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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리대왕』
출처-<문예출판사>
우리에겐 야만성이 있다
고양이만 해도 여러 종이 있다. 그런데 왜 인류는 오직 하나의 종만이 존재할까. 당연히 인류 역시 하나의 종이 아니었다. 이미 확인된 것만으로도 사피엔스 외에 네안데르탈인이 있었고 데니소바인이 있었다.
독일 메트만 네안데르탈박물관에 전시된
남녀 네안데르탈인 상
대략 5만 년 전쯤 어느 날, 한 무리의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사슴을 사냥하고 견과류와 장과류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것이 네안데르탈인의 주식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지적으로 우수한 사피엔스는 다른 인류에 대해 폭력과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사피엔스의 출현과 함께 다른 인류 종들이 멸종한 것은 이 가설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비록 우리가 문명의 세례를 통해 법과 제도라는 질서 속에서 살고, 교육을 통한 교양과 예절이라는 옷을 입으며 타인을 향해 미소 지을 수 있는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유전자의 뿌리가 야만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먹을 것이 부족해지는 순간 주저하지 않고 발현될 것이다.
영화 '파리 대왕' 中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 속에 영국 아이들이 던져졌다.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여긴 섬이야.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희 아빠도 몰라.”」
어느 날 전쟁이 터졌다. 핵전쟁이었다. 전쟁을 피해 아이들을 태우고 날아가던 비행기가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6살부터 12살까지, 이십여 명의 아이들은 어느 무인도에 상륙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아이들의 분투가 시작되었다.
무인도에서 규칙과 역할을 정하다
열두 살 하고 몇 달이 더 된 ‘랠프’는 딱 벌어진 어깨와 온유한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랠프가 무인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아이는 ‘새끼돼지’였다. 뚱뚱하고 천식에 원시 안경까지 쓴 새끼돼지는 깔깔거리며 웃는 랠프를 보며 자신의 별명을 말한 것을 후회했으나, 랠프는 뚱뚱보로 불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했다.
뚱뚱보로 불리는 것보단 낫지~
아이들답게 불행한 처지임에도 바닥까지 환히 보이는 맑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놀던 둘은 예쁜 소라 하나를 발견했다. 45센티 정도 길이의 우윳빛 소라였다. 새끼돼지의 제안에 따라 랠프는 소라를 불었다. 깊고도 요란한 가락이 야자수 밑에서 울려 나와 섬 전체로 퍼져 나가더니 산에 있는 바위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왔다. 이 소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혼자 또는 둘씩 짝을 지어 아이들이 랠프와 새끼돼지를 향해 걸어왔다. 랠프가 소라 불기를 그쳤을 때, 한 떼거리의 소년들이 나타났다. 그 아이들은 같은 의상을 입었고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키 큰 소년 하나가 그 아이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잭’이라며 성가대를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봉화를 피워 구조 신호를 보내야 했고 당장 기거할 오두막도 지어야 했다. 물론 식량도 구해야 했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이끌 대장이 필요했다. 큰 키에 성가대를 이끌고 있는 잭은 자신이 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나 문명국인 영국 아이들답게 그들은 투표로 대장을 뽑았다.
「덩치도 그렇고 그의 용모는 매력적이었다. 또한 가장 모호하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은연중에 발휘한 요인은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나서 무릎 위에 그 섬세한 것을 균형 있게 올려놓은 채 바위판 위에서 자기들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그 애는 그야말로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존재였다.」
랠프가 대장이 되었다. 어른들의 메가폰에 복종했듯이 아이들은 그의 손에 들린 소라에 복종했다. 잭의 얼굴에 깔린 주근깨가 모멸로 생겨난 홍조에 보이지 않았다. 랠프는 그런 잭에게 여전히 성가대는 너의 관할이라며 위로했다.
「잭은 큼직한 칼집이 달린 칼을 뒤춤에서 꺼내어 나무 줄기에 꽂았다. 수군덕거리던 소리가 일다가 곧 가라앉았다.」
랠프의 지도하에 아이들은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칼을 가진 잭의 성가대가 사냥부대의 역할을 맡기로 하자 잭의 얼굴에서 모멸감이 사라졌다. 아이들은 회의의 규칙도 만들었다. 나이와 관계없이 발언권을 가지며 소라를 넘겨주는 것으로 발언권을 공인하기로 했다. 대략적인 것들이 정해지자 가장 나이 많은 랠프와 잭, 그리고 ‘사이먼’은 섬 탐험을 시작했다.
