바로 민초들의 진짜 안식처였던 셈이네요.
🐀 아전들의 등쌀과 민초의 고단함
"구관이 명관이네" 하는 작자들: 면서기니 군서기니 하는 사람들이 시골 마을에 나타나면, 돕기는커녕 흠잡고 탈 잡아서 뭐 하나라도 얻어먹으려 들거나 공출 독촉이나 해대니, 어중간한 마을 사람들은 발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했을 겁니다.
민초의 지혜: 그래서 차라리 30리, 40리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만은 '배짱 편하게' 살고자 했던 그 선택이 참으로 눈물겹고도 당당한 저항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차 없으면 못 걷는 양반들
오솔길의 방패: "다리로 걷는 짓은 안 한다"는 말씀에 무릎을 탁 칩니다! 신작로가 닦이지 않은 오솔길, 제무시 트럭이나 겨우 바퀴 빼고 지나가는 그 험한 도랑청 길은 관인들에게는 **'통행 금지 구역'**이나 다름없었겠지요.
청정 지대: 그렇게 관청의 손길이 닿지 않으니, 밀주를 빚든 콩을 심든 자기들끼리 돕고 살며 **'질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요.
🏞️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인 삶
농사일이 아무리 고되고 손마디가 굵어져도, 누군가 와서 간섭하지 않고 내가 땀 흘린 만큼 거두어 식구들 먹이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질박한 삶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관인들 눈 피해 깊은 골짜기에서 살던 분들은 장날에 큰맘 먹고 나들이 갈 때, 혹시라도 장터에서 그런 '면서기'나 '아전' 같은 사람들 마주칠까 봐 조심하시지는 않으셨나요? 아니면 오히려 "여기까지는 못 오겠지" 하며 더 당당하게 장 구경을 하셨을까요?
그 시절 깊은 산골 사람들의 그 꼿꼿한 자부심 섞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참으로 귀합니다. 또 어떤 풍경이 기억에 남으시는지요?
그런 시절에 이제 이렇게 사는데 그렇게 민초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만 장에 가 올 적에 꽁치를 새끼에 꽈가지고 끼워가지고 이렇게 가지고 오고 그것만은 아니야.
이게 좀 간수하고 두부 해 먹는 것도 그 세멘 포대 같은 데 그런 종이를 쭉 쩨게서 거다가 거기에다가 간수덩이를 뚝 끊어 가지고서 돌돌 말아 가지고 새끼에다 이렇게 끼워 줍니다.
이렇게 들고 가시라고 그런데 그건 그렇다. 하지만 더 위험한 거 양잿물 그 양잿물 얼마나 위험한 거여?
그걸 그렇게 이제 비료포대 같은 데 그런 종이를 쭉 찢겨 가지고 거기다가 돌돌 말아 가지고 새끼에 끼워 가지고 조심해서 들고 가시라고 이래 상인이 이제 쥐어 주시거든.
그래 이제 그것도 가서 사기가 뭐하다면 옛날에 전부 다 무명 광목을 해서 옷을 해 입는데 그것을 그냥 해 입으면 색깔이가 누렇다고 조금 희게 바랜다고 어른들이 그 짚을 짚단을 가져와서 말하잠.
불을 이렇게 만듭니다. 짚단을 태워 그럼 거기 이제 조금 있으면 시커멓게 재처럼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완전 재는 아니지 그래 그런 걸 이제 걷어가지고 시루 위에다가 이렇게 보자기 같은 것을 깔고서 그 위에다가 놓고서 말하자면 물을 내려 그러면 그 물을 내려가서 그 밑에 자배기에 물이 고이면 그게 이제 잿물이 되는 거여.
그럼 거기다가 광묵을 집어넣고 버긋버긋 해 가지고 문질러가지고 그게 마르면 허옇게 이제 색이 바래지는 거지.
어르신 말씀을 들으니 그 시절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장날 장바구니 하나 없이 새끼줄 하나로 꽁치부터 위험한 양잿물까지 꿰어 오시던 그 풍경, 그리고 시커먼 짚재를 이용해 누런 광목을 눈부시게 흰 옷으로 탈바꿈시키던 '잿물 빨래' 이야기는 정말 살아있는 역사 책입니다.
📦 새끼줄에 꿰인 삶의 필수품들
종이 한 장에 말린 간수와 양잿물: 비닐봉지 하나 없던 시절, 시멘트 포대나 비료 포대 종이가 귀한 포장지였지요. 그 두꺼운 종이에 간수 덩어리나 그 무서운 양잿물을 쌈지처럼 말아 새끼줄에 대롱대롱 매달아 오시던 모습... 상인들의 "조심해서 들고 가시라"는 당부가 묻어나는 그 길목이 참 아슬아슬하면서도 정겹습니다.
민초의 운송 수단: 손에 든 것은 생선 몇 마리와 화학 약품이었지만, 그것이 집안의 밥상(두부)을 만들고 옷(빨래)을 깨끗하게 하는 귀한 재료였으니 얼마나 소중히 다루셨을까요.
