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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겨울다운 겨울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겨울이라 칭함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며칠? 사흘만에 지나갑니다. 이래서야 한강이 얼까 모르겠습니다. 코웃음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조금 티는 내보려하지 않을까요? ㅋㅋ 옛날 한강대교에서 마포 당인리 발전소(지금은 폐쇄되었지요?)까지 스케이트를 타고 오락가락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하 20도 가까이 다달아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 때는 실내빙상장이 없었으니 겨울에만 즐길 수 있었기에 아무리 추워도, 오히려 추워서 신났습니다. 요즘 영하 7도 안팎에 ‘강추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지구가 과연 뜨뜻해져서 그러나 싶기도 합니다. 그저 문지방 열고 잠시 인사나 하고 돌아가는 셈이지요.
그나저나 이 추위에도 밤을 지새며 시위하는 우리 국민들의 소망이 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왜들 이 고생인지 딱합니다. 한 달 전 바로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우리 모두 편안한 겨울을 보낼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의 역할이 이렇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정말 눈을 부릅뜨고 선택해야 할 일이구나 싶습니다. O든 X든 어서 결정이 나야 다가오는 봄도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21세기까지 양파를 못 먹고 좌파 우파 따지는 지경이라니. 어서 이 세대가 지나가야 하리라, 뭐 그런 생각입니다. 이제 곧 설날도 오고 있는데 좀 푸근한 마음들을 품으면 좋겠습니다. 피곤한 몸과 맘들을 그 한 주간이라도 쉬게해주기를 바랍니다.
새달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듭니다. 시간은 내비둬도 가는 것, 낭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고 복된 주말을 빕니다. ^)^
2025년 1월 11일 김종우 목사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 : 8)
<대가족>
제사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어른들이 들으면 아마도 꽤나 야단맞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제는 그렇게 꾸짖는 세대가 많이 감소했습니다. 더구나 남아있는 어른들의 힘이 많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속된 말로 ‘말빨’이 안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설날과 추석 명절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 많기는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 예측합니다. 부모 세대도 감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찾아가는 젊은 세대도 줄어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흔히 보는 고속도로 정체도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자연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구나 의식 자체가 변하고 있습니다. 정 가야한다면 미리 다녀와서는 그 휴무 기간에 여행계획을 짜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사는 우리 앞서 사신 분들을 모시는 일입니다. 모처럼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의식을 행하고는 식사를 합니다. 평소에 보기 힘들던 음식을 맛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기 생활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연중 푸짐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기다려지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습니다. 구태여 그 날이 아니어도 지금은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어쩌면 제사상의 음식보다도 더 맛있는 것들이 때마다 즐비합니다. 그 날을 바라며 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원하면 먹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일 만한 가족이 많이 줄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감소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차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는 그런 문제 가지고 그리 따지지도 않는 듯합니다. 나름 서로 양보한 점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의식들이 이전 세기와는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구태여 싸울 필요도 없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완고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그런 의식에 크게 관심도 즐어들고 있습니다. 사실 의식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그 관습을 지켜줄 사람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혼도 출산도 감소하고 있는 마당에 제사가 문제이겠습니까? 할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더 큰 숙제로 다가오고 있는데 신경 쓸 여유도 없습니다.
또 하나 가족의 변화입니다. 여태 혈연중심의 가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속담에도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하지요. 연중 한두 번 볼까말까하는 가족보다 늘 보고 지내는 이웃이 훨씬 가깝습니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그것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종종 ‘고독사’ 문제가 떠오릅니다.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납니다. 지자체에서는 일단 혈연 가족부터 찾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그 동안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장례를 맡겠다고 해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들이 가족친지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오랜 시간 같이 지냈고 그에 대하여 가족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래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절차도 까다롭습니다.
소문난 맛집이 되어 이제는 꽤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아들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습니다. 아비로서 그런 아들이 무척이나 원망스럽습니다. 때를 따라 내려와 인사도 하고 의식도 치르지만 대가 끊어질 것을 생각하면 미래의 희망이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평만옥의 사장 ‘무옥’은 그렇게 희망 없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항상 짜증이 뭉쳐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남의 말 들으려하지도 않고 완고하고 도무지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 어느 날 어린이 둘이 찾아 들어옵니다. 그리고 아들 녀석 ‘함문석’씨를 찾습니다. 자기네 아빠랍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승려가 언제 자식들을 낳았다는 말인가요?