날려버린 구출 기회와 다툼
「봉화는 꺼져 있었다. 그들은 금세 그것을 알아차렸다. 고향의 연기가 손짓하고 있는 동안 모래사장 저 아래에서 이미 알고 있던 그대로 봉화는 꺼져 있었다.」
수평선 근방에서 실처럼 가는 연기를 보았다. 배다. 그것은 아이들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연기였다. 그러나 봉화는 꺼져 있었고 배는 사라졌다. 아이들이 그토록 고생해서 만든 산정의 봉화였다. 새끼돼지의 안경을 볼록렌즈로 이용하여 간신히 불을 붙인 봉화였다. 봉화 담당은 잭과 사냥부대였다. 랠프와 사이먼 그리고 새끼돼지는 사라진 배를 보며 절규했다.
「잭 뒤로 쌍둥이 형제가 어깨에 큰 장대를 메고 있었다. 그 장대에는 창자를 드러낸 멧돼지가 매달려 있었고 쌍둥이 형제가 울퉁불퉁한 지면을 통과할 때마다 그것은 육중하게 흔들렸다. 목에 큰 상처를 입은 멧돼지의 머리는 축 늘어져 있어 땅 위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형상이었다.」
마치 야만인처럼 얼굴에 찰흙을 바르고 나무 막대기 끝을 뾰족하게 깎은 창을 든 아이들은 흥분해 있었다. 아이들은 ‘멧돼지를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를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피 묻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용담을 자랑하려는 잭과 아이들에게 랠프는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이 불을 꺼뜨렸고 방금 배가 지나갔다고.
겁많은 새끼돼지조차 원통함과 비통함에 잭에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사냥부대 중의 작은 꼬마 하나는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 당황스러운 사태 앞에서 멧돼지를 칼로 찌르고 있던 잭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잭은 난폭해졌다. 그는 파란 눈에 번갯불을 번뜩이며 새끼돼지의 배를 강타했다.
아아악~!
그리고 주저앉는 새끼돼지의 머리를 쳤다. 그 바람에 새끼돼지의 안경이 떨어져 바위에 부딪혔다. 안경은 새끼돼지의 눈이자 불을 붙이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도구였다. 한쪽이 깨졌고 새끼돼지는 공포에 질렸다.
분노한 랠프에게 잭이 사과했다. 사태가 진정되었다. 하나 남은 새끼돼지의 안경알을 이용해 모닥불을 피우고 잭이 잡아 온 멧돼지를 구웠다. 벌건 불이 타오르고 막대기에 꽂힌 돼지고기에서는 기름이 끓었다. 며칠이나 열매와 생선만 먹었던 아이들의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새끼돼지도, 사이먼도, 랠프도 마찬가지였다. 입에 고기가 들어가자 아이들답게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특히 사냥부대 아이들은 좀 전의 일을 잊고 다시 춤을 추며 멧돼지의 목을 따자고 외쳐댔다. 랠프는 그들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소라를 불어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계속된 다툼과 공포의 정체
「“꾸불꾸불한 것과 싸울 때는 잠자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는 깨어 있었어. 그리고 어떤 크고 무시무시한 것이 나무 사이에 움직이는 것을 봤어.”」
비교적 순조로운 무인도의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꼬마들 사이에 공포감이 번지고 있었다. 바다에서 올라온 공포의 짐승을 보았다는 꼬마들이 생겨났다. 몇몇 꼬마들은 밤마다 훌쩍거리며 울어댔다. 랠프는 회의를 소집했다.
아이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되었고 회의는 망가져 갔다. 어떤 아이는 그것이 짐승이 아니라 유령이라고 말했다. 소라를 가진 아이에게만 발언권이 있었다. 말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소라를 낚아채 가기도 했다. 새끼돼지가 냉정하게 유령은 없다고 말하며 그보다 중요한 것은 멧돼지 사냥 따위 때문에 봉홧불을 꺼뜨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잭이 욕설을 퍼부으며 새끼돼지에게 달려들었다. 랠프는 벌떡 일어서서 잭을 만류했다. 새끼돼지가 소라를 들고 있으니 너는 규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고. 새끼돼지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잭의 얼굴이 랠프 가까이로 다가왔다.
“너나 닥쳐! 도대체 네가 뭐야? 거기에 앉아서 이래라저래라 지시나 하고...... 사냥도 못 하고 노래도 못 하는 주제에.”
“난 대장이야. 선출된 대장이라구.”
