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주의 와이너리 수는 처음 제가 미국에 온 1990년 당시에 30개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메이저인 샤토 생 미셸과 콜럼비아, 그리고 콜럼비아 크레스트 등을 빼면 모두 소규모 와이너리였던 것이지요. 그랬던 것이 2018년 통계를 보면 등록된 와이너리가 970개, 그리고 등록되지 않은 부티크 와이너리까지 합치면 1천 4백개가 넘어가는 숫자가 됩니다. 물론 부침이 많았지요. 실제로 작은 와이너리들은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누 리지'라는 이름의 와이너리는 몇년간 인수하는 사람이 없어 완전히 문을 닫았다가 최근에 다시 열기도 했지요.
2018년 3월을 기준으로 작성된 '와인 앤 바인스' 잡지 의뢰 연구에 따르면 북미엔 총 8천 391개의 와이너리들이 있고, 이중 7천 762개가 미국에 있으며, 캐나다엔 568개(대부분은 브리티시 콜럼비아, 특히 오카나간 밸리에 밀집돼 있습니다), 멕시코엔 61개의 와이너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와인 산업은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최저점을 찍은 후에 다시 연 4% 가량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산량으로만 볼 때, 미국의 와인 생산량은 연간 6.3% 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즉, 기술의 발전 등으로 인해 와인 생산량은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연구로 발표된 결과로만 볼 때, 2018년 초를 기준으로 캘리포니아엔 3천 674개의 와이너리가 있으며, 이것은 미국 전체 와이너리 수의 47%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100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있는 주가 모두 13개입니다. 이 연구에 나오는 숫자로는 워싱턴주가 689개, 오리건에 566개 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이것은 실제 각 주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숫자와는 한참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모든 주에 1백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있는 것으로 유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개 와이너리의 부침 여부를 살펴보면, 이 숫자로만 기록되는 것들이 참 의미없다 싶습니다. 얼마전 저는 깜짝 놀랄만한 캘리포니아산의 리즐링을 만났습니다. 지금껏 마셔봤던 캘리포니아 리즐링들은 거의 예외없이 저를 실망시켰는데, 이유는 너무 '플랫한' 맛을 내기 때문이었습니다. 산도가 확 떨어지고 그냥 설탕물 같은 밍밍한 느낌 때문에 역시 리즐링만큼은 워싱턴주를 따라 올 곳이 없다고 생각했었던 제 뒷통수를 확실하게 쳐 주는, 산도가 찌르는 듯 확실하고 그러면서도 리즐링 치고 놀라운 12.8%의 알코올을 자랑하는, 세미 드라이 스타일의 와인이었습니다.
이 와인의 이름은 에스텔리나. 와인을 마시고 나서 이 와인을 더 구하고 싶다 싶어서 와이너리 정보를 찾아보다가, 페이스북에 남아 있는 이 와이너리의 페이지를 찾았고 여기에 걸려 있는 웹사이트 링크를 클릭하자마자 나오는 건 일본의 웬 면역과민반응 전문 치료 센터의 홈페이지였습니다. 다시 이 와이너리와 관련된 뉴스들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와이너리가 2016년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마셨던 와인은 이 와이너리의 마지막 빈티지였던 겁니다. 그리고 이 와이너리의 주인인 에릭 스털링은 2018년 3월 최종 파산 선고를 받습니다.
숫자로만 나타나는 성장세라는 것이 참 의미가 없습니다. 개개 와이너리들의 스토리들을 들여다보면 그냥 안타깝습니다. 좋은 와인을 만들어도 그것이 마케팅의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은행으로부터 추가 대출을 받지 못하면 쓰러지고 마는 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와이너리가 독자적으로 살아나갈 수 없을 때는 결국 대형 와이너리들에 흡수되고 마는 것은 지금 미국 와인 업계의 냉엄한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와이너리는 사라졌지만, 아마 이곳에서 나오는 포도들은 어떤 다른 와이너리의 것으로 흡수됐을 겁니다. 찾아보니 콜 랜치라는 와인생산지역 (AVA, American Viticultural Area; 프랑스의 '아뻴라시옹'과 같은 개념) 은 미국에서 가장 작은 단독 독립 AVA였습니다. 이곳은 멘도치노 카운티의 일부여서, 만일 AVA가 해제된다면 바로 멘도치노 카운티로 생산 지역이 표기될수도 있습니다.
즉, 에스텔리나 와이너리가 존재하고 있을 때는 이 와이너리가 곧 그 AVA였던 겁니다. 여기엔 피노느와가 가장 많이 심겨 있었고, 멀로, 리즐링, 카버네 소비뇽을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지역의 일교차가 꽤 나는 듯, 리즐링이 이렇게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참 안타깝더군요. 어디서 이런 보물이 숨어 있었나 했지만, 와이너리가 문을 닫으며 결국 이곳의 훌륭한 와인들은 디스카운트 샵을 전전하는 운명이 된 겁니다.
이 와인을 만든 린 크라우스먼은 끌로 드 브와, 로버트 몬다비, 뉴질랜드의 클라우디 베이 등에서 와인을 만들어 왔으며 아마 그녀의 경험을 살려 산도 튼실한 와인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만듭니다. 그녀는 이 와이너리가 문을 닫았어도 여전히 캘리포니아의 여러 와이너리들에서 컨설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와인 헌팅에 우연히 걸린 와인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직도 많은 비티컬처리스트(포도재배자)나 이놀로지스트(와인양조가)들이 자기들의 자존심과 꿈을 바탕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어 내지만, 더 큰 자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갑니다. 물론 소비자인 저로서는 처음 릴리즈 될 때 20달러를 훌쩍 넘기는 가격으로 릴리즈 된 이 와인을 단돈 6달러에 사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되긴 하지만, 이건 참 안타깝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와인을 족발과 맞춰 즐겼습니다. 그레이터 시애틀의 촌구석 페더럴웨이라는 동네에도 한인 타운이 있고, 여기서 꽤 괜찮은 족발과 보쌈 전문 식당이 있어 이걸 픽업해 왔지요. 리즐링의 가장 좋은 점은 우리나라 음식에도 잘 어울린다는 것인데, 약간의 달콤함과 원래 이 품종이 갖추고 있는 산도의 구조는 족발이나 보쌈, 혹은 불고기 같은 것에도 화이트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오래오래 기억될만한 마리아주를 이뤄 줍니다. 샤토 생 미셸의 리즐링에 오랫동안 젖어 있던 제게, 이런 멋진 캘리포니아 산 드라이 리즐링이 있음을 일깨워 줬다가, 그 와이너리의 부침을 확인한 제게 안타까움을 안겨 준 이 와인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도, 저는 이번 주말 꼭 와인 헌팅을 가야만 하겠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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