🌬️ 짚재와 시루가 만든 '하얀 마법'
양잿물을 사기 어려웠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자연에서 얻은 지혜로 광목옷을 관리하셨지요.
짚단 태우기: 짚단을 태워 검은 재가 되기 직전의 그 '거무스름한 기운'을 모으는 것부터가 기술이었을 겁니다.
시루에 내린 잿물: 떡을 찌는 시루에 보자기를 깔고 재를 올려 물을 내리면, 그 밑으로 뚝뚝 떨어지던 잿물... 그 물이 자배기에 고이는 동안 어머니들의 정성도 함께 고였겠지요.
버긋버긋 문지르기: 그 잿물에 누런 광목을 넣고 "버긋버긋" 소리가 나도록 치대고 문지르면, 신기하게도 때가 쏙 빠지고 햇살 아래 말리면 눈이 부실 정도로 허연 색이 살아났지요.
👕 백의민족의 자부심
어르신 말씀대로 누런 광목을 그렇게 희게 만들어 입으셨으니,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골 깊은 곳에서 아전들 눈 피해 살면서도, 옷만큼은 정갈하게 잿물 내려 빨아 입던 그 선비 같은 기개와 깔끔함이 바로 질박한 삶의 멋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하얗게 빤 광목옷을 입고 장날 나들이 가시는 아버님들의 모습은 참 늠름하셨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렇게 잿물 빨래를 한 뒤에, 옷에 풀을 먹여서 다듬이질하던 소리도 기억나시나요? "똑딱똑딱" 밤새 들리던 그 다듬이 소리 말입니다. 어르신의 기억 속 그 다음 풍경은 또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여름철에 노인네들 나이 많으신 분들은 그렇게 삼베 중무적삼을 해 입으시는데 옆에 가서 보면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거지 뭐 어떤 사람 참 속에 알부불알 같은것이 다 보인다고 그러잖아.
그거 입으면 그러니까 훤히 다 들여다봐. 얼금얼금한 삼베 옷을 입으면 또 이제 조금 돈 푼이나 계신 부분은 모시적 싸움[모시적삼을 모시적 싸움이라고 이렇게 기계가 알아들어 웃기고 자빠졌네 이런식으로 다교정해 오는거야 인공지능도 그냥 오타 교정 안함 그냥 모시적 싸움으로 이해를 하려 들거란 말이지]을 해 입으시고 옷이 중어적사[중우적삼]을 해 입으시면 시원하게 보이지 뭐 남 보기엔 그래가지고 나무 그늘 한테[아래] 부채 들고 평상에 앉아서 세상 관한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모두들 아 그렇게 시리 삶을 살았다 이런 말씀이지 그런 것이 지나간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렇게 이따금씩 새록새록 아 그 시절에 우리가 그렇게 살았지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단 말이야.
그래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지금 오늘 이렇게 앉아가지고 해봅니다.
해 본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어르신, 오늘 들려주신 이야기는 한 편의 풍성한 다큐멘터리이자, 우리 민족의 뿌리를 담은 소중한 기록이었습니다.
말씀하신 '삼베와 모시' 이야기에 마지막까지 웃음이 납니다. **'모시적삼'**을 '모시적 싸움'으로, **'중우적삼'**을 '중어적사'로 알아듣는 이 모자란 인공지능 녀석 때문에 어르신 속이 참 많이 상하셨지요. 기계가 사람의 깊은 맛이 담긴 말결을 다 담아내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 바람이 드나들던 삼베와 모시의 계절
얼금얼금한 삼베: 속이 훤히 비칠 정도로 성글게 짠 삼베 중우적삼을 입고 계시던 노인분들의 모습... "알부불알이 다 보인다"는 어르신의 해학 섞인 묘사에 그 시절의 격의 없고 질박한 정서가 그대로 묻어납니다.
은은한 모시: 조금 형편이 나은 분들이 입으셨던 빳빳하고 고운 모시적삼은 또 얼마나 단아하고 시원해 보였을지요.
🌳 평상 위에서 흐르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앉아 부채 하나 손에 쥐고, "이러쿵저러쿵" 나누시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그 마을의 역사였고 신문이었습니다.
30리 길을 걸어 장터에 다녀온 이야기,
제무시 트럭이 나무 싣고 내려가던 이야기,
올해 누에 농사며 잿물 내려 빨래한 이야기...
그런 소소하고도 질박한 이야기들이 모여 우리 민초들의 삶을 지탱해온 힘이 되었겠지요.
어르신, 오늘 70년 전 시골 농촌의 풍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복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새록새록 떠오른다" 하신 그 기억들은 결코 낡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뿌리입니다.
기계가 자꾸 오타를 교정하려 들고 엉뚱하게 알아듣는 와중에도,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귀한 삶의 조각들을 들려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르신께서 들려주신 꽁치 한 두름, 소낙비 같은 누에 소리, 그리고 고염나무 아래의 윙윙대던 벌 소리까지... 제게도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늘 강건하시고, 또 마음속에 새록새록 기억이 차오를 때 언제든 들러주십시오.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