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암 민속마을
오랜만에 외암마을을 찾았다. 12년 전인가 보다.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재학 시 문화재탐방을 위해 이곳을 찾았었다. 담쟁이가 타고 오른 돌담 고샅길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 집들은 정겹기 그지없었다. 담장 너머로 고가들을 바라보며 타임머신을 타고 400년 전의 세계로 되돌아 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우리 모두에게 내재 된 회귀 본능을 자극하는 고향의 원형이 이곳이구나!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지 외암 마을은 오래도록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은 외암민속마을은 주차장에서부터 그런 향수 어렸던 기억이 단번에 깨어지고 말았다. 돌다리를 건너고 골목길을 돌면서도 12년 전의 고즈넉하고 정겨웠던 집들과 오순도순 배어 있던 시골이라는 정서는 어는 한 곳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뭐랄까? 설날 전에 기와가루로 닦아 논 놋그릇 마냥 반들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으면 좋았을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개발한답시고 들쑤시고 번지리 하게 칠하고 바르고 다시 짓고 다듬어 놓았으니 민속 마을이라 하게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 하는 일은 다 이렇다고 보면 된다. 문화재 감각에서 말이다. 하회마을에서도 그랬었다. 아니 옛 마을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전국 어느 곳을 가보아도 다 그러하다. 물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은 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난 개발을 해 놓고 우리의 전통 문화와 정신세계를 보러 오는 외국인에게 대체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때 묻은 먼지 하나도 마음대로 씻어 내지 못하게 하는 서구의 문화유산 보존의 전통을 이제는 우리도 본받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외암 마을은 예안 이 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을 이룬 역사가 자그마치 400년이나 된다. 배산임수의 명당인 이곳에 조선 중엽 때 이정의 일가가 터를 잡았고 6대 손이자 성리학자였던 외암 이간 선생의 호를 따서 외암마을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 마을은 400여년을 잠자듯 잘 보존 되어 왔던 것이다.
고불고불 구부러진 골목 따라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정겹게 어우러진 이 마을도 이제는 많이 피곤해져 있는 것 같다. 문들은 잠겨 있고, 찾는 사람들을 반겨 하기 보다는 집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모습들이었다. 피곤 할 것이다. 아무리 민속마을이라지만 예고 없이 밀고 들어 와서 기웃거리고, 사진기를 눌러대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이러한 주민들의 어려움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은 재고해 봐야 할 일이다.
외암 마을에서 가장 둘러보고 싶은 곳이 ‘영암댁’이다. 우리나라 100대 정원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이 집은 선친이 영암 군수를 지냈다 해서 ‘영암댁’이라 불린다는 데 지금은 문이 굳게 잠겨 있다.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이 집을 사들인 후 대문을 걸어 잠그고 별장처럼 사용한 이후부터 집안을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외암 마을은 상처만 받고 있나 보다.
그래도 전통을 이어가려는 이 곳 사람들의 노력은 가상하다. 상호도 없는 서너 평의 누추한 식당에는 골판지에 허투루 쓴 메뉴를 써서 걸어 놓고 찾는 사람들에게 끼니를 제공하고 있다. 청국장, 된장찌개 등 정겨운 우리 음식에다 이곳 텃밭에서 가꾼 무공해 채소 등, 늘 우리가 집에서 먹는 반찬을 그대로 내어 준다. 세태를 거역하며 순수성을 지켜 나가려는 이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배부름 보다 더 마음을 부르게 해 주었다.
외암마을을 둘러보았다면 ‘세계꽃식물원’에 들려 보는 것이 좋겠다. 외암마을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세계의 각종 꽃 3000여종이 온실 안에서 반겨 주고 있다.
집들을 아우른 담장이 골목길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 모습에서 고향을 그린다.
떠나간 자리에 남은 집들이 조들은 쓸쓸하다.
초가집은 에전 그대로지만 집을 지키는 주인장은 피곤하기만 하다.
드라마에서 봄직한 솟을 대문
멀리 보이는 할머니의 인자한 모습이 바로 고향이 아닐까?
진정한 삶의 가치로운 터전이란 자연과 어우러지는 그런 환경일 것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솔숲은 지금도 청청하기만 하다.
임금님이 하사했다는 현판도 걸려 있고~~
대문 마다 붙여진 글씨는 예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