문석이를 불러다 따집니다. 언제 숨겨둔 자식을 만들었느냐? 기막힌 현실을 당하여 문석은 오래 전 청년 때의 일을 되돌아봅니다. ‘정자기증’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기증자에 대하여 비밀이 지켜집니다. 그런데 비밀이란 것이 때로는 비밀처럼 드러나기도 합니다. 갑작스럽게 난처한 입장이 되었으니 밝혀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도 아니고 아륻 딸 남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당시의 병원부터 해서 추적하고 다른 한편 과연 내 자식이 맞는지 유전자 검사도 의뢰합니다. 한편 무옥의 삶은 돌연히 활기로 가득 찹니다. 미래가 생겼고 세상 떠나도 희망이 남게 되었습니다. 따질 것도 없이 굴러들어온 아이들을 손자들로 떠받듭니다.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도록 해줍니다. 그 동안 이 주제로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은 나타난 문서에 따라 집행될 뿐입니다. 그러니 얼굴도 모르던 가족이 갑자기 나타나 유산 청구를 해도 유효해지는 것입니다. 뭔가 새로운 개념 설정이 필요한 때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는 남달리 멋진 장면이 나옵니다. 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하고 땅에는 잔잔히 흐르는 개울이 어우러진 밤 풍경입니다. 또 하나, 한적한 산사의 모습과 어린이 보육원을 운영하는 수도원입니다. 종교 간의 화합을 꾀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영화 ‘대가족’(About Family)을 보았습니다. 영어 제목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무엇을 얻자고 믿는가?
우리나라가 지폐를 사용한 것이 언제부터인가요? 옛날에는 잘 아는 대로 엽전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사극을 보면 줄에 꿰 가지고 다니는 엽전 다발이 나옵니다. 가지고 다니기 쉽지 않았겠다 싶습니다. 허리에 차거나 따로 돈 주머니를 만들어서 넣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근대화되면서 일본을 통하여 지폐가 들어왔고 우리나라도 자체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의 일입니다. 당시 일원도 꽤 큰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니면서 교회 오면 구원을 준다는 겁니다. 그냥 주냐고 물어보니 그냥 준답니다. 햐 - 이게 웬 떡이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침을 흘리며 교회를 갔습니다. 지루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난생 처음 교회라는 곳을 들어왔는데 도대체 뭘 하는지도 모릅니다. 가만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눈을 감고 뭐라고 열심히 떠드는데 뭔 소린 지도 모르겠고 오로지 구원 주기만을 기다리는데 뭐가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노? 아, 아무리 구원도 좋지만 정말 구원 받기 힘드네. 지루하게 한참을 기다리다 간신히 다 끝난 모양입니다. 모두 나가길래 따라나갑니다. 그런데 아무도 구원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야, 이거 뭐야? 사기야? 구원 준다던 그 사람은 어디 있는 거야?
그 때는 구원이 참 컸습니다. 지금은 천원 준다고 해도 올까 말까 하겠지요. 그러나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구원인 줄 믿습니다. 그런 구원이 아니지요. 그 때나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 구원에 대해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마 19 : 23 - 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그러자 제자들이 즉각 반응합니다. 25절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천국 들어가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구원 얻는 일’로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천국 즉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곧 무엇이다? 구원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 받아 천국 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지요. 구원, 천국 그리고 영생, 이 세 가지 말을 우리는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아무튼 바로 앞에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왜 찾아왔습니까?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고 싶어서 온 것이지요. 들은 대로 그는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아온 청년입니다. 그럼에도 영생을 얻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도 영생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는 뜻이지요. 세상에서도 법을 지킬 때 기꺼운 마음으로 지킵니까, 마지못해서 지킵니까? 세상 법도 좋아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즐겁게 지키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벌금 내지 않으려고, 벌 받지 않으려고 지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은 즐거워서 지킵니까? 아마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그렇게 지켜주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키는 백성은 즐거워서 지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지키면 복과 생명입니다. 그런데 왜 즐겁지 않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신 6 : 4 - 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율법을 지키기 원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됩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그 결과는 저주와 멸망입니다. 두려워집니다. 더구나 법에 매여 산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불편합니다. 단지 죽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돼요, 안 돼요? 즐거워서 해도 실수가 있을 수 있는데 불편함에도 한다면 그보다 실수가 더 많이 나오겠지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악행이 백 번의 선행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약 2 : 10 - 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앞에 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해줍니다. 롬 3 :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청년이 아무리 다 잘 지켰다 해도 모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법이 두려워서 지킨 것이지요. 마음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도 알 것입니다. 그러니 지켰다 한들 생명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네 가진 것 다 나눠주고 나를 따르랍니다. 결과는 마 19 : 22절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실제로 재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은 그렇게 들었습니다. 자기 재산 다 나눠주고 예수님께 오라고 말입니다. 영생 얻으려고 왔다가 오히려 근심만 한 보따리 안고 돌아갔습니다. 왜요? 천국언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답니다. 땅에 있는 보화 다 팔아서 다시 보화를 얻는다면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그거죠. 그러니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보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그렇게 갖고자 하는 금은보석인가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얻으려고 자기 가진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답니다. 바울이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대단한 재산이라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빌 3 :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앞뒤를 헤아려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다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전에 가지고 있던 율법에 대한 지식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고 살았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네가 가지고 있던 그 율법으로 인한 의는 다 버리고 오라는 뜻이지요.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율법의 의는 예수 이름을 짓밟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니 구원도 영생도 천국도 거리가 멀지요.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바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율법에 대한 지식과 의를 모조리 배설물처럼 버린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곧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실체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그것을 깨닫기가 사실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율법 곧 구약의 실체가 누구라고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신약의 실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워야 합니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니 동석해 있던 베드로가 또 대뜸 나섭니다. 