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65, 구이 저수지 둘레길을 완주하고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변화와 혁신보다는 안전을 추구하여 늘 하던대로 해야 마음이 편한 것 같다. 그것은 꼭 공직에서 오랫동안 제도와 규제 속에서 길든 습관만은 아니고,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오늘은 전주로 이사 와서 술박물관 쪽으로 여러 번 구이저수지 수변 길을 갔다 온 적은 있으나, 애초 계획을 깨고 처음으로 둘레길을 완주하여 자신을 칭찬하고픈 하루다.
아들도 교직에 있는데 봄방학 무렵에 ‘코로나 바이러스-19’ 때문에 개학이 미루어져서 몇 주 째 학교에 출근하여 직무연수로 하루를 보내니 지루하고, 작년에 무릎을 수술한 자리를 재활운동도 할 겸 구이저수지 쪽으로 잠깐 다녀오자고 했다. 아들과 아내는 간단한 등산복 차림으로 나는 캐주얼 외출복으로 나섰다. 술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니 ‘코로나 바이러스-19’ 때문에 박물관은 휴관 상태여서 보통 때보다 주차된 자동차는 헤성헤성했다. 오늘도 평소처럼 작은 고개를 넘어 데크길까지만 왕복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아내는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으니 산등성까지 갔다 오자면서 앞장을 섰다. 그런데 산등성에 도착할 무렵에 작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데크길이 아니고 흙길이어서 길은 금방 흙탕물로 변하면서 미끄러웠다. 나와 아내는 관계없지만 아들이 걷다가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무릎수술 자리에 큰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어 뒤돌아가자니 산비탈 흙탕길이 위험하고, 구이면 소재지까지 걸어가자니 길이 멀었다. 할 수 없이 안전한 쪽으로 선택하여 시내버스나 택시로 술박물관까지 가기로 했다. 봄비를 맞으며 걷기 싫은 길을 걸어갔다. 아내는 원래 코스를 어겨서 이런 결과가 초래한 것이 미안했는지 연신 헛웃음을 치며 저녁 식사는 영양식으로 하자고 했다.
저수지 끝쪽을 돌아서 마을길에 도착하니 시내버스정류장이 보였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식구들은 비도 그치고 시내버스 시간도 알아볼 겸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살펴봐도 시내버스 정류장만 있지 운행은 안 하는 것 같았다. 모악산 자락 전주 순창 간 전용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둘레길 안내판을 보니 조금 걸으면 구이면 행정복지센터이니 그곳에서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출발지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구이면 행정복지센터는 바로 코앞의 거리가 아니고 구이 호수마을 전원주택단지를 지나서 작은 들과 산을 넘어서 30여 분이나 더 걸어야 했다. 호젓한 마을길을 걸어가니 비닐하우스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우두둑우두둑 입체 음향효과를 내니,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게는 조바심을 더욱 가중시켰다. 둘레길 옆 가옥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레길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행여 귀찮게 해코지라도 하는 것인지, 집마다 제주도의 정낭처럼 멍멍이를 대문에 묶어놓고 감시하며 무조건 짖어대니 둘레길 문화가 언짢게 느껴졌다. 몸은 지쳤지,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 날은 저물어 가는데 호수 위쪽을 보니 십계의 구원길처럼 희미한 둑이 보였다. 바로 출발지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여기까지 고생하며 왔는데 무슨 시내버스, 택시냐며 끝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저수지 제방길은 가을 농촌에서 빨간 고추를 멍석에 널어 말리는 모습처럼 빨간색 아스콘으로 예쁘게 포장되어 아늑하고 기분이 좋았다. 오른쪽 호수에는 맑은 물이 가득한데 오리 떼들이 수영을 줄기고 있었다. 왼쪽에는 크고 건강한 벚나무들이 제방 길 아래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어, 벚꽃이 만개하는 계절에는 꽃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 것 같았다. 벌써 아내는 아들네 식구들과 봄나들이 계획에 들떠있다.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없다. 조금 전까지는 구이저수지 하면 외래종 배스처럼 보기 싫고 짜증나서 어느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지금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전주로 이사 와서 발견한 가장 좋은 나들이코스로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화가 나서 그랬는지 추위도 몰랐는데, 긴장이 풀리니 추위가 느껴졌다. 옷은 흠뻑 젖어 몸속의 열기가 밖으로 내뿜어서 윗도리에는 작은 서릿발같이 안개 물방울이 뒤엉켜 있었다. 아들이 털어주니 작은 물방울로 만들어져 떨어졌다. 머리는 빗물에 노출되어서 열기를 빼앗아 갔는지 한기가 들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닦고 네 귀퉁이를 옭아매 모자를 만들어 쓰니 발산하는 열을 차단하여 한기가 금방 멎었다. 이제는 구이저수지의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풍수지리에서 모악산(母岳山)은 여자 산이고 경각산(鯨角山)은 남자 산이며 그들이 청혼하여 아름다운 결혼으로 인해 구이면 저수지에는 생명의 근원이며 풍요의 상징인 물이 넘쳐흐르게 되었다. 그 물은 전주시, 완주, 김제, 익산 등에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그릇 같은 고마운 저수지다. 날씨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비는 그치고, 서쪽 하늘 구름 사이로 저녁노을은 조물주의 위대한 천지창조의 빛처럼 강렬하게 비추고 있다. 몸은 피곤했지만 보람찬 하루였다. 시시각각으로 변했던 밴댕이속을 누가 알까 두렵다. 출발 3시간여 만에 술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니 6시가 다 되었다. 조금은 늦은 시간이어서 모든 자동차는 떠났는데 그래도 홀로 주인을 기다리는 내 자동차가 기특했다.
아내의 약속대로 푸짐한 저녁식사를 위해 구이면 생고기집 주차장에 도착하니, 손님이 너무 많아서 차 한 대도 주차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어 전주 시내 단골집으로 가서 꼬리곰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무엇이든지 평상시대로 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하루였다.(2020.3.7.)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걷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