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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합니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둘째 날인 8월 9일, 스무 명 남짓한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있다는 한 참가자는 질문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재철 목사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는 그는 책을 대할 때마다 행복했지만, 정작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는 물음과 함께.
이재철 목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 중독자였습니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저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저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석자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재철 목사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이재철 목사는 눈물을 닦으며 질문을 한 참가자에게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 까지라도 해야 하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 초년생의 절규에 이재철 목사는 쉽게 꺼내놓기 쉽지 않은 지나온 삶의 질곡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한 젊은 목회자가 평생 참된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위한 마음에서였다.
이재철 목사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 형상이 남자면 남자만 만들었을 것이고 여성이면 여자만 만들었을 텐데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여자와 남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 있다고 본다. 교회에도 여성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목회자도 있어야하고 장로도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됐을 때 그 해에 여전도사를 안수 받게 했다. 그러나 여성 교역자들이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목회를 해야한다는 점이다.
여성 교역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결혼하면 애 낳고 키워야하는데 남성 교역자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똑같이 할 수 있는가? 그것 할 수 없다면 여성 교역자들의 일은 결국 제약적이지 않은가. 우리 교회의 여성 목사는 독신이다. 그 분은 다른 남자 교역자들과 조금도 구별하지 않는다. 그 목사는 우리 교회에 두 번째로 빨리 들어와서 봉급도 두 번째로 많이 받고 있다. 일을 맡기거나 역할에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이런 것들을 다 하면서 "남자 교역자 같은 자리를 다오"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더 하나님의 유익이 있지 않겠는가. 이 부분을 여성 목회자들이 꼭 생각해야 될 부분이다.
참가자 / 목회자로서 비전에 대해 말해 달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이나 꿈을 비전이라고 포장한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는 나오지만 후유증이 남을 때가 더 많다. 내가 <비전의 사람>에서 말했듯 비전은 나의 비전이 아니고, 가령 나를 예로 든다면 수렁에 빠져있던 불쌍한 이재철이라는 한 인간을 정애주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면,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 분의 비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비전은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분의 비전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다. 그럼 그 비전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기도원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나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들의 인생은 모자이크 판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내일 무엇이 될 지 모르지만 오늘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고 열심히 한 장씩 색종이를 붙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에 13년 동안 다소에서 칩거하고 1년 동안 안디옥에서 목회하다가 선교사로 파송된 뒤 근 20여 년이 지났을 때, 에베소에서 열심히 살아온 자기 인생의 모자이크 판을 보고 "아! 로마구나, 내 생을 던질 곳이 로마구나"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청년 집회에 가면 로마의 비전을 받은 바울처럼 아프리카 비전 받을래, 남미 비전 받을래 하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교지마다 문제투성이다. 그건 내 비전이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열심히 모자이크 판을 붙이다 보면 어느 날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안 부르는 주님의교회와 제네바한인교회를 간 것도 주님의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매일 매일 살았다. 그랬더니 20년 동안 자립되지 못했던 교회가 이제 자립을 해서 지금은 다른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됐다. 내가 떠난 지 10년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비전은 내가 내 것을 찾아서 이루려고 하며 꼭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생을 던지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참가자 / 목사의 가정, 사모의 역할에 대해 말해달라.
이재철 목사 / 목사의 가정은 모든 사람이 들여다보는 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는 쇼윈도가 되어야한다. 내 자식들은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식은 세상대로 키우겠다고 하면 구도의 길을 우리가 걸을 수 없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목사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어야 하고 자식에게 좋은 아버지여야 한다.
첫 째는 부부는 영촌이라고 했다. 영촌의 거리를 존중하라. 남편은 아내의 여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아내는 남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여성성을 황폐화시킨다. 이렇게 하면 좋은 수족은 될 수 있어도 좋은 아내나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아내가 될 때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제네바 있을 때 아들 넷을 데리고 온 아내가 왔는데 이건 흡사 투사의 모습이었다.(웃음) 아들 넷을 혼자 키우며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렵게 사신 권사님 댁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길에 아내가 귀걸이를 하고 나왔길래 내가 귀걸이를 빼라고 했다. 어렵게 혼자 살아오신 권사님께 목사 사모가 귀걸이를 하고 찾아뵙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었다. 아내는 두말없이 귀걸이를 뺐다.
아내는 여성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걸이 어렵게 사서 달은 것이었는데 내가 몰랐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아내는 그 말을 들을 때 흡사 거세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목사 사모의 틀을 강요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 다음 올 때를 기다려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귀걸이를 샀다. 귀걸이를 보고 좋아하는 아내가 나에게 귀 뚫어도 되냐고 물었다. 귀를 뚫어야 하는 귀걸이었는데 그런 것도 몰랐던 것이다. (웃음) 그래서 내가 제네바에서 귀 뚫는 데까지 가서 귀를 뚫어줬다.