마 19 :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오셨나요? 사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가족도 재산도 다 버리고 따라왔지요. 우리는 다 버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예배 끝나면 도로 가지러 가잖아요. 그럼에도 뭔가 바라고 교회 나옵니다. 뭘 바라지요? 물건 팔려고 오는 거 아닙니다. 친구 만나러 오는 것도 아닙니다. 심심해서 놀러 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봉사 하러 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 구원과 영생 천국 가려고 오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를 말씀한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해당될지도 모르기 일입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하지요. 그런 날이 오겠다, 안 오겠다? 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언제일까요? 그 뒤의 말씀을 보면 언제라는 것이 짐작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인자는 물론 예수 본인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분명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그 자리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는 잘 아는 대로 재림 때입니다. 처음 오신 것은 백성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종으로 오셨습니다. 빌 2 : 7 - 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초라한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마 16 : 27 - 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왕권을 가지고 오십니다. 오시면 뭐 하신다고요? 행한 대로 갚아주신답니다.
우리가 여태 듣고 배우고 알고 믿고 있기로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확성기로 떠들면 소음 일으킨다고 경범죄로 잡혀 갑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일인 시위하듯이 둘러매고 다닙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면서 다니지요.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불신자들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태 알고 있기로는 오로지 불신자들, 곧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만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 말씀도 잘 보십시오. 다시 봅니다. 마 19 :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읽었지요? 누구를 심판한다고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입니다.
또 하나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라고 하니까 옛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사람들을 심판하는 겁니까? 그 사람들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예를 들어서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다. 심판받았지요? 조금 길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이니까 한번 읽겠습니다. 히 3 : 15 - 19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모세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답니까? ‘믿지 아니하므로’ 그렇지요? 누가 안 믿었습니까? 이방인입니까, 하나님 백성입니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누가 심판받는다고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버림당했습니까? 이방인 로마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믿음이 좋다는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제사장들, 장로들 율법사들이었습니다.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바꾸신 것입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자기 백성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꿉니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새로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창조된 것입니다. 구약 때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창조된 신약의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열두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약 1 :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예수님 다녀가신 뒤의 이 열두 지파는 옛날 이스라엘, 야곱의 열두 지파가 아닙니다. 그렇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면 누구를 심판한다고요?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겁니다. 우선 우리가 여태 잘못 알고 믿고 있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와 같이 한 백성이 되어 이 말씀이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누가 심판을 당한다고요? 바로 신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곧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벧전 4 :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어디서 심판을 시작한다고요? ‘하나님 집에서’ 곧 교회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게 아닙니다. 누가 지옥 갈 수 있다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요? 순종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아니 우리 다 예수 믿는데요? 예,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꿈이고 희망사항입니다. 잘 알고 믿읍시다.
마지막 부분 읽습니다. 마 19 : 29 - 30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온전히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 16 :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첫째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나에게 속한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천국 가기 어렵다, 쉽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할 수 없을 것 같지요? 결론 읽습니다. 마 19 :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 은혜 주시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받읍시다.
이제 정리해봅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를 나오고 예수를 믿습니까? 점심 한끼 얻어먹겠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과 영생 곧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이루려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를 믿는다고 믿는 것이 아님을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누구인지 알고 믿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누구인 줄도 모르고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자기를 죽이는 분인지 살리는 분인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옛날 전도하며 하던 말이 있습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어봐.’ 무지몽매할 때 하던 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런 믿음은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옛날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도 제사가 아니라 아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단순히 ‘믿습니다’가 아니고 그저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분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그 말씀이 육체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래서 지금 예수님도 말씀으로 오십니다. 요일 1 : 1 -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그러니 진정으로 구원과 영생, 천국을 소망한다면 말씀 배우는 일에 소홀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할진대 듣고 있는 말씀이 하늘의 말씀인지 땅의 말인지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듣고 있습니까, 땅에서의 형통한 길을 듣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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