“선출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니? 아무 의미도 없는 명령이나 하는 주제에......”」
잭은 거칠게 외치며 어슴푸레한 모래 위로 뛰어내렸다. 회의장은 소음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고 소라가 가진 발언권은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모두 질서를 잃고 여기저기 모래사장으로 제각기 흩어졌다. 흩어진 아이들은 어울려서 무엇인가를 노래하기도 했고 꼬마들은 울부짖거나 비틀거렸다.
아이들은 몰랐다. 공포의 정체를. 그것은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온 신호였다. 아이들 머리 위 16킬로미터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졌고 사지를 축 늘어뜨린 어른 하나가 낙하산에 매달려 섬으로 떨어졌다. 바람이 낙하산을 움직였다. 두 다리를 뒤로 한 채 낙하산에 매달린 어른은 산정으로 서서히 끌어올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 사이에 몸이 처박히게 되었고 낙하산의 끈은 밧줄처럼 엉켰다.
「그는 헬멧을 쓴 머리를 무릎 사이로 처박고는 복잡하게 엉킨 끈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미풍이 불 때마다 끈이 팽팽해졌고 그로 인해 머리와 가슴이 곧추세워져 흡사 산머리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자세가 되었다.」
결국 분열된 아이들
봉화대가 있는 산정까지 올라간 아이들은 공포의 짐승을 목격했다. 산정 바위 사이에서 거대한 원숭이 같은 것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 순간 바람이 불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더니 그 생물체가 머리를 쳐들어 헬쑥한 얼굴을 아이들 쪽으로 돌렸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미친 듯이 산 아래를 향해 달렸다. 뛰다 넘어져 구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아이들 그 누구도 산정의 봉화대로 가지 않았다. 무인도의 산은 완전히 인적이 끊어졌다. 그곳에는 오직 낙하산에 매달린 채로 고개를 숙인 시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랠프는 회의를 소집했다. 어떻게든 봉화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의는 산정의 짐승에 대한 각자의 묘사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잭과 랠프는 누가 먼저 도망쳤는지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고 서로를 겁쟁이라 부르며 노려보았다. 오직 새끼돼지만이 한쪽만 남은 안경알을 닦으며 산 아래에라도 봉화를 피워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혼자 이곳을 떠나겠어. 랠프는 제가 먹을 멧돼지를 제 손으로 잡도록 해. 그리고 내가 사냥할 때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은 따라와.”」
잭이 무리를 떠났다. 잭은 랠프와 대립 중 기대에 부풀어 랠프가 대장 노릇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라고 했지만 아무도 들지 않았다. 사냥부대조차도. 잭은 이 치욕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랠프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너네끼리 잘 해봐라. 난 간다
랠프의 지시에 따라 다시 봉화대를 만드는 힘든 작업이 시작되었다. 힘든 작업이 계속되자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자리를 떠 잭이 사라진 곳을 향해 갔다.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었다. 봉화가 완성되어 다시 불이 붙었을 때는 랠프의 곁에 몇몇 꼬마들과 새끼돼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믿었던 사이먼마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잭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봉화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모래사장에서 자신의 앞에 모인 소년들을 보며 행복해했다.
「잭은 암멧돼지를 올라타고 칼로 내리찔렀다. 로저는 자기 창 끝이 찌를 마땅한 장소를 발견했는지 체중을 전부 실어서 창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 창은 조금씩 살 속을 파고들었고 겁에 질린 멧돼지의 비명은 음계가 높은 절규로 변했다. 다음 순간 잭이 멧돼지의 목덜미를 땄다. 뜨거운 피가 그의 두 손으로 솟구쳤다.」
잭은 자신을 따라온 아이들에게 약속을 지켰다. 고기를 먹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진실 전달자 사이먼의 죽음
잭은 암멧돼지의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막대기의 양쪽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잘라낸 머리의 목구멍을 박았다. 막대기는 아가리 근처로 빠져나왔고 피가 흘러내렸다. 산정의 짐승에게 바칠 제물이었다. 잭은 돼지머리가 달린 막대기를 숲속에 박았다. 곧바로 윙윙거리며 파리들이 달라붙었다.
「그런데 사이먼의 정면에는 파리대왕이 자기의 지팡이에 매달려서 밝게 웃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먼은 눈 감은 자세를 포기하고 돌아보았다. 흰 이빨과 희미한 눈과 피가 보였다.」
멧돼지 머리에 들러붙어 배가 터져라 포식한 파리 떼가 사이먼을 멧돼지 머리, 파리대왕에게로 안내했다. 사이먼은 산정의 짐승을 믿을 수 없었다. 만약 산정의 짐승이 진짜로 멧돼지 머리 선물을 받으러 온다면 눈으로 확인할 요량이었다.