그리곤 내가 아내에게 당신 나이 정도 되면 옷 입을 때 무슨 색깔 입을까 묻지 마라. 당신이 충분히 절제하니 당신 여성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바로 이런 노력이 있을 때 신뢰가 가는 것이다. 자식들 역시 그런 부모를 보면서 같은 가치관을 키워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기때문에 내가 목사라고 해서 내 처가 후회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내가 아는 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가 같이 왔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웃음)
김영봉 목사 / 두 개의 질문이 남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대신 읽겠다. 이재철 목사는 함께 사역하고 있는 부교역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재철 목사 / 교역자들을 부목사님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다 같은 목사요 동역자인데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부목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부 자를 빼고 부르는 분들도 계신다. 내 목회 철학은 내가 열심히 헌신해서 나로 인해 부목사들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님의교회 때부터 선임 부목사와 내 월급의 차이는 10만 원이었다. 재정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내 봉급을 올려줄 생각하지 말고 동역자들 월급 올려드려라. 그러면 나도 10만 원 올라간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은 나를 배우겠다고 지원을 해서 삼수 끝에 들어온 분들도 있다. 나는 그 분들에게 "나를 배워서는 안 된다. 나를 넘어 서야 된다. 나는 얼마든지 여러분들의 디딤돌이 되겠다. 나를 밟고 서라. 나는 이미 예순이 넘은 사람이고 구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대로 해선 안 된다. 나를 밟고 서면 내가 여러분들을 버텨 줄테니 여러분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한 부분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우리 교회는 나를 포함해서 교역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택만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유가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살이를 한 사람이다. 교인 석에 앉아서 목회자들을 지켜 본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 가운데에서 학부부터 신학교를 가고 졸업한 사람들은 세상을 모른다.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른다.
돈 버는 것 절대 쉽지 않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상사로부터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여러분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 집사들 다 주일에는 웃고 앉아 있지만 그 분들 하루에도 열 번씩 사표 생각할 것이다. 못 죽어서 그 직장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 교역자들은 졸업해서 용케 한 교회의 전임 교역자만 되면 한국 상황에서는 집 주고, 차 주고 전부 다 준다. 그러니 세상살이를 모르니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아름다운 설교를 해도 현실 속에서 뼈 빠지게 살면서 온 사람들에게 목사의 설교는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에게 보수는 나하고 별 차이 없이 많이 드리되, 적어도 집만은 사글세를 내더라도 본인이 책임지자고 했다. 세상도 알고 가장으로 내 집안 식구들을 내가 사는 집은 사글세 돈이라도 내가 내고 살겠다는 결단이 서 있는 목회자만 이재철이의 사병이 안 될 것이다. 내가 잘 못하면 "목사님 틀렸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이 목사가 변질됐다 생각하면 교회를 박차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장치를 스스로 만들어둬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것 다해 주는 것, 그 안락한 삶에 젊은 나이부터 적응해버리면 결국 그 교회 담임목사와 재정 장로의 사병이 되어버린다. 한국 교회에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교회 교역자들이 다 목사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나. 왜 그러겠나. 여기 나가면 내 자식들 살 데가 없기 때문이다. 사글세방에서 살 결심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100주년기념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사택을 안 주는 것은 돈을 아끼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 아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목회자의 정신을 지켜주는 한 방편이다. 그래서 그런 목회자를 뽑을 때부터 단서조항이 붙어있기 때문에 편안한 길을 가시려는 분들, 굉장한 학력을 가지신 분들은 아예 지원하지 않는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만 한다. 목사답게 살아보겠다는 사람만 지원한다. 매년 뽑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재수, 삼수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봉 목사 / 마지막 질문도 대신 읽겠다. 100주년기념교회의 교인의 참여율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곽선희 목사가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강연에 와서 교인들 중 10%만 헌신을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주님의교회에서나 100주년기념교회에서나 헌신적으로 하는 교인들이 10%를 훨씬 넘는다고 생각한다. 묘지 참배객들을 위한 봉사자가 주중에만 연 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구역들이 돌아가며 관리부 집사들 수십 명이 나와 예배당을 청소한다. 그래서 양화진 묘역이 있기 때문에 그 묘역을 청소하는 관리인들은 있지만 건물 안을 청소하는 청소부는 없다. 교역자 사무실은 교역자가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목회자가 자기의 것을 포기하면 세워진다고 말했는데, 내가 한때 영적으로 방황할 때 내가 스님들도 친구로 삼고 신부들과도 교분을 쌓으면서 그분들을 보면 구도의 정신, 가는 길은 다르지만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았다. 주님의교회를 개척하고 새벽기도가 끝나면 동역자들과 함께 사무실 책상을 내가 걸레질하고 사무실 쓸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 출발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청소다. 궂은일부터 구도의 삶이 시작된다. 내가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서점에 가니 누가 나를 전도사라고 불렀다. 나는 내가 전도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서점 주인 대답이 "입학하면 다 전도사지 않나"고 했다. 신학교는 가면서부터 전도사이고 아버지 같은 교인들 회의하는 데 가서도 상석에 앉는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구도의 삶을 살기 힘들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은 전부 자기 손으로 한다. 그렇게 교역자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한 두 사람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강남 YMCA 건물 전체를 교인들이 매일 다 쓸었다.
교인들의 참여율을 어떻게 올리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 목회자가 앞장서면 된다. 교인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세워질 때 내가 58살이었는데 지하실에 사무실을 줘서 3명이서 닦고 준비하며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런 것이 교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김영봉 목사 / 준비한 강의 대신 즉각 질문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했다. 두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강의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첫댓글 길다는 생각없이 읽었어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네요 좋은 기사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