사이먼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무엇을 잘못 먹었는가를 생각할 때였다. 파리대왕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파리대왕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이먼은 자신이 어떤 거대한 입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입 속은 캄캄한 암흑이었다. 사이먼은 그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사이먼은 코피를 흘렸지만, 파리 떼는 자기들 대왕의 머리에 새까맣게 들러붙어 풍미를 즐기고 있었기에 다행히 사이먼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사이먼은 비틀거리며 산정을 향해 걸어갔다. 막대기 끝에 검은 공처럼 꽂혀 있는 파리대왕이 사이먼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사이먼은 입 주변에 피를 묻힌 채 파리대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걸어갔다. 어느덧 산정에 도착했을 때 사이먼은 보았다. 파리 떼도 사이먼이 본 그 물체를 찾아내었다.
「살아 있는 듯한 움직임에 놀라 파리 떼는 잠시 그 물체를 떠나 머리 위에 구름처럼 떠돌았다. 그러다가 낙하산의 푸른 천이 축 늘어지면 그 뚱뚱한 물체는 한숨을 쉬면서 꾸벅 절을 하는 듯했고, 파리 떼는 다시 내려앉는 것이었다.」
잭과 아이들은 원을 만들어 만들어 빙글빙글 돌며 광기 어린 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다. 랠프네에서 훔쳐 온 불로 피운 모닥불에서는 멧돼지 살점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새까만 하늘에서 청백색의 번갯불이 치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났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영국 소년이 아니었다. 잭은 추장이 되었고 아이들은 야만인이 되었다. 얼굴과 몸에는 진흙을 발랐고 옷은 모두 벗은 채였다. 아이들의 광기 속으로 사이먼이 들어왔다. 사이먼은 산정의 시체에 대해 말하려 했으나 아이들에게는 죽이고 목을 따고 피를 흘려야 할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막대기가 내리퍼부어지고 새로 원을 그린 소년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 짐승은 원의 한가운데에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짐승, 사이먼은 허우적거리며 원형을 뚫고 나와 물가의 모랫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이들의 무리가 쫓아와 주먹질을 했고 물어뜯고 할퀴었다. 곧 비가 폭포수처럼 퍼부었다. 비는 산정의 나뭇잎과 가지를 쓸고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낙하산의 시체도 함께.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이먼의 시체는 서서히 물에 휩쓸려 바다로 밀려 나갔다.
빼앗긴 안경과 새끼돼지의 죽음
흑흑...
새끼돼지는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잭 패거리들이 습격해 와 새끼돼지의 안경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안경은 새끼돼지의 눈이었고 봉화를 피울 유일한 도구였다. 랠프는 결심했다. 막대기를 깎아 만든 창을 새끼돼지에게도 쥐여주며 싸울 태세를 갖추라고 했다. 랠프는 새끼돼지를 데리고 잭의 패거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랠프의 손에는 소라가 들려 있었다.
잭 패거리들은 바다 쪽 벼랑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소년이 좁은 벼랑 밑 길을 걸을 때 머리 위 바위 뒤에서 갑자기 호령 소리가 났다. 완전히 야만인이 된 아이들이 둘을 막아섰다. 아이들은 모두 창을 들고 있었다. 랠프는 절박하게 소라를 불었다. 그러나 아무 효과도 없었다. 잭의 심복 로저가 머리 위 바위 뒤에서 돌을 던졌을 뿐이었다.
죽고 싶냐. 랠프!
랠프는 떨고 있는 새끼돼지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후 아이들에게로 가 잭을 만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잭이 양쪽에 사냥부대원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의 뒤쪽 풀밭에는 배때기가 불룩한 머리 없는 암멧돼지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랠프는 잭에게 새끼돼지의 안경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불을 달라면 순순히 줄 텐데 안경을 훔쳐 간 것은 도둑놈의 짓이라고 말했다. 잭이 랠프의 가슴을 창으로 찌를 듯 덤벼들었다. 둘은 가슴을 맞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야만인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들이 들렸다. 랠프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잭이 아이들에게 둘을 잡아 묶으라고 명령했다. 새끼돼지는 랠프에게서 받은 소라를 마치 부적처럼 들고 서 아이들에게 호소했다. 야만인 짓을 그만두고 다시 합심하여 고향으로 가자고 외쳤다. 랠프는 좁은 길에서 창을 꼬나든 채 그들과 맞서고 있었다. 그 순간 벼랑 위의 로저가 바위를 굴렸다. 바위는 새끼돼지를 쳤다.
「새끼돼지는 12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져 바다 위로 삐져나온 네모진 붉은 바위에 등을 부딪쳤다. 머리가 터져서 골수가 삐져나와 빨갛게 되었다. 새끼돼지의 팔다리가 살해된 직후의 멧돼지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사냥당하는 랠프와 불타는 섬
랠프는 막대기 창을 움켜쥔 채 죽어라 달렸다. 야만인들의 함성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랠프는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몸을 웅크리고 숨은 랠프의 눈에 양쪽 끝 모두를 뾰족하게 깎은 막대기를 든 야만인 하나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랠프는 자신이 들킨 것을 알았다. 공포와 절망과 분노의 소리를 지르며 랠프는 야만인에게 달려들어 막대기를 휘둘렀고 야만인은 나뒹굴었다. 그러자 함성을 지르며 다른 야만인들이 달려들었다.
랠프는 다시 달렸다. 그러나 그가 달려가던 쪽에 있던 숲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잭이 랠프를 잡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이었다. 랠프를 발견했다는 신호가 어디선가 터지자, 이곳저곳에서 잭의 패거리들이 달라붙었다.
랠프는 절망적인 공포에 쫓겨 불이 붙은 숲에서 나와 모래사장 쪽으로 달렸다. 금방이라도 야만인의 막대기가 자신의 머리를 후려갈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눈에 바닷물이 보인 순간 랠프는 쓰러져 뒹굴었다.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선 랠프의 눈에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흰 견장과 금빛 단추, 그리고 연발 권총을 찬 해군 장교 하나가 모래 위에 서서 랠프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교 뒤쪽 해안에는 군함에 딸린 작은 배 한 척이 있었고, 해군 두 사람이 배를 누르고 있었다. 배 위에는 경기관총을 든 해군 하나가 서 있었다. 장교는 친절하게 말했다. 섬 근처를 지나다 불길을 보고 찾아왔노라고. 잭이 지른 불이 랠프를 살린 것이다. 랠프를 쫓아온 야만인 아이들은 창을 든 채로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섬은 죽은 나무와 같이 시들어버렸다ㅡ사이먼은 죽고ㅡ 잭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섬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온몸을 뒤흔드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떠맡긴 채 그는 울었다.」
다른 소년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몸을 떨며 흐느꼈다. 소년들의 울음에 휩싸인 장교는 아이들이 기운을 차릴 시간적 여유를 주려고 기다렸다. 장교의 뒤로 멀리 산뜻하기만 한 순양함이 보였다.
야만과 문명의 갈림길에 선 내 인생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야만의 무인도에 살고 있나요, 아니면 문명이 넘치는 인간 사회에서 살고 있나요.
......「너도 알지? 나는 너희들의 일부분이야. 아주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일부분이야. 왜 모든 것이 그릇되게 돌아가고 모든 일이 현재의 이 모양으로 되었는가 하면, 그건 모두 나 때문이야.」
혼란에 빠진 사이먼에게 파리 떼의 왕, 파리대왕이 속삭인 말입니다. 어쩌면 야만성이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 몸속을 흐르는 피에 야만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탐욕,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본능, 타인은 나를 위해 존재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극도의 이기심. 이런 남보다 더 유리한 생존을 위한 본성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본성을 이기는 정신과 의지를 갖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발정기라고 해서, 자손의 번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 데서 아무나와 교미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야만성이 인간 본성 중의 하나라면, 그것을 합리성과 상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야만의 시대를 문명의 시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인간입니다.
「잭은 이 말을 하면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일어났다. 두 소년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편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희열과 전략의 세계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우리 인생이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한쪽은 이기심과 분열과 증오가 지배하는 야만의 세상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연대와 상생이라는 문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공익이 아닌 사익을 위해 권력을 탐하는 자들, 약간의 이익을 얻고자 그들에게 부역하는 자들. 이런 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의 야만성은 통제 불가능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정글에는 정글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육강식’입니다. 강자의 포식을 위해 약자가 희생되는 것이 정글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면, 인간사회는 달라야 합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인간사회를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할 때 많이 가진 자가 적게 가진 자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기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이 갖기 위해 그들의 것을 빼앗기까지 한다면, 그 사회는 인간사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문명사회가 아닌 야만의 세상입니다.
우리 모두의 선택이 모여 우리 모두의 인생이 가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만 사회가 끝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 딴지일보 인빅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